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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3/134)
  • 123화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듯 비칸의 손이 움찔했다.

    그걸 지켜보던 레그리아는 굳은살이 박인 두꺼운 손에 이마를 대고 긴 숨을 내쉬었다.

    비칸이 깨어나기를, 무사히 살아가기를, 초원을 누비며 강건하기를 바란다.

    가능하다면 그녀 역시 초원에서 살아가도 좋을 것 같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과연 비칸의 옆에 내가 있어야 할지는… 다른 사람이 있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비칸은 그녀가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니 피리를 준 거겠지.

    그 마음이 귀하고 고마웠기에 돌아올 수 있다면 이곳에 있어 보겠노라고 한 것이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비칸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결정을 입 밖에 낸 순간.

    말이 되어 툭 떨어진 바로 그 찰나.

    레그리아는 완전히 깨달았다.

    마음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기만 할 뿐.

    ‘나는 정말은, 돌아오고 싶은 게. 아니구나.’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가자, 누나. 그렇게 원한다면 데려다줄게.”

    “고마워.”

    레그리아는 에화와 함께 늪 속으로 서서히 빨려들었다.

    새카만 늪은 관계의 종말을 시사하듯 어둡고도 편안했다.

    그리고 다시 레그리아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죽은 반룡의 본체를 보았다.

    라히크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존재치 않았다.

    * * *

    “틀렸어, 누나. 보이질 않아.”

    “반룡 사체의 배 밑에도?”

    “응. 안 보여.”

    “하긴, 라히크가 깔려 죽었을 것 같진 않아. 절대 누군가의 아래에서 숨을 거둘 남자는 아니니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새까맣고 진득거리는 피가 온 바닥을 적시고 있다. 그 피는 산성을 머금고 있어 옷깃만 스쳐도 섬유가 녹아내릴 만큼 지독했다.

    이 주변의 풀은 뿌리까지 소멸했고 나무는 피가 튄 부분이 녹아 흉해졌으며 바위마저 움푹 팼다.

    알-누히람들이 종말을 부르짖던가.

    반룡이 죽어 나자빠진 이 주변의 아비규환이 실로 지옥과도 같았다.

    다만 레그리아는 당황하거나 울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러했듯 침착했으며 다소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레그리아는 최대한 조심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반룡의 사체 위와 아래, 네 개의 발과 긴 가죽 날개 옆까지도.

    만약 반룡과 싸우다가 라히크가 죽은 거라면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에화도 그녀도 라히크의 흔적을 조금도 찾지 못했다.

    물론 비가 내리고 있고 피 냄새가 진동했으며 주변은 깜깜했으니 제대로 수색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오만함을 믿었다.

    황제에 가장 잘 어울리던 사람이다. 이런 곳에서 끝장날 만한 운명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만약 라히크가 정말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는 죽음 앞에서조차 오연할 테니 볼썽사납게 달아나진 않았으리라.

    모두가 볼 수 있는 곳.

    가장 높은 자리에 꼿꼿이 선 채 명을 달리한다면 몰라도.

    하여서 레그리아는 확신했다.

    라히크는 반룡을 죽인 뒤, 어떤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자리를 피한 것이다.

    ‘내가 라히크라면… 어디로 갈까. 어떻게 할까.’

    그와 그녀는 인정하기 싫어도 닮은꼴이다.

    그러니 라히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레그리아 역시 어렴풋이 알았다.

    ‘만약… 만약 라히크의 광기가 터져서 마귀가 되어 버렸으면. 그리고 내가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없다면….’

    반대의 경우로 생각하니 어느 정도 답이 나왔다.

    피하겠지.

    레그리아는 입술을 잘근 물다가 이내 주변을 휙 살폈다.

    산성 피가 닿지 않아 안전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감금할 수 있을 만한 장소.

    세상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마귀가 된 꼴을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 찾아 들어간 무덤.

    그건 바로, 동굴이다.

    “이 근처에 있는 다른 동굴로 가야 해. 아마 라히크는 그 안에 있을 거야.”

    “어? 누나, 이제 그만 찾고 가자.”

    “아니. 동굴로 데려가 줘. 이 반룡의 본체 주변에 있던 바위산. 거기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해.”

    믿는다. 마귀가 되어도 그가 지닌 자존심과 황태자로서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아마 고고한 황태자로 남고 싶었을 테니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라는 소리야.’

    아주 미쳐 버렸다면 그런 판단이나 대응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희망이 보인다.

    레그리아가 여기저기 고여 있는 산성 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자 에화가 하는 수 없이 따라와 허리를 감아 안았다.

    “알겠어. 위험한 데를 다니지 마. 제발… 내 앞에서 이러지 마.”

    “한 번만 더 데려다줘. 부탁할게, 에화.”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죽은 반룡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이도 있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치는 이들도 있었다.

    신으로 모시던 생명체가 나자빠져 있으니 아마 저들의 분노는 곧 광기로 바뀌겠지.

    그러기 전에 이 자리에서 떠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이 반룡을 죽인 것이 제국의 황태자인가?”

    그때였다.

    옆에 누가 오는 줄도 몰랐는데 목소리가 불쑥 들려와 레그리아는 펄쩍 뛰었다.

    말을 건 것은 최고 전사 눌한이다.

    “뭐야, 너?”

    에화가 곧바로 이를 드러내며 레그리아를 제 뒤로 밀었다.

    눌한은 싸우려 하는 게 아니라는 의지를 표현하며 맨손을 보여주었다.

    “상황을 알아보러 온 것뿐이다. 대충 듣자 하니 찾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로 갔을지 예상이 되는 곳이 있다.”

    “…….”

    “동굴에 가고 싶다면 내가 데려다줄 수 있다.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바위산이 있어.”

    눌한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믿지 않는다고 하여 달리 뾰족한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곳의 길을 잘 아는 길잡이가 필요한 건 맞으니까.

    “부디 데려가 줘.”

    “그러지.”

    대화는 더 필요치 않았다. 레그리아는 에화의 품에 안겨 눌한과 함께 바람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라히크에게 가는 길이 지금만큼 기꺼웠던 적은 없는데.

    항상 도망치기만 했던 상대에게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은…….

    이상할 정도로 후련했다.

    꼭 언제고 그러고 싶었던 것처럼.

    * * *

    “여기는 용의 협곡이라 불리는 곳이다. 누군가 숨기에 딱 좋지. 우리도 각 부족에서 전사들이 미치면 여기로 보내 치유하도록 한다.”

    “치유를 한다고? 죽이는 게 아니라?”

    눌한의 말에 에화가 시비조로 빈정거렸다.

    지금 기분이 너무 안 좋은데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이 나타나자 성질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눌한은 어른스럽고 나이가 많았기에 에화의 그런 점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뼈가 있다. 이곳에서 스스로 자결한 전사들의 것이니 함부로 흐트러트리면 안 된다.”

    “응.”

    “비칸이 너를 자신의 알-마하카라 불렀다. 그렇기에 데려온 것이다. 초원 사람이 아닌 자는 들어갈 수 없다.”

    레그리아를 향해 설명하던 눌한이 이번에는 에화를 향해 낮게 경고했다.

    “뭐? 절대 혼자 못 보내.”

    “에화. 난 가야 해. 걱정하지 마. 라히크가 나를 해칠 리도 없고. 해칠 수도 없을 거야.”

    제 신성인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신성 기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짝을 맺진 않았으되 어쩌면 이번에는… 맺게 될지도 모른다.

    레그리아는 단 한 번도 완전히 광기에 물든 신성 기사를 달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짝을 맺으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일시에 풀리고 라히크는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본디 있어야 하는 곳에, 황태자다운 모습으로.

    “……만약 이틀이 지나도 안 나오면 내가 찾으러 갈 거야.”

    “응.”

    “형이 그 안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찾는 건 딱 이틀만 해. 약속하지? 그 뒤에는 미련을 버리는 거야.”

    “알겠어.”

    심장이 엇박자로 뛰어댄다. 숨을 한껏 참았다가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횃불을 거머쥔 레그리아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고 생각하니 실체 없는 공포는 흩어지고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뿐이었다.

    라히크의 진심을 알고 싶다는 것.

    어쩌면 가장 처음부터 그 하나만 해결이 되었으면 이 정도까지 일이 커지진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레그리아는 피식 웃으며 횃불을 제 앞으로 들이밀었다.

    어둠이 밀려난다. 벽을 기던 벌레들이 사사삭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레그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공간으로 스스로 발을 내디뎠다.

    이 또한, 최초였다.

    그녀가 라히크에게 다가가기 위해 걸은 것은 말이다.

    * * *

    “…….”

    레그리아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횃불로 살펴보니 바닥에 산성 피가 고여 있는 게 보였다.

    라히크의 흔적.

    그는 이 안에 있다.

    ‘하지만 내가 불러대면 도망가서 더 깊숙이 숨어 버릴지도 몰라.’

    매번 달아나는 건 그녀 쪽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툭, 툭.

    동굴 안은 조용할 거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다.

    이곳에도 생명은 살아서 미약한 소리들이 반복해 울렸다.

    레그리아는 그 소리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라히크가 어디쯤에 있을지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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