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34)
  • 125화

    ‘이걸 다 풀어내면….’

    라히크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거구나.

    불현듯 깨달은 레그리아는 아까보다 훨씬 집요하게 뒤엉킨 털실을 풀어냈다.

    라히크는 결코 모든 걸 다 말하는 법이 없는 남자다.

    그래서 오해하게 만들고, 멀어지게 만든다.

    대화를 할 줄 모르는 건 그의 유년 시절부터 켜켜이 쌓여 온 상처 때문인 걸까. 그도 아니면 본래 성정이 그러한가.

    그토록 그악스레 완벽을 추구하며 살아야 했던 이유는… 단지 사랑받고 싶어서. 그래서였나.

    ‘그건, 나도 그랬는데.’

    그리고 우리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완벽하지 못하다.

    레그리아는 또다시 드러난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그렇게 상처 입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내게 의존하기를 바라는 욕심이 너무 컸다.

    이번에는 어른 라히크구나.

    후회로 점철된 음성이 아스라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레그리아는 벽면에 기대어 선 채 툭 내뱉었다.

    “내가 걷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물에 빠트린 거, 사과해.”

    - ……미안하다.

    얌전하게 말을 잘 듣네?

    웬일인가 싶어 레그리아는 슬그머니 말을 이었다.

    “나를 의존적이게 만들려고 한 거, 당신이란 사람에게 종속시키려 한 거.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물건 보듯 무시한 거. 왜 그랬어?”

    - 나는 네가 급했다. 허겁지겁 잡아끌어 품 안에 가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너 역시 내 것이 되지 않을 거라고. 무지가 앎으로 바뀌면 나를 택할 리 없다고. 내심 그렇게 여겼다.

    벌어진 틈새에서 속마음이 쏟아져 나온다.

    라히크가 지금껏 어디에도 털어놓지 않은 못난 속내.

    그의 겉모습이 붓 터치 하나까지 완벽한 유화라면 이 안에서 들려오는 속삭임들은 하나같이 찢어진 캔버스 속 실패작 같았다.

    - 에화가 태어난 뒤로 빼앗기기만 하던 삶이다. 마땅히 내 것이어야 했던 관심도, 부모의 애정조차도 얻지 못했지. 내가 무엇을 하건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응.”

    - 하지만 너는 달랐다. 순수하고, 무람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한 내 것을 가지는구나. 모처럼 나를 위한 사람이 생겼구나. 그리 여겼다. 그랬기에 네가 홀로 서려는 것이, 내게 기대려 하지 않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서 밀어붙였어?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내가 당신에게 기댈 줄 알고.”

    - ……그래. 나는 너를 길들이고, 너는 내게 종속되고. 그러면서도 나는 네게 길들여지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라히크의 목소리에서 뼈저린 후회와 함께 고통이 느껴졌다.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아 하던 감정들이 그녀를 향해 흘러든다.

    미련하고 멍청하고 어리석은 남자다.

    다른 건 잘만 하면서 감정은 어린아이 상태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사람.

    ‘당신의 미성숙이 나를 해쳤고, 우리는 결국 평행선에 섰다.’

    그녀가 궁금해하던 모든 ‘왜’에 대한 대답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는 오롯이 제 편이 되어 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 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가 나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너를 종속하는 거였다. 온전히 가지는 것이었다.

    “그게 잘못된 방향인 줄도 모르고.”

    - ……미안, 하다. 나는 너와 아이를 갖고 싶었다…….

    처음부터 비틀려 있던 남자다.

    그가 내비치는 회한이 자꾸만 그녀 안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동정심? 미움? 차라리 그런 흔한 감정 따위면 좋았을 것이다.

    허나 이건 애증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좋았던 모습과 싫었던 모습. 타인의 끼어듦으로 인해 켜켜이 쌓였던 오해들.

    감정 조각이 가슴 속을 떠돈다.

    레그리아는 서서히, 서서히 다른 실타래도 풀어냈다.

    이미 뚫린 작은 구멍 하나를 점점 더 넓혀 그의 속내를 듣고 또 들었다.

    목소리는 어떨 때는 성인이었고, 어떨 때는 아이였으며 그녀와 알게 된 이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혀 모를 때의 내용도 있었다.

    어느덧 레그리아는 라히크라는 사람이 남긴 삶의 족적을 하나둘씩 알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잘 모르겠다. 이제는 손가락 마디가 저려온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를 광기에서 꺼내고 싶었으니까.

    기왕 한번 시작한 것이기도 하고,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는 라히크의 진심을 다 엿볼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의 모습이 내보일 정도로 털실을 많이 풀었을 때.

    레그리아는 그 뒤에서 소년을 발견했다.

    “……레그리아.”

    “라히크?”

    금색 눈동자에… 금빛 머리칼. 지금처럼 그을리기 전, 흰 피부.

    소년은 두 눈 가득 울음을 담고서 입술만큼은 고집스레 앙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 용의 열매를 구했어. 네게 주었던 작은 집. 거기에 심어 놨어.

    “…당신은, 내가 죽기를 바란 적. 없었어?”

    - 없었어. 단언컨대 단 한 번도. 나는 너를 살리려 했어. 괜한 공포심을 줄 테니까… 신성인이 일찍 죽는다는 건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전쟁을 하며 열매를 구하는 동안 네가… 네가 황태자비로 나라를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황태자비가 되기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 미안….

    냉랭하게 대꾸하자 소년 라히크는 금세 풀이 죽었다.

    풀이 죽는다니. 정말 라히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아닌가.

    -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어.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좋은데…….

    소년 라히크의 두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에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라히크는 나를 보더니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 닦고는 손을 뻗어왔다.

    - 나를 버리지 말아 줘. 나를 떠나지 말아 줘. 나를… 너만은 나를 사랑해 줘.

    “…….”

    -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줘.

    마지막 속삭임은 애걸하는 것에 가까웠다.

    사랑이 처음이라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서툴기 짝이 없었던 두 사람이 만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 역시 그녀 자신이 우선이었고, 라히크 역시 그 자신이 우선이었지.

    누군가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제 것을 다 내놓아야 함을 몰랐던 탓이다.

    “나를 거머쥐는 데 급급해서, 내 마음을 돌아볼 새가 없었다면… 이번엔 나를 얻었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눈물이 아롱진 금색 속눈썹이 몇 번 움직이더니 강렬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숨 막힐 듯한 소유욕, 독점욕. 짝이 되고자 하는 열망.

    그가 내뱉는 욕심이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그녀를 달군다.

    어느새 성인으로 자라난 라히크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이걸로는 모자란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묻고 잠시간 가만히 있던 라히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레그리아를 밀쳐냈다.

    - 가라.

    “그게 무슨 소리야?”

    - 나는 이미 마귀가 되었다. 이곳에서 너까지 휘말릴 이유가 없다.

    라히크의 음성은 평이했다.

    그녀에게 기꺼이 등을 보인 그 순간과 같이.

    - 나를 떠나 네가 원하는 삶을 살라. 남은 평생 내내 내가 있는 곳에는 근처도 오지 말라. 내가 너를 잡을 수 없도록.

    순수하게 욕구를 드러내던 어린 라히크와는 성인의 라히크는 달랐다.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던 라히크는 문득 날카로이 입매를 비틀었다.

    - 대신 나는 네가 이 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살아갈 테니.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반룡을 죽였지.”

    - 그래.

    “반룡을 죽인 건…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없애려고 그런 건가? 그걸 위해서 마귀가 되는 걸 감수했단 거야?”

    라히크는 대꾸하지 않았다.

    허나 그의 전신에서 만족감이 진하게 배어난다.

    기어코 그는 그녀가 도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단한 집념이었다.

    ‘나를 암살자들에게서 구해주 었던 라히크.’

    ‘내게 매번 찾아왔던 라히크.’

    ‘그 먼 길을 지치지도 않고 왕복하며 나를 보러 왔던 라히크.’

    그가 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의 무엇을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나.

    온전한 모양만이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다면적이라 어딘가는 일그러졌을 수도, 어딘가는 뭉그러졌을 수도 있구나.

    깨달음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당신은 나를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한 적 없었어. 매번 당신의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했지.”

    - …인정한다.

    “하지만 나 역시 당신에게 기회를 준 적은 없었어. 도망치려는 일에만 급급하여서.”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까.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만든다면. 대화를 한다면.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한다면.

    “당신 속이 배배 꼬인 건 다 이 털실들 때문일 거야. 본심과 다른 말을 내뱉는 것도 마찬가지고.”

    - 그러한가?

    “시간이 얼마나 들든 상관없어. 내가 이걸 전부 다 풀면… 그때 바깥에서 만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완전한 마귀가 되었다는 것을.

    지금도 시시각각 침범해 오는 어둠이 그걸 증명한다.

    제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에 라히크를 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해.’

    마귀로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기를.

    이런 게 사랑이라면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사랑과 용서는 다른 개념이니 그가 그녀에게 주었던 상처를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그리아는 그가 고통받기를 원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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