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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8/134)
  • 128화

    12. 외전 (1) : 용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건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생각, 의지, 마음. 그러한 불확실하고 모호한 요소들을 알아가는 과정은 고통스러우리만치 답답한 일이다.

    특히 그녀와 라히크처럼 대척점에 서 있던 사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그들에겐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10년씩이나 걸릴 줄은 정말로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너무 달랐으니.

    “황후 위 문제로 말씨름을 한 게 어제 일 같은데. 그렇지 않아? 라히크.”

    “그래, 그렇군.”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지… 현실에 돌아온 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났다니, 믿기지가 않아. 시간 개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시간이 존재하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무 애타 하지 말라. 천천히 회복될 테니.”

    하던 것을 잠시 멈추며 라히크가 나직이 대답했다.

    어둔 밤이 가시고 여명이 밝아오는 시각.

    창문을 통해 은은히 스미는 햇살이 그의 벗은 등을 쓸어내리며 젖은 침구로 떨어진다.

    레그리아는 긴 상흔이 남은 그의 몸을 시선으로 훑다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현실에서 그와 그녀는 에클리-오페라 부르는 수정처럼 맑고 단단한 고체 속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건 마치 우화를 위한 고치처럼 우리 둘을 감싸 우리만의 세상에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레그리아는 라히크와 함께 녹아내렸다.

    나비가 되려면 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몸이 완전히 녹아 액화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던가.

    몸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되 우리의 정신은 그와 같이 뒤섞였다.

    하도 오랫동안 하나가 되어 버린 탓에 다시 분리하는 데도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지.

    “모양은 맘에 드나.”

    “응.”

    “다행이군.”

    라히크는 맥없이 늘어져 있는 레그리아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그런 그의 곁에 놓인 은쟁반에는 발톱을 손질하는 데 쓰이는 도구가 놓여 있었다.

    아마 다른 누군가가 보면 말도 안 된다며 제 눈을 씻어낼 만한 장면.

    라히크가 레그리아의 발톱을 깎고, 줄로 쓸고, 어여쁘게 정돈하여 칠을 해 주고 있었다.

    마치 정부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모습은 라히크답지 않은 행동이라고들 떠들겠지만 레그리아는 알았다.

    이게 오히려 라히크다운 행동이라는 것을.

    그는 그녀를 소유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낮은 위치에도 기꺼이 기어가 엎드릴 수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무서운 점은 그런다고 하여 그의 고귀함이 훼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라히크는 여전히 뻔뻔스럽고, 무도하며 자존감이 높았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태도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처럼 라히크의 내면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 그 누구도 꺾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다.

    누더기를 걸치고 길가에 무릎 꿇려 구걸을 할지언정 제왕의 상은 변치 않으니까.

    그녀의 발을 씻기고 발톱을 손질해 준들 그가 황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외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도 주변 사람의 인정을 이끌어내니 어떤 의미로는 지독하게 높이 선 자였다.

    “다음에 또 해 줘.”

    “그럴 것이다. 네 발톱이 자라거든 늘 내게 먼저 말하라.”

    툭 던진 말에 라히크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레그리아는 그런 라히크가 얄미웠지만 동시에 그가 만약 완전히 무너져 빌빌거린다면 오히려 실망스러울 거라 생각했다.

    역설적이지만, 레그리아는 그가 그 자신을 포기하고 노예처럼 굴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굴종하는 사내는 사랑할 수 없으므로.

    레그리아가 사랑을 느끼는 것은 저토록 고고한 사내였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자였다.

    이런 걸 보고 빌어먹을 취향이라 하는 걸까.

    “네 발목에 채울 것이 완성되었다.”

    레그리아는 제 앞에 놓인 상자로 시선을 내렸다.

    비단에 감싸인 패물.

    아주 가느다란 금줄을 세 겹으로 두른 뒤 사이사이에 붉은 루비를 달아놓은 발찌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맞았다.

    라히크는 가느다란 발찌를 들어 올려 움푹 팬 발목에 걸어 주었다.

    그 일련의 동작은 대단히 침착했으며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이걸 걸다 발목이 꺾일까 봐 두렵다는 듯이.

    “잘 어울리는군.”

    “당신 보기에 좋으면 됐지.”

    “늘 상상하던 그대로야.”

    라히크는 레그리아의 발목을 쥐고는 거기에 느슨히 입을 맞췄다. 잇새로 가볍게 물었다가 놓자 여린 피부에 순흔이 새겨진다.

    이것은 어떤 행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싫다면 이 지점에서 거부하기로 하였다.

    그러면 그는 유혹을 멈추고 그날 하루만큼은 레그리아를 건드리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그냥 라히크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이 길게 있지도 않다.

    “곧 출근하시라고 몰려올 텐데.”

    “기다리라 하면 된다.”

    “읏, 그건 그런데. 어제도 그랬잖아.”

    “그러니 오늘도 기다릴 수 있겠군.”

    황제를 모셔 가야 하는 보좌관에게 심심한 위로를.

    라히크 대신 10년간 통치하고 있던 에화는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라히크가 깨어나자마자 냅다 제위를 떠넘기고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1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라히크는 황제로서 공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라히크이기에 가능했다.

    수많은 대신들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바닥에 대고 라히크의 귀환을 축복하던 장면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에화가 대체 10년간 무슨 짓을 했기에 저러나 싶었던 것이다.

    “다른 생각.”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듯 바라보던 라히크가 위로 올라와 레그리아의 목덜미를 물었다. 따끔한 감각에 파득 떨자 그의 목에서 진한 만족감이 담긴 신음이 끓었다.

    라히크는 지금 그녀에게 닿기만 해도 발정했다.

    빈틈없이 꽉 맞물린 짝의 관계 속에서 피어오르는 건 열정 하나뿐.

    지난 삼 개월간 그는 여인을 처음 알게 된 풋내기처럼 달려들었고 그런 여파는 지금도 남아 있었다.

    다른 때는 여유만만한 자가 그녀와 맨 살갗이 닿기만 해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구는 건 조금 귀찮기는 하여도 싫지는 않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빠듯하게 차오르는 기분이기도 했다.

    ‘아, 난 누구에게 언제고 이렇게 원해지고 싶었구나.’

    그녀는 원해지기를 원한다. 라히크는 원하기를 원했다.

    그건 미묘한 차이가 있었으나 결국 깊숙이 파고들면 단 하나의 결론만이 나왔다.

    애정결핍.

    그도, 그녀도 부모에게서 받은 결핍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해소되지 못한 외로움은 뒤틀림을 만들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라히크와 끝없이 대화를 나눈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우리는 어딘가 조금 망가진 물건이니 온전한 누군가를 괴롭히지 말고 망가진 이들끼리 붙어 지내는 게 옳다고, 그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우습지만, 위로받았다.

    완벽하게만 느껴졌던 라히크에게도 저와 같은 상처가 있음이 레그리아에게는 진실로 위로였다.

    “폐하. 좋은 아침입니다.”

    “기다려라, 조슈아.”

    “10년을 기다렸는데 뭘 더 기다립니까? 냉큼 나오십시오.”

    그러나 라히크가 뭔가 제대로 해보기도 전, 문밖에서 조슈아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히크는 눈을 번득이며 짜증을 냈지만 어느새 그보다 10년을 더 늙어버린 조슈아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푹 주무셨습니까, 황후 마마.”

    “황후가 아니래도.”

    “누가 무어라 해도 제겐 황후 마마이십니다.”

    대충 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쿠션 위로 늘어져 있자 라히크가 침대 주변에 캐노피를 쳐서 레그리아의 모습을 가려버렸다.

    조슈아는 그런 게 익숙하다는 듯 라히크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한숨을 내뱉은 라히크는 이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충 옷을 입었다.

    “다녀오겠다.”

    “좀 가. 다들 기다리잖아.”

    “식사 잘 챙기고, 피곤하면 좀 자고. 어디 아픈 곳 있으면 시녀를 부르고.”

    “내가 애야? 알아서 잘해. 일이나 잘하고 와.”

    라히크는 나설 수가 없다는 듯 문가에서 두어 번 더 돌아보았다.

    그래봐야 조슈아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캐노피도 다 쳐 놓았으면서 뭐가 보인다고.

    픽 웃은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무거운 걸음이 복도를 벗어나고 나서야 캐노피를 걷어냈다.

    밤새 괴롭힘당한 탓에 다리가 후들거려 혼자 설 수가 없다.

    결국 시녀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해 레그리아는 몸에서 힘을 빼 버렸다.

    ‘황제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투정은.’

    그 말 그대로다.

    라히크는 태생부터 황제였다. 황제가 아닌 삶은 살 줄 모른다.

    라히크는 제위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건 라히크라는 사람의 근간이니까.

    그리고 레그리아는 그걸 완전하고도 온전히 이해하는데 1년의 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이해를 하고 난 뒤에는 이제 라히크의 차례였다.

    레그리아는 결코, 결단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해지고 싶었다.

    오직 그 하나만이 소원이었으며 바람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녀의 근간이므로 고치거나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라히크는 내가 그의 곁에 있는데 황후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

    라히크에게 황후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곧 그를 거부하는 것과 동음이의어였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 3년이 필요했다.

    우리는 정말 끔찍하게도 소통을 못 하는 인간들이어서.

    고집 한번 꺾는 게 어려워서.

    하나 라히크는 결국 이해를 해냈다.

    그게 에클리-오페 안에 갇힌 지… 약 4년 차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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