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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121/134)
  • 121화

    하지만 레그리아가 라히크를 부르기도 전이었다.

    라히크는 그녀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졌다.

    이윽고 빛이 먼저 번쩍이고 뒤이어 허공에서 굉음이 울린다.

    자칫하면 이 동굴을 통째로 무너트릴 듯 어마어마한 풍압이 그녀의 베일 자락을 휘감아 저 높이 날려 보냈다.

    “누나, 이리 와!”

    “…에화?”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에화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간신히 뒤를 돌자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에화의 눈가가 온통 짓물러 붉었다.

    “어서! 빨리 도망가야 해! 저게 뭐야, 대체!”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정해 보이는 이유는… 아마 늪이 미친 듯이 일렁거리고 있어서일 것이다.

    저걸 타고 가면 안전할 수 있는 게 맞나.

    레그리아는 쓰러진 비칸의 팔을 잡아끌려고 용을 쓰다 빠르게 포기하고 소리쳤다.

    “네가 여기로 와! 비칸이 다쳤어. 데려가야 해!”

    “버리고 와, 누나. 나는 누나만… 누나만 구하고 싶어.”

    그녀에게로 내뻗는 손이 간절하다.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듯, 그녀더러 굳이 저기까지 오라고 하는 속셈이 빤해 보였다.

    그러면 비칸도 라히크도 버리고 그녀만 데리고 가려고.

    그런 다음 어딘가에 가둬 놓고 영영 둘의 소식을 알 수 없게 할 것이다.

    에화라면 그녀를 놓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싫어. 그럴 거면 너 혼자 가렴.”

    레그리아는 에화를 차게 외면했다.

    의식을 잃은 비칸도 문제지만 라히크는 어쩐단 말인가.

    둘이 싸우는 것을 시선이 따라갈 수 없다지만 아마 반룡과 라히크는 호각인 것 같았다. 라히크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런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에화의 늪이란 기회를 그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가야 해, 누나. 제발, 제발 가자. 응?”

    “라히크는.”

    “다 못 데려가! 형은 저걸 막아야지!”

    “아니, 다 같이 가지 않으면 안 갈 거야. 넌 두 번 여기로 돌아오려 하지 않을 거잖아.”

    “…하, 미치겠네.”

    얼굴을 일그러트린 에화가 하는 수 없이 고집을 버리고 그녀의 옆에 나타났다.

    레그리아의 고집은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정말로 목숨이 달려 있는 상황이다.

    에화가 먼저 포기할 줄 알았기에 부린 고집이기도 했다.

    ‘살아야 하는데. 너와 라히크를 같이 데리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비칸.’

    레그리아는 비칸의 맥을 짚다 몸서리를 쳤다.

    차갑다.

    이상하다. 이렇게 차갑고, 이렇게 느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비칸의 몸은 언제나 뜨거웠던 것 같은데…….

    콰가가각!

    그 순간, 반룡의 공격에 튕겨져 나온 라히크가 레그리아의 앞을 막아서며 태연히 내뱉었다.

    “먼저 가라.”

    “라히크!”

    “네가 내 걱정을 왜 하나. 그럴 이유가 없음인데. 망설이지 말라. 방해만 되니.”

    단호하게 선을 그은 라히크의 입가에 선혈이 흐른다. 무심하게 닦아낸 그는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밀어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앞으로 퉁겨지듯 나아가 검을 휘둘렀다.

    - 이 버러지! 버러지 같은 게! 나는 신이다! 신이란 말이다!!!

    “스스로 그리 칭하는 자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군. 그래, 여기가 네 왕국인가.”

    까아앙!

    딱딱한 외피에 덮인 반룡의 손은 그 자체로 무기라 검날을 쉽사리 쳐냈다. 그러나 라히크라 해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선택해야 해.’

    그녀가 함께 가겠노라 하지 않으면 에화는 절대로 비칸을 안전한 곳에 데려가 주지 않겠지. 허나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비칸의 목숨은 보장할 수가 없다.

    레그리아는 에화가 어떻게든 비칸을 두고 갈까 싶어 피로 적셔진 몸을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점점 느려지고 있다.

    이러다 제 품 안에서 그가 죽을까 봐 정말 죽도록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만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내가 꼭 다시 올 테니까, 살아남아.”

    라히크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들었을 거라 믿었다.

    ‘우린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잖아.’

    라히크가 그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샅샅이 알고 싶다.

    그가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감췄는지, 왜 알려 주지 않았는지.

    그녀가 오해하고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이를 낳자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왜 그때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는지.

    어째서 당신은 그토록 오만한지.

    ……정말로 전쟁을 한 게, 저와 꾸리고자 한 가정 때문인 건지.

    그 모든 걸 묻고, 알고자 했다.

    ‘잘 모르겠어. 라히크를 사랑한다거나 라히크가 없으면 안 된다거나 하는 절박한 감정은 아니야.’

    그러나 레그리아는… 라히크가 사라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단지 그뿐.

    하지만 그녀와 라히크의 관계에 있어서 그건 모든 것의 변화를 의미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레그리아가 라히크를 긍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 *

    그렇게 레그리아가 사라진 뒤.

    악룡이 되어 버린 괴물은 울분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거대한 본체를 일깨웠다.

    짤랑짤랑, 짤랑짤랑.

    방울이 시끄럽게 울리며 경고를 해댄다.

    아마 오래전, 반룡의 본체가 잠들었을 때. 야만족의 현명한 누군가가 꼬리 부근에 달아 둔 방울인 모양이다.

    잠시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긴 라히크는 완전히 몸을 일으킨 거대한 용을 훑어 내리며 빠르게 약점을 찾았다.

    ‘목은 단단한 외피로 보호되고 있다. 머리 가죽부터 척추를 지나 꼬리까지 이어진 신경을 끊을 수 있다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용은 이제 더는 필요 없었다.

    열매가 아닌 가지를 구해 두었지 않나.

    그걸 얻기 위해 당시에는 꽤나 고생을 하였지만 돌이켜 보니 잘한 일이었다.

    망설임 없이 저것을 베어 버릴 수 있으니까.

    라히크는 검에 묻은 진액을 털어내고는 고쳐 쥐었다.

    따지자면 그의 상태는 별로 좋지 못했다.

    레그리아에게 정신 접촉 한번 받지 못했기에 켜켜이 쌓인 광기가 갈 길을 찾아 울음을 토하는 중이다.

    그 역시 저 미친 반룡처럼 언제든 저리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황제는 되지 못하겠군.’

    책임감은 눈곱만큼도 없고 오직 즐기기만을 좋아하는 에화에게 그 위대한 자리가 돌아갈 것을 상상하니 썩 유쾌하지 못하다.

    쯧 하고 혀를 찬 라히크는 허공을 향해 들어 올린 왼손을 꽉 거머쥐었다.

    먹구름 짙은 하늘에서 벼락이 빠르게 세 번 내리친다.

    놈의 덩치가 크니 맞히는 맛은 꽤 있었다.

    마지막 전투라 생각해도 썩 나쁘지는 않을 만큼.

    ‘레그리아가 돌아오기 전에 끝을 낸다.’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삶이었다.

    악착같이 거머쥐려 했고, 모든 것을 탐욕했다.

    황태자 자리도, 레그리아도.

    둘 중 무엇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 가질 수 있노라 자만했다.

    그게 자만이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허나 둘 중 하나를 결국 택해야 하는 순간에서 라히크는 자신의 본능에 따랐다.

    ‘내가 죽더라도 저것만큼은 반드시 죽여 없앤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라히크는 후환을 남겨 두는 성품이 아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길 따위를, 내가 남겨 둘 성싶은가.’

    초원을 지키는 용이라는 게 레그리아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전쟁 때 밀어붙여 죽였을 텐데.

    그랬으면 레그리아가 이곳에 올 이유도 없었으리라.

    그것이 지금 그의 후회 중 하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만에 본체를 움직이는 놈도, 그 역시도 지쳐 있다.

    위에서 아래로 놈을 내리그으며 라히크는 이곳에 오기 전, 로에르멜 공작을 불러들였던 것을 떠올렸다.

    “용살자가 되면 저주를 받을 텐데, 그래도 가실 텐지요.”

    “같잖은 소리를 하는군. 일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레그리아가 탈출하도록 도운 게 아닌가.”

    “막았어도 갔을 겁니다. 그 반룡에게는 특별한 영혼을 이끌어오는 축복이 있으니까요. 그놈을 죽여 숨통을 끊어 놓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지요. 레그리아는 한평생 영향을 받을 거랍니다. 먹히기 위해 전하에게서 달아나려 하겠지요.”

    “어떨 때는 공작이 야만족과 같은 피가 흐르는 건 아닐까 싶을 지경이야. 남들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어찌 그리 많이도 가지고 있나.”

    그의 빈정거림에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어쩌면 대답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레그리아는 초원의 피가 흐르는 건가?’

    원로 대신들이 알면 뒤집어지겠군.

    ‘하긴, 그 붉은 머리칼은 꼭 태양 같기는 하지…….’

    금빛은 태양이 비추는 햇살 줄기에 불과하다.

    태양이 지닌 진짜 빛깔은 붉음이지.

    라히크는 이제껏 자신이 알던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다시 지어지는 것을 보았다.

    새로운 에덴에 뜬 태양의 이름은 레그리아.

    오직 레그리아였다.

    ‘신성인에게 종속된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로구나.’

    울컥.

    장기가 꼬여 피가 토해졌다. 췌장이든 비장이든 뭔가 하나가 파열된 것은 확실하다.

    레그리아의 환영이 사라지자 놈의 뿔이 그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일부러 당한 것이다.

    이 거대한 것의 목을 가장 쉽게 베기 위해.

    들어 올린 검에 황금빛 검기가 휘감겼다.

    오러 소드.

    이렇게 지척에서 검기를 맞아도 살아날 수 있을까.

    - 그, 그건…! 이미 사멸한 힘일 텐데!

    “이것에도 목이 베이지 않는다면 너는 신일 것이다. 허나 신이라 칭한 너를 내 힘으로 죽이면… 내가 신이 되겠군.”

    - 나를, 나를 죽이면 너도 저주받을 거야! 너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가 되어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그거 괜찮은 미래로군. 죽진 않는다는 것이니 이 몸에게 언젠가는 제위가 돌아오지 않겠느냐.”

    - 아아악! 싫어! 그 힘은 싫어! 나를, 나를 살려주면 네 욕망을 채울 수 있게 해 주겠다! 그 계집의 영혼은 내가 먹고 몸은 네가 가지면 되지 않겠……!

    푸욱.

    “같잖게 굴지 말라. 그 영혼도, 살도, 뼈조차 내 것이다.”

    놈의 목을 베는 순간 하늘에서 굉음과 함께 저주가 비처럼 쏟아졌다.

    기꺼이 그 비를 맞으며 라히크는 용살자가 되었다.

    완전히 타락한 마귀가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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