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34)
  • 124화

    동굴 깊숙한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동굴은 지형적 특성상 소리나 진동이 크게 울리게 되어 있다.

    특히 징이 박힌 신발을 신고 벽면에 계속 몸을 부딪치며 거세게 걷는다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 진동이 동굴 전체를 타고 닿아오기 마련이었다.

    쿵.

    쿵.

    쿵…….

    ‘아, 멀어진다.’

    긴장한 채로 집중하던 레그리아는 소리가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잠시 멈춰 섰던 라히크가 무슨 연유에선지 더욱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길이 일직선이었지만 만약 안에 거대한 공실이 있고 길이 갈려 버린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나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살리러 가는 거야.’

    그러니 라히크를 잃어버리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대로 걷지 못하고 계속 벽에 쿵쿵거리며 몸을 박는 것 같으니까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좀 더 빠르게 다가가면…….

    “라히크.”

    소리가 완전히 멈췄다.

    레그리아는 비로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히크. 내가 왔어. 오겠다고 했잖아.”

    여기까지 걷는 동안 어둠이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그 덕에 레그리아는 근육질의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

    ‘옷이 갈가리 찢겼네.’

    어떤 전투를 치른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넝마가 된 꼴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저 지경이 되도록 싸울 수 있을까. 어떤 강렬한 동기가 그를 반룡에게 맞서게 했을까.

    레그리아는 숨죽인 채 대답 없는 남자에게 한 발을 내디뎠다.

    “그르르륵.”

    그러자 곧바로 경고하는 듯한 위협적인 울음이 되돌아온다.

    라히크에게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망가진 모습이다.

    그는 그런 자신을 보여주기 싫은지 그녀를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본능적으로 타인을 경계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우습네. 상황이 완전히 반대가 되었잖아. 그렇지? 당신은 쫓는 사람이고 나는 쫓기는 사람이었는데.”

    피 냄새가 난다. 라히크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인 듯했다.

    ‘하지만 아까까지는 피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생겼어.’

    그 말은…….

    뭔가를 퍼뜩 깨달은 레그리아는 빠르고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해하지 마, 라히크. 그만해.”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등을 돌린 채 라히크가 제 허벅지를 긁어내리고 있었다. 혈관이 끊어져 피가 더는 멈추지 못할 정도로 거세게.

    마귀화한 자신의 본성과 이성이 충돌하는 게 틀림없다.

    기민하게 알아차린 레그리아는 최대한 조심스레 움직였다.

    다가가야 한다.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 간 다음, 정신 접촉을 할 생각이었다.

    “기억나? 모르말라 차를 마시게 하고, 그 가루를 잔뜩 푼 물에서 목욕하게 한 거. 그게 어떤 효능이 있는지 미리 알려 주었으면 좋았을 거야.”

    우선 한 걸음.

    놀랍게도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 라히크는 자해를 멈추었다.

    “하지만 그 점은… 용서하기로 했어. 당신도 나도 서로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때까지는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비틀리진 않았잖아.”

    그렇게 두 걸음.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그녀를 향해 라히크가 몸을 반쯤 돌려 왔다.

    그래도 이 정도 가까워진 덕에 횃불의 빛이 라히크의 얼굴을 비출 수 있었다.

    레그리아는 그의 두 눈이 흰자위도 검은자위도 없이 새카맣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그 다음에는 또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암살자를 만난 다음부터는 당신에게 조금 더 의지를 했었는데… 당신은 그런 나를 속박하였지.”

    세 발짝 째.

    라히크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지는 게 보인다.

    그러나 탓을 하고 있는데도 라히크는 공격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뿐.

    “당신은 내가 의존하기를 바랐어. 독립적으로 서지 않고 내 몫을 내가 해내지 못하기를 원했어.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어, 라히크.”

    “…….”

    “그렇지만 아주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냐. 나는 당신이 안아 주는 게 좋았어…….”

    말꼬리를 늘이며 네 발짝을 은근히 내밀자 라히크가 목울대를 울리며 스산한 소리를 뱉었다.

    멈칫하던 레그리아는 무시하고 그냥 나아갔다.

    “내게 주었던 그 값비싼 피아노. 감동이었어. 내가 지금까지 받은 그 어떤 선물보다 기억에 남아.”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울음이 새어났다.

    뭐랄까.

    만족스럽게 그르렁거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제게 마귀의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레그리아는 횃불을 내려놓았다.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그냥 그대로 당신을 믿고 있다가 황태자비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어. 지난 3년간, 에화와 있으면서 종종 생각이 나더라.”

    눈앞을 비추던 횃불이 시선 아래로 내려가자 일시적으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래서 레그리아는 제 표정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다.

    라히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보이지 않았고.

    “말한 적 없지. 비트리체의 영혼 조각이 내 안에 있었다고. 비트리체가 그랬어. 당신을 너무 믿지 말라고. 이 세계엔 추악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새카만 암흑 속에서 금빛 눈동자가 짐승의 그것처럼 번득였다.

    검게 물든 눈에 동공이 다시 생겨난 것이다.

    ‘이지가 반쯤이라도 돌아온 건가?’

    무엇이 되었든 긍정적인 신호다.

    레그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뻗었다.

    “만약 비트리체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에화가… 당신이 에화를 가뒀던 그곳. 그 지하를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당신이 초원인을 죽이는 걸 보지 못했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몰라, 라히크.”

    착각일 지도 모르겠지만 금빛 동공에 이해가 깃드는 게 보였다.

    그제야 그녀가 그토록 거부하고 도망친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차린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앎을 거부하는 건 아니야. 나는 모든 걸 알고 스스로 선택하고 싶으니까. 나라는 사람이 그런 걸 어떡해. 하지만 당신은 무엇도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결과적으로 내가 황태자비가 되고, 결과적으로 내가 죽지 않으면 된다고… 그렇게 여겼을 거야.”

    깜빡.

    라히크가 눈꺼풀을 느리게 눌러 감았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저건 긍정의 뜻인가?

    어쩌면 지금, 라히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그리아는 끝으로 한 마디를 흘려내며 또 한 걸음, 이번에는 마지막이 될 걸음을 옮겼다.

    “결과가 좋게 끝나도록 당신이 어떻게든 할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불안해할 만한 것들은 모르도록 하고 싶었을 거고, 그게 당신의 책임감이었다고 생각해. 맞아?”

    “크그르르륵!”

    “맞다면… 나를 당신 안에 들여보내 줘. 우리, 제대로 대화 좀 하게.”

    다행스럽게도 라히크는 순순히 붙잡혔다.

    멀미가 날 정도로 눈앞이 급격하게 빙글 돌더니 사위가 고요해졌다.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어둠 속에 둘러싸인 레그리아는 망설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에 손을 댄 채로 천천히.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환한 빛이 일어나 라히크의 광기를 정화시켰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

    이걸 다 정화하고, 드러난 그의 실타래를 모두 풀고.

    그래서 꼬이고 꼬인 우리 관계를 직선으로 펼치고 난 뒤가 되겠지.

    평행선을 걷던 우리가 하나의 선 위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게 된 다음에야 레그리아는 그의 내면에서 나올 생각이었다.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상관없다.

    라히크가 제정신을 찾게 한 다음 들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시작점은… 여기로구나.’

    손에 잡히는 금빛 털실을 살살 어르고 달래며 풀어낸 레그리아는 문득 실의 끝이 뚝 잘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 설마.’

    쉬운 것 하나 없는 남자인 건 알지만 정말 이러긴가.

    레그리아는 밑에도 옆에도 위에도 끝도 없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털실 무더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레그리아는 풀어낸 털실은 다시 얽혀 들어가지 않도록 동글동글하게 만들어 주변에 툭 던졌다.

    라히크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모양의 털실 공이 하나둘씩 쌓일 때마다 그의 내면 한 군데가 점점 크게 벌어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 올 만큼 노력한 레그리아는 비로소 꽉 막혀 있던 사방에 구멍을 하나 뚫었다.

    -……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때였다.

    ‘뭐지?’

    어린아이 목소리인데.

    - 그 녀석만 사랑해. 나는 아니고. 하지만 내가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왜 나를 사랑하지 않지?

    억울함, 원망, 슬픔.

    그보다 더 큰 사랑받고 싶은 욕구.

    소년의 목소리가 구멍에서 새어 왔다.

    하지만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 귀를 가까이 가져간 그 순간.

    주변의 털실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그 구멍을 막아 버렸다.

    마치 듣지 말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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