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134)
  • 130화

    * * *

    거리는 시끌시끌했다.

    일단 자신 있게 광장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좋을지 전혀 몰랐던 레그리아는 제 옆의 남자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길, 알아?”

    “그럴 리가.”

    “그럼… 아무 길로 가도 되는 건가.”

    라히크가 제아무리 완벽주의자라도 갑자기 외출을 하자고 한 것이니 수도의 길을 조사해 두었을 리가 없다.

    하긴, 그렇게 까지 했다면 정말 미친놈인 거니까.

    “자, 여기 재미있는 쇼가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이 광장에서 서커스가 열립니다!”

    그때였다.

    커다란 천막에서 광대가 나오더니 공 위에 물구나무로 서선 큰 소리로 외쳐댔다. 거기다 두 발을 부딪쳐 정신 사나운 박수까지 쳐대니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그 장면을 다소 멍하니 보던 레그리아는 문득 제안을 했다.

    “서커스, 볼래?”

    천하의 라히크가 알겠다고 할 리가 없지.

    “그래.”

    “어…?”

    “보고싶다면야.”

    언제 구비해두었는지 제법 평민 것 다운 셔츠에 단순한 검은색 바지를 착용한 채로도 훤칠한 사내였다.

    황제의 상징이 된 금발을 가리기 위해 어두운 빛깔의 가발을 쓴 라히크는 레그리아를 내려다보며 턱을 까딱였다.

    “표를 사러 가지.”

    “어… 좋아.”

    왜 저렇게 순순하지? 뭘 잘못 먹었나?

    “그깟 쓰레기 같은 공연, 볼 생각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리 나라도 데이트 때 상대에게 그러진 않는다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또 언제 들은 건지 라히크가 다가와 표를 내밀었다.

    “공연이 시작하는 건 한 시간 뒤라고 하니 그 전에 뭔가를 좀 먹어둘까.”

    “…뭘 먹는다고? 바깥인데?”

    “평범한 부부는 그리하지 않나.”

    “그건 그런데.”

    라히크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에 레그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물론 라히크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라는 사람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건 아니다.

    라히크는 여전히 라히크였다.

    조금 더 대화라는 것을 할 줄 알고, 사람답게 바뀌었을 뿐.

    길에서 만들어 파는 평민의 음식을 자진하여 먹겠다는 말이 놀라울 수밖에는 없었다.

    “네가 싫으면 그만 두고.”

    “아냐. 나도 아무것도 안 먹고 나왔어.”

    “그럼 가지. 저쪽에서 음식을 파는 것 같으니.”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어쨌거나 레그리아는 걸음을 옮겼다.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들을 들으니 괜히 신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는 말도 안 되는 신격화에 대해 네가 한 짓 아니냐고 추궁을 하려 했는데….

    ‘그건 좀 이따 해도 되겠지.’

    해가 지려는 찰나의 하늘이 주홍, 보라, 파랑으로 뒤섞여 오묘했다.

    걷는 길마다 고여 있는 여름 향기가 싱그럽다. 약간 눅눅한 바람에 튀김이며 닭구이 냄새가 섞여 위장을 자극했다.

    그 중에서도 레그리아가 멈춰 선 곳은 동글동글한 형태로 빵 같은 것을 구워 파는 수레였다.

    위에는 달달한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는데, 당연하게도 이런 것은 황궁에선 먹을 수 없는 종류였다.

    황궁에선 완벽하게 건강을 신경 쓴 식단만이 나오니까.

    “어서 옵쇼! 두 분이 연인이거나 부부시면 할인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라히크에게 평민들이 쓰는 돈이 있나?

    의아해서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가 꺼낸 것은 금화였다. 그것도 뭉치.

    “라히크. 이게 얼마 할 거라고 생각해?”

    “글쎄. 연인이나 부부는 할인을 해준다고 하니 금화 하나 정도면 거슬러 주지 않겠나.”

    “……오늘 결제는 다 내가 할 테니 돈 내놔.”

    그럼 그렇지. 라히크가 시세를 알 거라 생각한 게 오산이다.

    레그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금화 같은 건 가격 차이가 너무 나기에 받는 쪽도 부담이 된다. 전부 은화로 바꿔야만 오늘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환전소 있네. 저기로 먼저 가자.”

    “돈을 바꿔야 하나?”

    “당연하지! 어휴, 정말.”

    그렇게 앞서나간 레그리아는 미처 보지 못했다.

    뒤쪽에 선 라히크가 입가를 가리는 것을.

    * * *

    ‘이렇게 까지 기뻐할 줄이야.’

    약 두어 시간 뒤. 계획했던 대로 서커스 공연까지 본 라히크는 평소와 달리 들뜬 게 분명한 레그리아를 흘긋거렸다.

    두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고 평소보다 입술이 좀 더 벌어져 있다.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 탓에 목은 조금 쉬었고 오래 걸은 것이 힘든지 걸음은 점차 느려지는 중이었다.

    ‘성과가 좋았어.’

    오늘 축제를 즐겼으니 다음번에 다시 축제에 가자고 해도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이쪽으로 쭉 가면 공원이 나오지.’

    수도의 골목길과 큰 도로를 모두 그린 상세 지도를 만들어 살펴보니 군데군데 부족한 시설물이 있었다.

    이래서는 체력이 모자란 레그리아가 쉽게 지칠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라히크는 작은 공원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백성들은 물론이고 레그리아마저도 그것이 수도 정비 사업의 일환이라 여겼으나 라히크의 속내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의 새로운 기준은 레그리아이므로, 그녀의 걸음 수에 맞추어 쉴 만한 장소를 마련했을 뿐이었다.

    “이런데 공원이 생기니 좋네. 잠시 쉴 수도 있고.”

    “그렇군.”

    “돌아가면 이 공사를 한 사람들에게 상이라도 좀 줘. 다들 고생했잖아.”

    “그런 것을 챙기는 게 황후의 일이다. 적성에 잘 맞아 보이는데.”

    “…….”

    넌지시 한 마디를 던지니 불만스러운 듯 입을 꼭 다무는 게 보인다.

    당장이라도 안아들어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은 것을 참느라 입안이 바짝 마른다.

    너는 알까.

    내가 네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이 가느다란 목에 개목걸이를 채우고 얇은 두 발목에 발찌가 아니라 죄인에게 쓰는 족갑을 채워 사슬을 늘어트리고 싶다.

    무엇도 입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벗길 것이니.

    가장 햇살이 잘 들어오는 새장 속에서 영원히 그만을 기다리길.

    라히크는 그러한 욕망과 매 분, 매 초 살아 숨 쉬는 내내 싸워야만 했다.

    지리한 싸움이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승리다. 그러나 오늘도 승리를 거둬야만 한다.

    이 아름다운 눈동자가 경멸로 젖어드는 것은 원치 않으니.

    비로소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 비슷한 것이 담겨 있었다.

    그 길고 긴 대화에 종지부가 찍히고 현실로 돌아온 이후, 그가 기억하고 있던 이전의 레그리아와 가장 달라진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눈빛.

    그게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여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저기 봐, 라히크. 혼혈 아이야.”

    침묵하던 레그리아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과연, 어머니가 초원인이고 아버지가 벨리그레엄 인인 아이가 부모 사이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는 게 보였다.

    “행복해 보여. 부럽다.”

    “부러운가?”

    “응. 우린 왜 저런 축복을 받지 못했을까?”

    라히크는 에클리-오페 속에서 곤죽이 되었다.

    넋과 의식, 정신. 무어라 부르든 어찌되었든 그 자신을 이루는 것이 완전히 녹아 레그리아의 것과 뒤섞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라히크는 그녀의 상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아니, 그녀 자신인 것처럼 느꼈다.

    레그리아에게는 공허가 존재한다.

    채워도 채워도 허기지는 공허에는 그 구멍을 잠시나마 막아줄 만큼 넘치도록 쏟아지는 애정이 필요했다.

    “상관없지 않나. 이제 내게는 네가 있다. 너 역시 나를 가졌지. 나를 이루는 것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모두 네 것인데 갖지 못한 가족이 여전히 아쉬운가?”

    “벨리그레엄의 황제를 갖고도 아쉽다고 하면 지나친 욕심쟁이겠지.”

    레그리아가 픽 웃더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그 작은 온기가 마치 새 한 마리가 앉은 듯 가볍고도 따뜻하여 라히크는 가슴 부근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색, 새액.

    금세라도 끊길 듯한 숨소리가 달다.

    그녀의 호흡에 집중을 하고 있자니 주변의 모든 소음이 뭉그러져 더는 들리지 않았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기야 했으나 줄 수는 있는 것 아니겠나.”

    그 말이 나온 건 한없는 침묵이 이어지던 어느 찰나였다.

    주먹을 쥐었다가 편 라히크는 제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조용히 뒤로 감추었다.

    “우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정말 좋은 부모가 되어 주면.”

    “그때 셋은 낳았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아니, 넷이었나?”

    “그걸 기억하는군.”

    “좀 황당했거든. 낳는 건 난데 제 마음대로 숫자까지 정하다니.”

    흥.

    레그리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라히크가 꾸역꾸역 숨긴 손을 낚아채 손가락 사이를 엮어 쥐었다.

    “좋은 생각이긴 해. 언제 낳을지가 문제지.”

    “…정말인가?”

    “왜 그렇게 놀라?”

    처음 든 것은 의심이었다.

    레그리아가 그의 아이를 낳아줄 리 없다고, 가족을 이뤄줄 리 없다고. 무심코 그리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히크는 현재의 실수와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의 실수, 둘 중 무엇을 먼저 사과해야 할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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