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34)
  • 129화

    “모시겠습니다, 레그리아 님.”

    “그래.”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시녀들은 모두 성격 좋은 이들이었다.

    레그리아는 제 고집대로 황후가 아니었지만 황후와 같은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모두들 언젠가 그녀가 고집을 꺾고 황후 위 계승을 할 거라 믿는 듯했다.

    ‘그게 아닌데.’

    뭐, 라히크의 정부 취급을 받았더라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더러웠을 테니 이편이 더 낫긴 하지.

    길게 이어질 것도 아니다.

    레그리아는 곧 황궁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저어, 레그리아 님. 오늘은 배식을 중단하는 게 어떠신지요?”

    “왜 그러지?”

    “그게… 축제일이라 사람이 많습니다. 번잡하여 경호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참방.

    욕조에서 뜨거운 물을 즐기고 있던 레그리아는 시녀의 조심스러운 말에 잠시 갈등했다.

    맞는 말이다.

    그녀의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라히크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사실이었다.

    제 앞에서는 참는 것처럼 굴다가도 뒤돌아서면 관련자를 다 죽여 버릴지도 모르지.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포악성을 한쪽 눈을 감고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몸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 배식 봉사를 직접 하는 건 어렵겠네. 준비한 음식이 있지?”

    “네, 어제 나누고 남은 여분도 있습니다.”

    “그럼 그건 전부… 아니다. 축제에 한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해. 꼭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도 다 먹을 수 있다고.”

    라히크는 황제의 일을 맡아서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레그리아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바쁜 라히크를 붙들고 자신이 무얼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황궁을 나가겠다고 하기도 좀 그랬다.

    어쨌든 모든 게 정리가 되고 안정화가 될 때까지는 라히크의 옆에 있는 게 낫겠지.

    나라 전체를 위해서.

    그리하여 레그리아는 고민했다.

    자신이 라히크를 크게 신경 쓰이게 하지 않으면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 그러면서도 정치 같은 복잡하고 어렵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될 방법을.

    그러던 차에 떠오른 게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배식 봉사였다.

    그간 너무 ‘나’라는 존재. 스스로의 자아에만 집중을 해 왔다.

    환기를 할 겸 이제 타인에게 관심을 두어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하겠다는 일이 불법이거나 위험하지 않으면 모두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겠다고 약속했던 라히크였기에 별말 없이 승인을 해 주었다.

    곧바로 빵과 과자, 토마토 절임 같은 걸 만들 요리사 다섯 명과 배식 봉사를 도울 열 명의 하녀. 그리고 호위로 마흔 명의 기사가 발탁됐다.

    호위 숫자가 너무 많다고 하였으나 그것만큼은 물러서지 않아 레그리아는 또 다른 꾀를 냈다.

    그럴 거면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기사들도 배식 봉사를 도우라는 거였다.

    라히크는 승인했다.

    “처음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배식 봉사를 한다는 게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는데, 지금은 감탄스러워요. 어떻게 세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지…!”

    “맞아요. 레그리아 님에 대한 칭송이 온 거리에 자자해요.”

    “오늘 축제도 사실 레그리아 님을 기리면서 만들어진 축제래요.”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한 시녀들이 재잘거리며 레그리아의 머리칼을 빗겨 주었다.

    가만히 앉아 듣던 레그리아는 멈칫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를 기려?”

    “앗, 모르셨어요? 지금 온 나라가 난리예요.”

    “…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일부 사람들이 에클리-오페를 신성시했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에클리-오페일 때 이야기 아닌가.

    지금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니 신격화될 요소가 아무것도 없는데.

    “에이, 솔직히 레그리아 님처럼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백성을 아껴 주시는 분이 어디 있어요.”

    “맞아요. 다들 냄새난다며 다가가기도 꺼려 하는 게 뒷골목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비전하께서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세 달을 그들을 상대하며 음식을 베푸셨어요.”

    “레그리아 님은 지금 살아 있는 용서와 자비의 여신이세요. 그렇게 추앙되고 있어요.”

    미친.

    레그리아는 입을 벌렸다가 느리게 닫았다.

    라히크는 분명 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작은 소문 하나 흘릴 남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한마디 언질도 없어!

    ‘살아 있는 신이라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오글거려서 몸을 부르르 떤 레그리아는 서둘러 욕조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홧홧하게 일어나 도무지 뜨거운 물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폐하께 가서 전하렴.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시라고.”

    “어머머! 데이트 가시나요?”

    “……그건 아닌데.”

    “두분이서 나가시는 거지요?”

    “응.”

    “그럼 그게 데이트지요!”

    시녀들이 눈을 반짝였다.

    추궁 자리가 어느덧 데이트로 바뀌었으나 레그리아는 일단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이 건에 대해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평범해지고 싶었는데… 이러다간 황궁을 나가서 살아도 다들 알아보게 생겼잖아.’

    라히크야 그걸 노리고 소문을 부채질했을 인간…이기는 하다.

    가벼운 드레스를 걸친 레그리아는 침실 안을 천천히 돌았다.

    어쩐지 제 발등을 제 손으로 찍은 것만 같은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 * *

    황제 궁.

    지엄하기 그지없는 황제의 집무실.

    벨리그레엄 황제의 한마디면 세계의 경제가 출렁거리고 약소국이 지도에서 지워진다.

    대륙 전체를 주무르는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토록 두렵고 웅장한 자리의 주인이 하문했다.

    “소문은.”

    “오늘도 순조롭게 퍼지는 중입니다.”

    “축제는.”

    “성황리에 개최될 예정입니다. 황후께서 좋아하실 만한 서커스 팀도 세 곳이나 불러 두었고 가는 길에 시선을 끌 수 있을 만한 화살 쏘기, 공 넣기 등의 오락장도 곳곳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보좌관 조슈아는 침착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단 하나라도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

    시키신 일은 언제나 완벽하게 행한다.

    그게 보좌관이자 황태자 시절부터 라히크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충실히 이행하여 온 조슈아의 자부심이었다.

    “레그리아가 어느 길로 어떻게 가길 원하든 다 거쳐 갈 수 있게끔 확실히 하였겠지.”

    “예, 폐하. 저만 믿으십시오. 심지어 이동 동선에 반드시 꽃팔이 소녀가 서 있을 수 있도록 서른 명이 넘는 소녀를 불러 조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

    그만하면 되었겠지.

    라히크는 만족스레 입매를 끌어올렸다.

    레그리아는 못 가지고 비천한 자들에게 긍휼하는 마음이 대단한 이다. 완전함보다는 불완전함을 사랑하였고 그래서 약한 모습을 내보인 그를 받아들인 거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그녀의 환심을 살지 잘 몰랐으나 이제는 안다.

    라히크는 오늘, 레그리아와 데이트를 하며 가여운 꽃팔이 소녀에게 꽃을 살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을 안겨주며 너를 닮았노라고 속삭일 터였다.

    레그리아는 반드시 좋아할 것이다.

    대 벨리그레엄의 황제가 아닌, 평범한 평민 사내처럼 굴면.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조슈아에 따르면 레그리아의 시녀 중 두엇이 아직 어려 입이 가볍다 하였다.

    제 주인의 비밀을 내뱉고 다니는 그러한 가벼움은 아니고 종달새처럼 이리저리 지저귄다나.

    라히크는 조슈아로 하여금 그 시녀들 앞에서 거리의 소문을 내뱉도록 시켰다.

    오늘이 축제일이라는 것도 슬그머니 덧붙여서.

    그게 ‘용서와 자비의 여신 레그리아’의 축일임을 알게 되면 레그리아는 반드시 달려와 제 멱살을 잡을 터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할 만한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혹시 모를 타국의 습격이나 납치 사건에 대비하여 골목마다 기사들을 하나씩 배치하기도 하였으니 준비는 완벽하다.

    ‘언제쯤 깨달을지.’

    그의 곁에서 황후라는 명목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있는다고 한들 어차피 그가 해줄 것은 황후에 걸맞은 것들인데.

    라히크는 피식 웃으며 깃펜을 들었다.

    그는 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교활해질 수 있었다.

    만약 황궁을 나가 살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하는 중이라면, 그래. 좋다. 그리하라.

    하지만 옆집, 앞집, 뒷집까지 모두 황궁의 병사와 그 식솔이 살 것이다.

    또한, 달걀 장수나 야채 장수. 혹은 동네 베이커리의 점원, 카페의 사장, 우연히 친해져 자주 함께 놀러 나가는 친구까지.

    그 모두가 특수 호위 훈련을 받은 자일 것이다.

    물론 라히크는 그 사실을 굳이 레그리아에게 알려주진 않을 셈이었다.

    ‘언제까지나 편안하게. 네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그것이 나의 행복이니.

    단지 경호만큼은 물러설 수 없을 뿐이다.

    “폐하. 레그리아 님께서…….”

    이윽고 들려온 소식에 라히크는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시간을 빼 둘 테니… 그래, 평범한 커플처럼 데이트를 하자고 전해라.”

    “예, 폐하.”

    이것이 그의 타협이며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레그리아보다 세 발 먼저 움직이는 것.

    앞으로 영원히 이러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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