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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126/134)

126화

‘당신이 나를 살렸으니까. 그러면 나 역시 당신을 살려야 맞잖아.’

레그리아는 흰 팔을 뻗어 라히크를 끌어안았다.

마주 안은 그들의 주변으로 빛이 일어난다.

라히크의 내면세계가 거세게 요동쳤다. 그녀를 내쫓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떠나지 못하게 잡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눈을 눌러 감은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의식체와 이마를 맞대었다.

‘완전히 타락한 마귀를 사람으로 되돌리는 건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짝을 맺어야 한다.

짝이 생기면 신성 기사는 짝을 중심으로 모든 세상을 재편한다고 들었다. 숨을 쉬는 것도 짝을 위해서이며 살아가는 것도 짝을 위해서.

그가 그녀를 중심으로 공전하게 만들어야 광기를 씻어낼 수 있었다.

‘나를 받아들여, 라히크. 나 역시 당신을 받아들일 테니.’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마자 마치 유성우처럼 머리 위에서 빛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쾅!

한 세계의 종말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건 곧 다음 세계가 도래함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짝을 맺은 이후로 세상은 아주 달라진다던가.

‘당신이 내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

레그리아의 입가에 고요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의식은 하나로 포개어졌다.

투둑.

레그리아와 미약하게나마 이어져 있던 다른 신성 기사들의 관계가 끊겼다.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짝을 맺었던 표드르 역시 예외는 없었다.

지금껏 레그리아가 내면에 접촉하여 남겼던 흔적들이 사락사락 사라진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단 하나.

오로지 라히크에게만 그녀의 흔적이 남았다.

‘아, 눈부셔.’

어두웠던 내면 가득히 광휘가 드리워졌다. 광기 따위는 근처도 올 수 없도록, 라히크의 내면에도 낙원이 지어졌다.

그 속에 우뚝 선 긍휼의 궁전에서 레그리아는 잠든 라히크를 안고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풀어나갔다.

그의 광기가 온전히 씻길 때까지 반복될 일이었다.

* * *

“이봐, 저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용이다! 용이 하늘로 돌아간 것이다!”

한편, 그 시각.

바깥세상은 난리가 나 있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건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보여 숱한 초원인들을 기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함부로 동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한 채 서서 웅성거렸다.

기둥이 없어지고 하늘을 밝히던 빛이 꺼진 뒤에도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명확히 파악하기를 꺼려 했다.

“내가 들어가 보겠다.”

용감하게 나선 것은 당연히 눌한이다.

그는 극도로 경계하며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채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

잠시 뒤, 눌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게 대체….”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끝도 없이 울고 있었다.

어찌나 눈물을 흘렸는지 눈가가 붉게 짓무른 것도 모자라 온 바닥이 차게 적셔져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몇 번이고 눈앞의 반투명한 덩어리를 긁어내렸는지 손끝이 다 까졌다. 참 처참한 꼴이었다.

“누나, 안 돼… 누나, 누나…!”

에화가 목 놓아 울며 이번엔 덩어리를 끌어안았다.

가까이 다가간 눌한은 에화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옆쪽에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툭.

바위처럼 단단하다.

깨부술 수야 있겠지만 그랬을 때 안에 있는 사람이 어찌 될지 모르니 함부로 해선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저리 비켜!”

“알겠으니 가시 세우지 마라.”

“누나아, 이런 게 어디 있어. 이럴 거라고 한 적은 없잖아…!”

에화는 예상대로 덩어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눌한은 제 시야에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차마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음성만 흘렸다.

마귀가 되었던 한 남자와 그를 구하겠노라며 동굴 속으로 들어간 한 여자.

그 둘이 서로를 껴안은 채 고스란히 굳어 버렸다.

투명한 밀랍이라 해야 할까. 나무의 수액 속에 갇힌 것 같다고 표현하는 쪽이 나을까.

숨을 쉬고는 있는지, 아니면 죽은 건지조차 알 수 없다. 저걸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나. 언젠가 저 단단한 외피가 깨지고 알에서 나올 수 있긴 한 것인가.

눌한은 혼란스러웠으나 그는 이 사태에 대해 별달리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저런 것을 본 적 있다.”

그때였다.

비척거리며 나타난 한 노파가 후들거리는 걸음을 떼어놓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시여, 쉬셔야 합니다.”

“어머니시여!”

따라붙는 사람들을 내치며 노파는 억지로 억지로 움직였다.

알-누히람의 어머니 중 어머니.

초원의 세 부족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노파는 사실 반룡에 의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반룡의 뜻을 전하는 입으로서 역할을 해 왔으니까.

허나 반룡이 죽은 지금, 노파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완전히 광기에 물든 전사를 구원하기 위해 알-마하카가 내면에서 짝을 맺은 거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에화가 노파를 향해 홱 고개를 돌리며 사납게 물었다.

노파는 잠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는 느릿느릿 속삭였다.

“글쎄… 확실한 건 저들은 저들만의 세계에 갇혔다는 거다. 스스로 깨고 나오기 전까지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수 없겠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정신이 완전히 융합된 상태이니 함부로 건드리면 더 위험하다!”

에화가 화를 냈으나 노파는 되레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로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타들어 가는 생명이 끝에 달해 내뿜는 존재감에 에화조차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버려 두라. 10년이 지나든, 20년이 지나든. 하물며 100년이 지나더라도. 언젠가 저 안에서 깨어나 나올 것이다.”

“100년, 이라고?”

에화가 망연히 되물었다.

“할리…카.”

그와 동시에, 뒤늦게 나타난 비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중환자임에도 뼈마디가 부러진 몸을 의지만으로 이끌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할리카. 할리카. 나의 할리카.”

비칸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기었다. 기어서라도 다가가려는 모습에 눌한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데려가 줄 테니 가만히 있어.”

“…….”

“죽은 건 아닐 거다. 아마도.”

눌한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제 친우를 달랬다. 비칸은 영혼이 빠져나간 눈빛으로 덩어리를 더듬었다.

정확히는 남자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오직 레그리아만을 바라본 것이지만.

“할리카.”

비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할리카.”

몇 번이고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레그리아는 그저 그 상태 그대로 굳어 있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 아아, 아아아…!”

비칸은 목구멍이 녹아내리는 듯한 슬픔에 소리를 질렀다. 그 절규는 동굴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고 바깥까지 뒤흔들었으나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침통한 얼굴로 지켜볼 뿐.

그런데 그때, 고개 숙인 에화에게서 미약한 반짝임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그들 자신은 보지 못했으나 다른 이들은 모두 보았다.

“!”

뒤이어 비칸에게서도 반짝임이 새어 나왔다.

그들의 의식이 끊겨 마치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

* * *

“표드르 님!”

그건 수도에 있던 표드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쨍그랑!

아침부터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이 스르르 빠져나가 산산조각 났다.

유리 조각이 튀어 피부를 긁었음에도 그조차 모른 채 표드르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아, 선택했구나.”

하인들이 바닥을 닦는다, 맨발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낸다며 야단법석을 떠는 동안 표드르는 제게 찾아오는 충격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짝의 맺음이 강제로 끊겼다.

그러나 이럴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기에 후회되지는 않았다.

잠깐이나마 혼자 행복할 수 있었으니까.

“표, 표드르 님!”

쿵!

옆으로 스르르 기울어지던 표드르가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자 세비레이크가는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을 잃었던 이들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레그리아가 라히크와 짝을 맺었음을.

그리하여 그들 안에 남겨두었던 자신의 흔적을 모조리 지웠음을.

“흑, 흐윽… 더, 더 진심으로 다가갈걸 그랬어. 흐어엉…!”

각기 자신의 공허함을 스스로 끌어안고 삭혔다.

에화는 황태자가 되셔야 한다는 말을 무시한 채 눈물로 지새웠으며 표드르는 이후로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먼 곳에 있는 숲으로 떠났다.

그리고 비칸은….

그는 매일 아침 같은 행동을 했다.

가장 깨끗한 상류의 물을 떠서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에 제단에 놓고 기도를 올린다. 햇볕이 물잔에 비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신성한 태양에게 기도하는 것이니까.

“할리카가 평안할 수 있기를.”

언젠가 돌아 와주기를 바라지만 만약 돌아올 수 없다면 지금 네가 있는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그녀와의 연결은 끊겼으나 그럼에도 비칸은 여전히 할리카를 기렸다.

모두가 그녀의 존재를 잊을 때까지도 계속해서.

그 자신마저 그녀가 허상이었는지, 꿈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환상이었는지조차 헷갈릴 때까지도.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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