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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131/134)

131화

“됐어.”

그런 그의 고민을 끊은 것은 역시나 레그리아였다.

새삼스레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본 라히크는 레그리아가 빛난다고 여겼다.

더위가 내려앉은 여름 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태양처럼 아름답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역시 빨려들 듯 매혹적이었다.

“아이를 낳는 것도 내가 원하는 평범한 삶이야. 평범하게 클 아이들은 아니겠지만.”

“!”

“그래도 양육 방식은 내가 정할 거야. 차기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아는데… 그래도 내가 아이들을 끼고 키우며 가르치고 싶은 게 있어.”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현실로 돌아온 이후 레그리아는 아이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에클리-오페 안에 있을 때도 라히크가 느낀 것은 망설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이든.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얼떨떨함이 가시고 나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차오른다.

이 감정을 일컬어 기쁨이라 하는가.

아니, 고작 그런 걸로 설명이 되진 않는다.

이건 환희였다.

레그리아가 그를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증표.

그와 가족을 이뤄주겠다는 저 한 마디가 어찌나 귀한지.

말을 형태로 만들 수 있다면 만금을 바쳐서라도 지금 당장 그리하여 소중히 보관하고 싶었다.

“뭐야, 그렇게 좋아?”

그런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레그리아가 키득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어여쁜 눈동자에 생기와 함께 진중함이 감돈다.

“첫 애는 아들이면 좋겠다. 그 뒤로는 딸만 낳았으면 좋겠어.”

“노력해 보지.”

“뭘 노력한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농담은.”

“그래도. 네가 원하는 대로, 네가 원하는 형태의 가족이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숨이 다 하는 날까지 그의 것이길.

아들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모두 레그리아를 닮았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괜찮았다.

단 한 올의 금빛도 타고 나지 말기를.

모두 너를 닮아 이토록 아름다운 붉음을 띄기를.

“자주 여행을 다니고 싶어. 아무리 바빠도 계절마다 한 번씩은.”

“약속하겠다.”

“평민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황궁 바깥에서 지내는 시간이 우선이었으면 해. 당신을 닮았다면 제왕학은 좀 늦게 배워도 괜찮을 거야. 못 따라갈 리 없겠지.”

“그래.”

“아이가 실수를 하거나 뭔가를 잘 못해내더라도 혼을 내선 안 돼. 절대로. 강요해서도 안 되고.”

“그리하지.”

레그리아가 꼽는 조건은 황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황자를 낳고 나서 저리 하겠다고 하면 대신들의 반대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니 레그리아의 바람을 들어주려거든 애초에 후계자를 배는 조건을 공표하고 협박이 섞인 합의를 끌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라히크는 꼬장꼬장하여 제일 심하게 반대할 만한 자들의 명단을 머릿속으로 주르륵 훑었다.

‘한 놈은 조만간 과로로 휴양을 보내야겠군. 나머지는 거역할 수 없도록 약점을 잡는다.’

치워버리는 게 여의치 않으면 협박하면 될 일이다.

레그리아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못할 것은 무엇도 없으니.

“저, 저어. 꽃… 좀 사 주세요.”

그때였다.

벤치에 앉은 그들을 향해 꽃팔이 소녀가 다가왔다.

낡은 신발, 깨끗하지 못한 머리카락. 한쪽 팔에는 제 몸 만한 바구니를 끼고 그 안에 어디서 딴 꽃을 한가득 넣고 있는 아이.

그런 소녀를 눈에 담자마자 레그리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이리 와라.”

“네, 네!”

“그 바구니의 꽃을 전부 사면 넌 오늘 집에 갈 수 있느냐.”

“아, 그, 네!”

“그렇군. 모두 사마. 은화 세 개면 값이 되나?”

라히크의 질문에 소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라히크는 당연히 화폐의 가치에 대해 잘 알았다.

저 바구니 통째로 사들여도 은화 하나면 족하다. 세 개는 많았다.

하지만 축제날의 행운 정도로 퉁칠 수 있을 정도지, 심각하게 과한 건 또 아니었다.

은화 세 개 중 두 개는 소녀의 고용인에게 돌아가겠지만, 하나는 몰래 감출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제 낡은 신발 밑창을 열더니 거기에 은화 한 닢을 쏙 집어넣었다.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만 하던 레그리아는 소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입을 열었다.

“저 아이.”

“그래.”

“똑똑하네.”

“마음에 드나? 수소문하여 하녀로 들이겠다.”

“그건….”

“보다시피 꽃을 팔아야 하는 처지다. 황궁의 하녀가 되면 감읍할 일이지.”

바구니 속의 꽃은 대부분이 새하얀 것이었다. 불그스름한 머리칼과 대비되어 아름답게 어울릴 만한 색.

그 안에서도 꽃잎 한 장이라도 상하지 않은 것을 골라내며 라히크는 레그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보다는… 교육을 시켜주고 싶어서.”

“공부를?”

“영민해. 배우면 하녀 일보다 더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 저 아이를 빼내 기숙 학교에 보내면 될 일이다.”

“그건 황후의 권한으로?”

“백성을 살펴 은혜를 내리는 건 황후의 일이지.”

“…그렇겠지.”

“네가 결심한다면, 너로 인해 저 아이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거다.”

사락.

새하얀 꽃 한 송이를 뽑아들어 레그리아의 귓가에 꽂아준 라히크는 부드럽게 웃었다.

무해한 소동물처럼,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사람인 듯.

“남들보다 더 많은 권한을 지닌 게 부담스럽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이면 된다. 저런 아이들이 있을 만한 자리를 만들면 어떠한가.”

“꼬드기는 기술이 상당하네.”

“나는 여전히 네가 황후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랬지.”

그가 바라는 세상에서 황후는 황제와 같이 완벽해야만 했다.

황제가 국외 정세를 살피고 전쟁을 대비하며 굵직한 정책들을 해결해 나간다면 황후는 반대로 국내 정세를 살펴야 한다.

저렇듯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미물에 가까운 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역시 황후가 할 일.

기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레그리아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도 한 번은… 황궁 바깥에서 살아보고 싶어. 몇 년이라도 좋아. 아니, 단 1년이라도.”

“수도를 벗어나겠다는 것만 아니라면야.”

“그래. 그게 우리 타협점이었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럴게.”

“언제 나가려고?”

“이제 큰 일이 없잖아. 내가 나가도 될 것 같은데.”

무심히 대꾸하며 일어선 레그리아는 여전히 라히크의 손을 쥐고 있었다.

놓으려 하지 않는다.

더는 달아나지 않는다.

그건 라히크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었다.

“헌데 어디서 살려고.”

“응? 집 있잖아.”

“설마….”

그가 선물했던 수도의 집. 노부부가 살던 그곳.

용의 열매가 맺히는 가지를 심어두었던….

“난 우리 애들도 거기서 키울 거야.”

이제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환한 달을 올려다보며 레그리아는 다시금 속삭였다.

“사랑을 듬뿍 주면서.”

외롭지 않게.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도록. 편애하지 않고.

그런 레그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라히크는 그녀의 이마에 한 번, 뺨에 두 번 입을 맞췄다.

“그러려면 일단 내 아내께서 사랑을 먼저 받으셔야겠지.”

“아내라니. 결혼식도 안 한 사람 혼삿길 막지 마.”

“그게 싫으면 연인이라 할까. 그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네 정부라 하여도 좋다.”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

몸을 살짝 비틀긴 했지만 레그리아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특징 하나. 그녀는 피곤하면 뭐든 포기해버린다.

저항도, 짜증도, 거부도.

그냥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으므로 라히크는 아예 레그리아를 안아들었다.

“돌아가지.”

“으응.”

특징 둘. 레그리아는 피곤이 임계점에 이를 때 까지는 멀쩡한 제정신을 유지한다. 하지만 단 한 방울의 물방울이 은대야를 넘치게 하듯, 그걸 넘어서면 그 순간부터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바짝 신경 써서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

‘그 안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레그리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내면은 이제 충분히 잘 알게 되었으나 육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1년은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며 오롯이 탐구해나가고 싶은데 그러기에 현실에선 해야 할 일이며 의무 따위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 알아주면 좋겠는데.”

낮게 중얼거린 그는 대기시켜둔 마차에 오르며 레그리아를 편히 뉘였다.

행복했던 데이트. 아마 그는 이 하루를 길게도 잊지 못하겠지. 망막에 새겨져 죽는 그 순간에도 오늘의 레그리아가 재생될 게 분명했다.

“언젠가 네가 내게 ……한다고 해주기를.”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라히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단 한 번도 그에게 해준 적 없는 말이 있다.

레그리아가 언제 그 말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내 심장을 꺼내 바칠 만큼, 사랑한다. 나의 짝.”

어느새 잠든 레그리아에게 떨어진 다정한 고백.

돌아오지 않는 대꾸지만 상관없다.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여름 밤 달이 어여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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