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34)
  • 120화

    의지와 행동이 동시에 일어났다.

    레그리아는 오른 손을 뻗어 피리를 낚아챔과 동시에 왼손으로 끈적한 벽면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있는 힘껏 피리를 불자 시끄러운 소리가 동굴 안을 부딪치며 몸집을 불렸다.

    - 아악! 뭐야! 뭐야, 이건…!

    통한다.

    찰나지만 반룡에게 반응이 있었다.

    레그리아는 더욱 힘껏 피리를 불며 정신 접촉을 다시 시도했다.

    ‘아, 됐…다!’

    눈앞이 일렁이더니 놈의 내면으로 파고든 순간, 비칸이 반룡을 들어 그대로 바닥에 내리치는 게 보였다.

    다음에 그녀의 눈앞을 뒤덮은 것은 벨벳 같은 어둠.

    그저 새카만 어둠이었다.

    * * *

    잠시 뒤, 레그리아는 어떤 공간에 서 있었다. 찰랑찰랑한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호수 바닥과도 같은 곳.

    ‘내면이 이 정도로 검게 물든 건 처음 봐.’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라히크는 겉보기엔 어둠에 물들어 있는 것 같았지만 손을 대면 확 밝아지며 구불구불 뒤엉켜 있는 실타래가 드러났다.

    그러나 반룡의 내면은 어디를 손을 대든 아무런 변화가 일지 않았다.

    하도 오래되어 그녀 혼자서는 어떻게 안 되는 것처럼.

    ‘여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벽이라 생각했던 것은 손을 뻗어 보니 벽이 아니라 막인 모양이다. 어딘가 물컹하면서도 쭉 늘어나는 걸 보아하니.

    거기다가 이 소리.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 고동 같은 것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내부를 울린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귀를 기울이던 레그리아는 문득 반룡의 내면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태내?’

    혹, 자궁 안인가?

    그렇다면 다리를 감싸는 이 따스한 물은 양수일 것이다.

    ‘자궁이고, 양수라 가정한다면… 아기는 어디에 있지?’

    - 흑… 흑.

    그때, 그녀의 귓가에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위적인 울음은 동쪽으로 향할수록 멀어지고, 서쪽으로 갈수록 가까워진다.

    예로부터 동쪽이란 생명의 탄생이요, 서쪽은 생명의 죽음을 뜻하니 사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 상황을 바꾸려면 반룡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과 마주할 수밖에는 없었다.

    ‘내가 과연 이 어둠을 다 몰아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광기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미쳐 버린 반룡이 정신을 좀 차리면 대화라는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긴 암흑의 끝.

    쪼그리고 앉은 아이가 보인다.

    레그리아는 우선 경계하며 다가가지 않았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말을 건넬 뿐.

    저 아이가 광기의 본체인가?

    “괜찮으면 이야기를 해 볼래?”

    - ……파.

    “뭐라고?”

    - ……배고파!!!

    홱 치든 얼굴에 눈도 코도, 입도 없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레그리아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반룡의 의식체를 피했다.

    비틀거리던 의식체는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반룡은 아이나 다름없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찾고, 짜증이 나니 짜증을 내며 울고 싶으니 운다.

    이 내면의 모습은 반룡의 모든 것이 원초적인 욕구에만 머물러 있다는 걸 의미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해결 방법은 하나 뿐.’

    욕구를 채워주어야 한다.

    고민하던 레그리아는 내면세계 안에서 피리를 형성해 냈다.

    비칸이 준 바로 그 피리였다.

    “내가 음악을 들려 줄게. 그리고 앞으로도 네게 좋은 음악을 주겠다고 약속할게. 먹지 않아도 되도록.”

    - 먹지 않아도, 돼?

    “응.”

    의식체를 직접 만난 건 처음이다. 이렇게 대화가 되는 것도 처음.

    비칸의 내면에도 생명체가 있긴 했지만 그건 양 떼였으니까.

    ‘부디 이게 통해야 할 텐데.’

    자신은 없지만 반룡의 내면에 접촉할 수 있다면 광기를 낫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레그리아는 고민하다가 여섯 개의 구멍이 있는 피리로 부를 수 있는 짧은 곡을 하나씩 하나씩 연주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아이 같은 의식체가 그녀를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이게 위험한 건지, 아니면 광기가 사라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하다.

    레그리아는 조심스럽게 네 번째 곡을 끝냈다.

    캐논 변주곡.

    그녀가 아는 가장 짧고 사랑스러운 음악이었다.

    ‘통한 건가?’

    입술을 잘근 물고 있는데 의식체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더니 그녀를 향해 달걀처럼 매끈한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게 아닌가.

    소름이 끼쳐 상체를 뒤로 물린 그녀를 빤히 보던 의식체의 얼굴에 스멀스멀 입이 생겼다. 쭉 찢어졌다. 입꼬리가 추켜 올라간다.

    괴물처럼 일그러진 초상이 그녀를 향해 높이 웃어대며 외쳤다.

    - 그래도 역시 나는 너를 먹고 싶어!

    오싹한 한마디 끝에, 레그리아는 현실로 튕겨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상황은 보다 급박하게 바뀌어 있었다.

    “아.”

    세상에, 이게 다….

    그녀가 쓰러지듯 기댄 자리를 제외한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다.

    레그리아는 제 앞을 막아선 피투성이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비명을 삼켰다.

    “다…행, 깨어났….”

    “비칸! 이게… 이게.”

    그르르르르.

    말을 채 잇기도 전, 비칸의 앞에 선 ‘마귀’가 지독히 허기에 찬 울음을 뱉었다.

    레그리아는 직감했다.

    저것은 이제 통제가 불가능하다.

    레그리아가 정신 접촉을 하려 했던 건, 일단 내면에 빠져들고 나면 그녀와 놈이 같이 잠들기 때문이었다.

    연결된 둘을 함부로 떼어놓으면 안 된다지만, 반룡이 잠든 사이 비칸이 둘 다 업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룡은 반이라도 인간이 아니라 그런지 신성 기사들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강력한 힘으로 그녀를 튕겨내고 제 욕구를 채우려 하는 걸 보면.

    비칸은 그런 괴물과 그녀 사이를 갈라놓고 홀로 버티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면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0분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이렇게 되다니.’

    늘 단단하던 근육이 지금은 여기저기 찢겨 있다.

    한쪽 팔에 힘이 빠져 늘어진 걸 보니 아마 제대로 부러진 모양이었다.

    ‘많이 아플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칸은 비키지 않았다.

    그와 그녀는 아직 반려를 맺은 것도 아닌데도.

    ‘더는 방법이 없어.’

    이게 도망의 끝인가 보다.

    레그리아는 침묵하는 비칸의 등을 보았다. 그가 막아 주고 있는 위험을 응시했다. 그런 다음엔 시선을 위로 올려 뚫려 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달빛조차 없는 밤이구나.

    죽기에는 그다지 좋은 날이 아니다.

    먹구름이 몰려들어 금세라도 벼락이….

    ‘잠깐.’

    레그리아는 제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저것이 무엇인지 안다. ‘누가’ 만든 건지도 알았다.

    입술을 깨문 레그리아는 서둘러 비칸을 껴안고 그의 무게를 버텨냈다.

    “고마워, 비칸. 하지만… 이제 쉬어도 돼.”

    그는 뼛속까지 초원인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모셔야 한다’, ‘신성하다’라고 여겨져 왔던 존재와 싸우는 게 쉬웠을 리 없었다.

    하지만 비칸은 그렇게 했다. 헌신에 가깝게 그녀를 지켰다.

    “덕분에… 사랑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할리…카. 도망….”

    “괜찮아. 그게 내 이름이잖아?”

    할리카.

    신을 속이는 자.

    비칸이 직접 붙여준 새로운 이름.

    레그리아는 비칸을 껴안으며 몇 번이고 등줄기를 토닥였다. 그러자 비칸의 무릎이 서서히 꺾인다.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이미 한계인 것이다.

    ‘절대로 나 때문에 네가 죽게 두지 않아.’

    몸을 일으킨 레그리아는 완전히 미쳐 버린 괴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어쩌면 좋니.”

    - 뭐…가.

    “네가 원하는 특별한 영혼은 내가 아닌데.”

    끼기긱.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숨을 들이마신 레그리아는 놈을 속일 수 있는 한마디를 꺼내놓았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맞지. 하지만 반쪽뿐이야. 나머지 반은 네가 데려오지 못한 벨리그레엄에 있어.”

    - 뭐…라…고.

    “내 동생. 그 아이. 사실 나랑 쌍둥이거든. 하나의 영혼이 둘로 나뉘어 태어났어. 그건 몰랐겠지.”

    - ……!

    “나 하나를 먹는다고 네가 채워지지 않아. 하지만 지금 나를 살려 두고 내가 죽을 때가 되어 먹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를 미끼 삼아 그 애를 부를게. 그 애를 먼저 먹어.”

    허기는 이성을 잃게 만든다.

    놈은 생각을 하고 싶은 듯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거렸다.

    그러는 동안 지금도 시시각각 머리 위엔 번개가 내리치고 있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하는 동굴 속.

    놈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느리게 입을 열었다.

    - 나…는… 너…부…터… 먹…고, 찾…으…러… 가…겠…다…!

    이제 정말 끝인가.

    이름처럼 신을 속이지 못했을까.

    그러나 놈이 뒷발에 잔뜩 힘을 주고 위로 뛰어오른 바로 그때였다.

    쾅!!!

    폭음이 일더니 눈앞이 하얗게 타는 듯한 섬광이 번쩍였다.

    - 끄아아아아악!

    괴물의 비명과 함께 어디선가 많이 본 뒷모습이 나타나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땅으로 내리 꽂히는 벼락이 몇 번이고 괴물을 태운다.

    희게 빛나는 시야에 비치는 건….

    어쩌면 당연하게도, 금안과 금발을 지닌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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