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134)
  • 122화

    “용이 움직였다!”

    “아아, 세상이 멸망할 거야. 세상이…!”

    “엄마아아!!!”

    반룡의 본체가 움직인 뒤로 초원 전역이 패닉에 빠졌다.

    이들에게 있어 용이란 전설이며 신앙.

    용이 분노하면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지며 물이 말라 모든 인간이 죽는다고 믿었다. 그러니 지금껏 용을 달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며 섬겨 오지 않았겠나.

    헌데 그 용이 바위와 같은 몸을 일으켜 마을 쪽으로 곧장 향해 왔다.

    느렸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파멸이다.

    우드득, 쾅!

    집이 부서지고 양 떼가 놀라 울며 달아났다. 바닥이 깊게 패이고 울타리가 흔적도 없이 짓밟혔다.

    운 나쁘게 그 아래에 있던 생명은 그것이 포유류든 양서류든 혹은 절지동물이든 할 것 없이 모조리 사라졌다.

    “종말의 날이다!!!”

    “신이시여, 우리를 거두소서!”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고 목에는 동물 뼈로 만든 목걸이를 찬 알-누히람들이 뛰어나와 두 팔을 벌리며 절을 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를 안고 어디론가 안전한 곳을 찾아 달렸고 아이들은 울었으며 아버지들은 창을 쥐고 자신이 지금껏 믿던 신에게 저항하고자 했다.

    자신이 선 길 뒤로 아내와 자식이 안전하기를 바라며 공포에 맞선다.

    그러나 용의 본체에 비하면 인간은 어찌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지.

    수백 개의 창이 일시에 던져졌으나 용의 외피에 부딪혀 그대로 미끄러질 뿐.

    누구도 그 단단한 갑주 사이에 꽂아 넣지 못했다.

    평범한 전사들로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믿을 것은 최고 전사뿐.

    “비칸은! 비칸은 어디에 있지?”

    “눌한!”

    아수라장 속에 최고 전사 눌한이 전권을 쥐었다.

    하지만 대피령을 내려 모두가 달아나게 하려 해도 저 거대한 것을 막을 자가 있어야 한다.

    눌한은 비칸보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기, 늪이다!”

    그때, 누군가가 대지가 눅진해지며 휘몰아치는 걸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눌한의 시선이 늪에 가 닿았을 때.

    거기서는 오늘 용에게 인사를 갔다는 이가 나타났다. 피투성이의 비칸을 꼭 끌어안고.

    * * *

    “어떡해요, 지혈제가 듣질 않아요!”

    “압박해서 막아! 피를 더 잃으면 죽는다!”

    “여기, 진통제 가져왔습니다!”

    비칸은 최소 뼈가 일곱 군데는 부러졌고 장기가 둘 이상 상했으며 한쪽 눈은 잃기 직전이었다.

    처참한 상황임을 들은 레그리아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를 지키려다 저리 엉망으로 다친 남자다.

    그런데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치료사들이 황급히 비칸의 심장 박동을 살피고 강제로 입에 약을 흘려 넣으며 살리려 애를 썼다.

    방해되지 않도록 천막 구석에 서서 비칸을 지켜보고 있는 레그리아의 안색이 점차 희게 질렸다.

    두렵다.

    오늘 이전까지는 공포라는 게 어떤 감정인지, 무엇인지 그녀는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픈 건 비칸인데 숨을 쉴 수 없으리만치 가슴이 조이는 건 어째서 저인지.

    레그리아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빠르게 내뱉었다.

    진정해야 한다.

    진정해야만…….

    “다 비켜!”

    그때, 사라졌던 에화가 제 영지에서 의사들을 끌고 다시 나타났다.

    자다가 멱살 잡혀 끌려 나왔는지 안경이 비뚤어진 의사들은 눈앞의 중환자를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이후로도 에화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간호를 할 만한 사람이며 통역가를 데려오고 창고에서 비싼 약재를 가져와 쏟아부었다.

    아마 사정을 설명하고 데려온 건 아니고 거의 반 납치인 것 같았지만, 눈앞에 다 죽어가는 환자가 있으니 다들 투철한 사명의식을 발휘했다.

    일단 다른 건 제쳐 두고 환자부터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누나. 괜찮을 거야. 내가 저렇게 다 데려왔는데 안 괜찮으면 때려서 일어나게 할게.”

    “에화.”

    “그러니까 좀 앉아. 당장 쓰러질 것 같아.”

    수많은 전문 인력이 모이니 논의하는 소리로 인해 천막 안이 터져나갈 듯 시끌시끌했다.

    바깥에서는 굉음이 일고 벼락이 번쩍였으며 천둥이 뒤따랐다.

    종말이라 부르짖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이곳은 엉망진창이다.

    에화는 지금 당장 그녀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 버리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럴수록 레그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나랑 가자, 누나. 형은 저거 상대 못해. 초원인도 죽기 직전이잖아. 물론 죽진 않겠지만.”

    죽는다는 말에 레그리아의 안색이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해지자 에화가 얼른 말을 고쳤다.

    레그리아는 대꾸할 힘이 없어 입을 더 열지 않았다.

    비칸도, 저기서 홀로 괴물과 맞서 싸우고 있는 라히크도 걱정스럽다.

    라히크가 그녀를 등지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최소한 레그리아의 기억 속엔 없었다.

    그를 등지고 달아나고 도망친 건 언제나 그녀였지.

    라히크는 언제나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왔다.

    갈 곳 없어 방황하는 그녀를 향해 그의 곁이 있을 곳이며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말해 주지 않았던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건….

    ‘나였어.’

    물론 라히크는 잘못을 저질렀다.

    처음부터 대화를 통해 풀려고 하지 않았고 강압적이었으며 독선적이었다.

    그녀를 깔아뭉개고 제멋대로 하려 했으며 자신이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도 오만하였다.

    거기에 상처받고 힘들고 마음이 고생스러웠다. 분명 그랬지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들으면 될 것 같은데.

    그녀라고 잘못하지 않은 건 없으니까.

    서로 같이 모자랐고, 둘 다 부족했고, 미흡했다.

    마음을 줄 줄을 몰랐고 받을 줄도 몰랐으며 서로를 돌아보고 살피는 법 또한 몰랐다.

    똑같이 이기적이고 저만 생각했고 그래서 칼끝을 서로에게 겨눴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전가하면서도 그러지 않은 척 굴었다.

    결국 이 시점이 되어 라히크가 죽는다고 생각하자 발끝이 차갑게 식어 피가 돌지를 않는 걸 보면… 그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는 건 아니었다.

    라히크는 언제고 살아 있어야 한다. 가장 오만하고 잘난 모습으로.

    그는 망가져선 안 되는 남자였다.

    “나를 다시 저곳으로 데려다줘, 에화.”

    “뭐? 미쳤어?”

    “응. 그런가 봐.”

    비칸의 숨소리가 조금씩 살아났다. 하얗게 질려 버린 주먹을 간신히 펴며 레그리아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라히크에게 못 들은 말이 있어.”

    “안 돼. 절대 안 돼. 절대 못 데려다줘!”

    “저대로 두면 라히크는 죽어. 정신접촉을 해 줘야 해. 라히크의 상태가 안 좋은 건 너도 알잖아.”

    아아, 그가 다시 시작하자고 손을 내밀었을 때 최소한 정신접촉은 해줄 것을.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까지 후회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에화. 난 너랑 있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어.”

    레그리아는 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디트리히가 건넨 종잇조각을 꺼내 에화에게 쥐여 주었다.

    로에르멜 공작에 관한 내용인데, 이게 뭐 그리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줄 것이라곤 이거 하나뿐이었다.

    “덕분에 상처도 많이 치유되었고. 난 네가 밉지 않아. 네가 비록 나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탑 속의 공주님으로 만들려 했지만….”

    “누나, 잠시만. 왜 그렇게 마지막 인사처럼 말해? 왜, 왜 그래?”

    “모르겠어. 그런데 그래야 할 것 같아.”

    이상한 예감, 혹은 직감이 든다.

    지금 이 천막을 떠나 라히크에게 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히크에게 가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라히크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건 라히크와 내가 가장 깊게 얽혀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라히크의 끝이 폭발적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그는 이 싸움에 모든 것을 걸려는 작정인 게 분명했다.

    “데려다줘. 그리고 너는 가도 좋아.”

    “내가 누나를 두고 어딜 가? 어떻게 나한테… 어떻게 이래. 나로는 진짜 안 되는 거야?”

    에화의 뺨을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닦아 주고 싶었지만 만약 여기서 다정하게 대하면 에화는 절대 그녀를 놓지 못할 것이다.

    어떨 때는 단호함과 냉정함이 차라리 도움일 수 있음을 알기에 레그리아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미안. 너로는 안 돼.”

    정말 미안하지만 에화의 손을 잡으면 라히크는? 비칸은?

    에화는 유토피아였다. 낙원이다.

    망각의 물을 마시고 저 양귀비 꽃밭으로 걸어 들어가면 아찔하게 행복할 테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새파랗게 일어난 이성이 칼처럼 길을 막는다.

    대신 그녀가 지금 당장 가야 하는 곳은…….

    “비칸. 미안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 돌아올 수 없다면.

    레그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품에서 피리를 꺼냈다.

    그녀가 다가가자 침대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선다.

    레그리아는 한쪽 무릎을 살짝 꿇고 앉으며 비칸의 손에 피리를 쥐여 주었다.

    “만약 내가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땐 당신의 옆에 있을게.”

    그러니까 깨어나, 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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