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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127/134)
  • 127화

    11. 에필로그(Epilogue)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무정한 시간은 흐르고 한 달이 열두 번 반복되어 1년이, 또 한 해가 거듭되어 세월이 된다.

    전 황태자 라히크와 그의 짝인 황태자비 레그리아.

    그 둘은 ‘덩어리’라는 멋없는 명칭에서 ‘에클리-오페’라는 멋진 이름을 달게 되었다.

    에화가 직접 붙인 그 이름은 고대어로 오해와 낭만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에클리-오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된 신황청의 대 기도실에 놓였다.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고 누구든 말을 건넬 수 있도록 한 것은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첫 1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2년.

    마찬가지.

    하지만 신황청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더는 신성인이 오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없다.

    불시에 강림하곤 했던 신성인들도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초원인들은 용의 죽음이 그 원인이라 수군거렸으나 정말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3년째.

    제국 벨리그레엄의 황제가 승하했다.

    여전히 에클리-오페는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에화가 제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간 라히크를 따르던 자들은 혼란에 빠졌으나 에화 본인이 나서서 모든 논란을 잠재웠다.

    “짐은 아이를 갖지 않을 것이며 짐의 후계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이는 짐이 제위를 계승하며 내리는 첫 번째 선포령이며 이후, 짐 스스로조차 깰 수 없는 영원불멸한 제약이 되리라. 다음 황제는 돌아온 형님이 되실 것이다.”

    라히크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굳건하게 믿는 모습에 몇몇은 혀를 찼고 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히크와 레그리아에게 벌어진 일은 기록된 역사 속에서는 최초였다.

    저 에클리-오페에 금이 갈 수 있을지, 아니면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저 믿을 뿐.

    “나는 레그리아가 내 내면에 들어오는 게 싫었어. 그래서 끝까지 정신 접촉을 받지 않은 거야. 그러면 꼭 내가 좋아하는 게 그 접촉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 것 같잖아.”

    어깨에 담비털 망토를 얹고 머리에는 황금관을 쓴 에화가 체통도 없이 쪼그려 앉아 중얼거렸다.

    그는 에클리-오페를 반질반질하게 닦다 지쳐 잠시 쉬는 중이었다.

    “근데 역시 그러길 잘했어. 내 안에 있는 누나의 영향력은 엄청 작았거든. 그게 빠져나가든 아니든 난 여전히 레그리아를 좋아해.”

    신하들은 묵묵히 새 황제의 자조 섞인 투덜거림을 들었다.

    오늘은 신년회가 있는 날.

    황제가 된 뒤로 에화는 국정 운영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지만 조금 무료하고, 그보다 더 쓸쓸해했다.

    “나는 형이 밉거든? 근데 빨리 돌아와서 이 모든 귀찮은 일들을 떠맡아 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뭔지도 모를 물질에 갇혀 있는 거… 형답지 않아.”

    짤막이 한숨을 내뱉은 에화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 금이 가진 않았나, 두 눈이 빠져라 보았지만 에클리-오페는 그저 멀쩡할 뿐이다.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렇게 4년째.

    이제 에화는 신황청에 갈 수 없었다.

    황제 라히크는 무섭지만 황제 시누엘은 만만했던 모양인지 귀족들이 결탁해 반역을 했다.

    그들은 벨리그레엄 순혈주의자로, 벨리그레엄과 초원 연합국 사이에 맺은 평화 협정이 말도 안 되며 결혼 장려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내전이 일어났고, 에화는 바빠졌다.

    대신 나라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숲에서 돌아온 표드르가 신황청을 지키기 시작했다.

    5년째.

    내전을 진압했다.

    벨리그레엄인과 초원인의 혼인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걸 주도한 것은 로에르멜 공작이었다.

    6년째.

    7년째.

    8년째.

    그리고 마침내 10년….

    이제 평민들 사이에서는 본디 황태자가 라히크였음을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어졌다. 신성인 레그리아에 대해서도 다들 잊었다.

    다들 황제 시누엘 치세에서 안정을 찾았고 혼혈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물론 그만큼 나쁜 일도 생겨났다.

    아직까지 보수층 사이에서는 혼혈아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버림받은 혼혈아가 증가한 것이다.

    그에 에화는 신성의 숲을 조금 밀고 신황청 옆에 공터를 만든 뒤, 거기에 커다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그곳을 직접 감독했다.

    다음 제위를 형에게 넘기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자식도 없으니 에화는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그는 부모 없는 아이를 돌보며 풀었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에화는 슬슬 사는 게 지겨웠다.

    나이가 들며 천방지축인 모습에서도 많이 변했다.

    제일 싫어하는 ‘책임지기’를 오랫동안 하며 에화는 본성을 많이 죽인 채였다.

    ‘아, 진짜 싫다.’

    업무, 접견, 외교 행사.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

    지긋지긋한 감시. 어딜 가든 따라오려는 사람들.

    에화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버렸다.

    레그리아를 좋아하는 마음이야 세월이 지나며 서서히 옅어졌고, 형을 미워하던 마음도 거의 사라졌다.

    이젠 제발 형이 깨어나 돌아와 그를 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황제 노릇도 처음에나 재미있었지….’

    대체 형은 어떻게 이런 짓을 평생 하다 죽을 생각이었지?

    에화는 오늘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대신들을 피해 도망쳤다.

    늪 능력으로 고아원에 온 것이다.

    이곳에 오면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딱 죽을 것 같다가 약간 살만하다고 해야 하나.

    에화는 한숨을 삼키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휘적휘적 움직였다.

    그때였다.

    “얘들아! 뛰면 안 돼! 넘어지면 다쳐…!”

    한 무리의 7세 아이들이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중 하나가 그의 허벅지에 정통으로 몸통 박치기를 해 버렸는데, 안타깝게도 신성 기사에게 부딪혔으니 아픈 건 아이 쪽이었다.

    “흐, 흐아아앙!”

    처음 몇 초간은 눈앞에 별이 빙글빙글 도는지 눈을 끔뻑대던 아이가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어쩌면 좋아, 선생님이 뛰지 말라고 했지!”

    “흐, 흐어엉! 선생니이이임!”

    “어휴. 죄송해요. 아이들이 오늘 밥을 잘 먹어서 그런가 망아지처럼 뛰네요. 어디 다치진 않으셨어요?”

    에화는 사실 감흥이 없었다.

    웬 조그만 강아지 같은 게 나타나서 들이박기에 그런가 보다 했지.

    그 뒤를 쫓아오는 부제 급으로 보이는 여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고, 그 다정한 시선에 이끌리듯 눈을 맞추고… 세상의 모든 빛을 다 끌어모아 만들어둔 듯한 푸른 눈동자에 훅 빠져들기 전까지는.

    에화는 순간,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영혼이 떨고 있음을.

    이 여자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감정이 아니다. 그런 차원을 넘어선 무엇인가다.

    달콤한 향기가 그를 향해 너울거리며 손짓하는 듯했다. 이성을 잃을 뻔한 것을 억지로 붙들며 에화는 숨을 참았다.

    이런 향기는 맡아본 적 없다. 이런, 이렇게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그의 근원을 들쑤시는 듯한 향은.

    “괜찮으세요? 상태가 나빠 보이세요.”

    여자가 그를 향해 상냥하게 묻자마자 에화는 그대로 늪을 열고 사라졌다.

    참을 수 없다.

    당장 여자를 휘어잡고 이름을 묻고 저 달큰한 살결에 이를 박아 넣고 싶은 충동에 휩쓸려 상처를 주게 될 것만 같았다.

    약 한 달 뒤.

    세상의 마지막 용이었던 초원의 반룡이 죽은 지 딱 10년이 되던 날.

    이러한 현상은 나라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짝이 될 상대에게 어느 정도 끌린다는 느낌은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영혼을 송두리째 쥐어 잡고 뒤흔드는 감각은 없었다.

    그것도 신성인이 아닌 상대에게 말이다.

    이 새로운 충격은 새로운 구분법을 가져왔다.

    신성기사, 신성인, 평범한 사람.

    본래 그렇게 나뉘어져 있었던 사회였는데, 신성인이 아님에도 신성인보다 더욱 강렬하게 신성기사를 끌어당길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마치 더는 신성인이 강림하지 않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 전체가 움직여 해결 방법을 찾아낸 것처럼.

    그리하여 에화는 새로운 기준을 선포했다.

    “앞으로 신성기사, 혹은 그에 준하는 특별한 축복을 가진 자를 알파라 칭한다. 그리고 신성인, 혹은 그에 준하는 이끌림을 신성 기사에게 줄 수 있는 자를 뮤라 칭하겠다. 그 사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는 베타라 한다.”

    알파, 베타, 뮤.

    그렇게 나뉘게 된 사회에 아직 짝이 없는 알파들은 자신만의 뮤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 라히크와 레그리아가 갇혀 있는 에클리-오페가 새롭게 재조명받았다.

    그 두 사람이 서로 완벽하게 이어진 최초의 알파와 뮤라는 논리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황량해졌던 신황청에 다시금 사람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짝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서.

    그렇게 수일이 흘렀다.

    “어?”

    에클리-오페에 금이 간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어느 부 사제였다.

    에화의 청혼을 거절하고, 매일 찾아오는 그를 조금은 귀찮아하는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글을 가르치고 에클리-오페를 닦는 것.

    그게 그녀의 일이다.

    불쑥 나타나 일을 못하게 방해하는 에화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멋대로 나타나는 자라면 분명 건실한 청년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던 탓이다.

    각설하고, 어쨌거나 졸졸 따라다니는 에화를 내버려 둔 채 언제나와 같이 에클리-오페를 반질반질하게 닦고 있었는데… 웬걸.

    처음엔 자신이 힘이 너무 좋아 깨부순 줄 알았지만, 아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으나 역시 아니었다.

    금은 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세상에…!”

    툭.

    들고 있던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트린 그녀는 허겁지겁 뛰어가 반쯤 녹슬어 있는 쇠줄을 잡아당겼다.

    이건 꼭대기의 종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만에 하나 에클리-오페에 변화가 있으면 무조건 이걸 당기도록 되어 있었다.

    뎅, 뎅. 데엥-!

    설치한 지 10년.

    그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던 종이 장엄한 첫울음을 뱉어냈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에화가 입을 떡 벌린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이어 다급히 등장한 표드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툭.

    투둑.

    투두둑…!

    만년석처럼 단단하고 차갑던 에클리-오페에 실금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에클리-오페가 위에서부터 천천히 부서져 내렸다.

    기적과도 같은 봄날이었다.

    - 달아날 수 없게 만들어 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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