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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32/134)
  • 132화

    13. 외전 (2) : IF 비칸과 이어졌다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선택의 순간이 도래한다.

    둘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하는 때.

    고민 끝에 한 가지를 품에 안았다면 다른 선택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 *

    가죽 덮개 틈 사이로 끝내 태양열이 밀어닥치는 계절이었다. 그러잖아도 더운데 조밀하게 짜인 근육질의 품 안에 갇혀 있던 레그리아. 아니, 할리카는 결국 호흡이 가빠와 눈을 떴다.

    여름이다. ‘그 날’로부터 계절은 세 번이나 돌았고 또 몇 달이 이리저리 흘러가 뒤돌아서니 어느덧 여름의 초입.

    초원이 가장 풍성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며 양이 살찌고 물소 새끼가 태어나는 때이기도 했다.

    할리카는 저를 안은 무거운 팔을 낑낑거리며 옮기고는 살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고 자부했는데 그래봤자 최고 전사 앞에선 소용없었던 것인지 사내가 눈가를 움찔했다.

    “할리…카.”

    어떻게 보면 잿빛이기도, 빛의 산란이 오간 곳을 흘긋거리면 푸르게도 느껴지는 머리칼. 굵은 턱선과 뻗친 눈썹이 이제 완연히 익은 사내의 그것이다.

    그러나 눈꺼풀 아래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순하며 따스했다.

    최소한 그녀에게만큼은.

    “비칸, 아침이야.”

    “으음.”

    “잠꾸러기. 최고 전사가 이렇게 아침잠이 많을 줄 누가 알았겠어?”

    비칸의 곁에 있기를 택한 그 날부터 그녀의 이름은 할리카가 되었다.

    그녀의 짝. 그녀의 남편. 그녀의 반려.

    비칸에게는 그녀만 알고 있는 귀여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차라리 안 자면 사흘 내내도 멀쩡히 깨어 있는데 잠만 잤다 하면 눈을 뜨는 게 고된 모양이다.

    “할리카! 아침 수영하러 안 갈래? 물도 뜨고!”

    그때, 바깥에서 에와의 목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에와는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인데 이 부족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인이다.

    그런 만큼 제 모습을 꾸미는데도 신경을 많이 써서 아침마다 꼭 강에서 몸을 씻곤 했다.

    처음에는 욕실이 아니라 강에서 씻는 게 너무 어색하고 이상했지만 에와 덕분에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렇게 야외에서 씻는다고 한들 그 어떤 초원의 사내도 장난삼아 엿보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이곳 남자들은 존중이라는 걸 할 줄 알았다.

    “뒤따라갈게, 먼저 갈래?”

    “에이, 남편이 오늘도 안 놔줘?”

    “좀 그러네.”

    “힝. 그럼 오늘도 집에서 씻겠네! 알겠어!”

    초원의 집들은 외벽이 튼튼하지 않았다.

    계절에 따라 부수고 옮기고 다시 짓고를 반복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목청을 높이면 얇은 나무 판과 가죽 너머로 그 소리가 다 들려오니 편리하기도 하면서 단점이 되기도 했다.

    지금처럼 비칸이 허리 아래로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을 때는 특히 더.

    “좋은… 아침.”

    “잘 잤어?”

    “꿈에 당신이 나왔는데….”

    촉.

    가벼운 입맞춤이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이어질 행위에 대한 예고였을 뿐.

    단단한 팔뚝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은 비칸은 등줄기를 따라 슬쩍슬쩍 입맞춤을 남기며 불씨를 피워냈다.

    “나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

    “흣!”

    “질투가 나.”

    “아, 비칸. 잠시만…!”

    어느새 시야가 전복되더니 비칸이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자꾸 이렇게 어리광을 받아주면 안 되는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면 꼼짝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아무래도 좋아지는 것이다.

    “싫은가?”

    종아리를 타고 거친 입술이 느슨히 미끄러진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목구멍이 조여든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잘게 흔들자 비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이따 씻겨 주면, 응!”

    “기꺼이.”

    비칸이 그녀를 아끼는 방식은 몹시 섬세하면서도 집요했다.

    그는 그녀의 모든 수발을 들고 싶어 했다.

    강한 여인들이 가득한 초원에서는 상대방을 씻겨 준다는 게 그리 흔하지는 않은 일이다.

    굳이 따지자면 유별나다 정도.

    하지만 비칸은 그녀를 씻겨 주기 위해 나무를 베어 넉넉한 크기의 통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갈 뜨거운 물을 데우는 것도 직접 했다.

    온몸의 말초신경이 녹진해져 아무것도 못한 채 기절하듯 까무룩 잠들어 있으면 어느새 그가 안아 들어 씻겨 주고는 했다.

    구석구석까지 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도록.

    “수영, 하고 싶었나.”

    “더우니까. 지금은.”

    “그럼 오늘 밤에 둘이서 강에 갈까.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사람이 쓰지 않는 강줄기가 있다.”

    “좋아. 갈래.”

    커다란 성, 깨끗한 의복, 언제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나오는 음식들.

    마귀가 된 라히크를 끝내 외면하고 비칸을 택한 그 날, 할리카가 잃은 건 그런 것이었다.

    일종의 문명의 이기라고 해야 할까.

    대신 그녀가 얻은 건 태양이었다. 귀만 기울여도 들려오는 바람 소리, 거기에 섞인 웃음. 모두가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안고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

    초원이 낙원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불편한 부분도 많이 있었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질투하고 미워하는 감정들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조차 내가 느끼기엔 너무 순수해.’

    이곳 사람들은 앞과 뒤가 다르게 살지 못한다. 싫으면 싫은 티가 났고 꺼려 하면 꺼려 하는 티를 냈다.

    할리카는 그러한 순수가 너무나 좋았다.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잖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니까.

    숨겨진 의도를 계산하고 지금 나누는 대화가 차후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고민하고, 진짜 칭찬이었을지 비꼬는 말이었는지 파악해야 하는 그런 것.

    할리카는 거짓과 기만에 너무나 지쳐 있었기에 초원에서의 삶은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영양처럼 뛰는 법을 배웠다. 초원에 서식하는 초식 동물처럼 포식자를 경계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몸도 연약할뿐더러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버리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할리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엔 안 좋은 시선으로 보던 사람들도 1년이 흐르고 2년이 지나자 이제 어느 정도 그녀를 부족원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인내심과 끈기, 노력의 승리였다.

    “사랑한다, 할리카.”

    “으응, 나도.”

    “사랑한다고 해 줘. 당신의 입술이 그 말을 뱉는 걸 보고 싶다.”

    “나도 사랑해, 비칸.”

    서로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는 밀어가 달콤하기 그지없다.

    이게 바로 할리카가 자신이 포기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이유였다.

    비칸.

    처음과 같이 지금도 저를 사랑해 주는 남자.

    비칸의 무한한 애정을 받으며 할리카는 자신이 치유되고 있음을 알았다.

    언제나 마음을 시리게 했던 과거의 상처가 옅어지고 흐려지더니 이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흉만 남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뾰족뾰족한 가시를 세운 채 살아야 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어디서 무슨 일에 처해도 반드시 비칸이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 역시 꽤나 튼튼해져서 도망치는 것쯤은 할 수 있게 됐고.

    이렇게 살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그녀 역시 사냥을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기대마저 들었다.

    피식자의 껍데기를 버리고 포식자가 될 기회.

    여기서는 그걸 얻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 해야지, 비칸!”

    “그만 좀 나와라. 어떻게 된 게 3년째 신혼이냐!”

    밖에서 전사들이 휘파람을 불며 비칸을 불러댔다. 땀이 나든 말든 할리카를 껴안은 채 움직이지 않던 비칸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조용히 옆에 놓인 창을 집어 드는 게 아닌가.

    할리카는 불청객을 패서 내쫓겠다는 의지가 강렬히 보이는 두꺼운 등 근육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시, 식사하러 가자, 비칸.”

    “배가 고플 만도 하지. 금방 씻겨 주겠다.”

    “물을 데울 필요 없어. 너무 더워.”

    “그러면 상류에 가서 물을 길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

    끝까지 창은 놓지 않는 걸 보니 물을 길으러 간 김에 두들겨 놓고 오겠다는 듯했다.

    더 말려 볼까 하던 할리카는 그냥 포기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수영은 역시 못 가겠네. 몸이 이래서야.’

    비칸은 거대한 불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비하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정말 짐승처럼 달려든다고 해야 할까.

    아침부터 시달렸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저는 이렇게 피곤한데 비칸은 저렇게 쌩쌩하니 뭔가 좀 억울하기도 하고.

    하긴, 체내 근육량이 다를 테니 어쩔 수 없나.

    씻고 나서 밖으로 나가니 활기찬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잘 잤느냐는 인사부터 시작해서 무슨 꿈을 꿨다거나 하는 내용까지 주고받는다.

    그냥 눈이 마주치면 인사와 함께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게 초원의 문화였다.

    “이제 나왔네!”

    “에와. 수영 못 가서 미안해.”

    “미안하긴, 남편이랑 노는 게 우선이지. 오후에도 수영 갈 건데 그땐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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