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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34)
  • 119화

    “반룡?”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지. 내가 죽이고 싶어 하는 진짜 신은 이미 이 세계에 없다.”

    비칸의 낯에 미약한 혐오가 깔렸다.

    그가 저러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너무도 생소했다.

    그런 그를 향해 용, 아니, 반룡이 이를 악물며 삿대질을 했다. 어딘가 자존심에 굉장히 큰 상처를 입은 듯했다.

    - 네가 뭘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이 ‘의식’이라는 게 사실 반룡의 인생 한탄을 들어주는 자리인가?

    레그리아는 그렇게 의심하며 열매를 찾아 주변을 더욱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나무도, 열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열매가 자란다는 걸까.

    어떻게 생겼는지 보아 두고 싶었는데.

    - 용이 낳은 열두 자식 중, 오직 나만이 용이었어. 그래서 하는 수 없었지. 용이 떠난 뒤엔 내가 그 자리를 채우는 수밖에. 그도 그럴 게, 너희 같은 인간 멍청이들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그러는 동안에도 반룡은 끊임없이 제 할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레그리아는 문득 제 뺨 위로 뭔가가 치덕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액체?’

    손을 들어 닦아내니 뭔가 기이하게 끈적거렸다.

    킁 하고 냄새를 맡자 어딘가 시큼하면서도 톡 쏘는 듯한 악취가 풍겨온다.

    이 공간을 전체적으로 뒤덮고 있는 악취는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 그런데 내가 너무 아파. 아파서 못 견디겠어. 좋은 음악을 들으면 통증이 나아지지만… 그보다는 난 영혼을 먹고 싶어. 나를 낫게 할 특별한 영혼을!

    그런데 왠지 이것의 정체가 무언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동굴에 맺힌 이슬이 아니라 이건 설마….

    - 너는 모든 전사를 무릎 꿇릴 수 있는 힘을 지녔어. 네 영혼은 특별하고, 그만큼 맛있겠지. 그런 넌 내 먹이가 되어야 해. 나를 유지하기 위해!

    쿵!

    그녀의 예상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온 사방이 뒤흔들렸다. 그에 맞추어 반룡이 갈고리 같은 손을 내뻗었다.

    그대로 잡힐 뻔한 레그리아를 구한 것은 그 사이에 서 있던 비칸이었다.

    비칸이 보이지 않은 게 아니라면 저 반룡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것이다.

    비칸이 자신을 막을 줄 몰랐다는 듯 반룡은 쳐내진 제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 왜? 왜 거부해?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윽.

    울림이 거세어질수록 두통이 심해진다.

    반룡은 자신이 거부당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같은 말을 반복하며 화를 냈다.

    마치 제 먹잇감이 되는 것이 그녀에게 정해진 숙명이라는 듯이 말이다.

    - 네게 달아나라는 속삭임을 끊임없이 심어 두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여기로 온 거야. 아니, 아니, 아니지. 넌 항시 어디론가 달아나려 했지. 내 속삭임대로, 내게 이끌려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가엾게도. 하지만 그것들이 문제였지!

    라히크. 에화. 비칸. 에화. 라히크.

    반룡은 빠르게 중얼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두 눈을 번들거리며 레그리아를 노려보았다.

    ‘폭주 직전. 마귀화가 거의 다 진행되었어.’

    용도, 마귀가 되나?

    - 네 운명은 본디 이 땅에 와서 내게 먹히는 거였어. 그것만이 네 존재 가치이며 너의 의의다! 네가 그토록 찾고자 한 안식처는 내 배 속이야!

    “개소리도 정도껏이지….”

    황당해서 무어라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반룡이란 자는 거나하게 미쳤거나, 아니면 저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용은 대체 왜 애초에 다른 세계에서 영혼을 끌고 와 이 세계 사람의 몸에 집어넣은 거지?”

    늘 머리 한켠에서 떠나지 않던 궁금증이다.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하는지. 어째서 이렇게 많은 영혼들이 필요한지.

    하지만 그게 다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였다면 납득이 된다.

    용은 그저 수많은 영혼 중 맛있어 보이는 걸 골라왔을 따름이었다.

    우리가 시장에서 식자재를 고르듯, 다른 차원에서.

    그러니까 반룡에게도 마찬가지로, 레그리아는 하나의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먹잇감.

    그저 그뿐.

    “하.”

    헛웃음이 터졌다.

    이 세계에 온 뒤로 황당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여럿 있었으나 지금처럼 모멸감이 느껴지는 경우는 없었다.

    먹잇감이라니.

    - 용의 몸을 구성하려면 특별한 영혼이 필요해. 하지만 그 영혼을 찾기란 너무나 어렵지. 최초의 용, 내 자랑스러운 부친께서는 그래서 너희를 데려온 거야. 옥석을 가린 다음 맛있는 것만 골라 먹으려고.

    “…….”

    - 넌 항상 외로웠겠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겠지. 다른 이들처럼 단 한 사람과 반려를 맺으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해 속상했겠지. 그건 다 이유가 있어. 네가 속한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놈의 혓바닥은 길기도 했다.

    무언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흥분해서 주절거리는 와중 자꾸만 액체가 천장에서 떨어져 그녀의 몸을 적셨다.

    레그리아는 놈이 떠드는 동안 비칸의 팔뚝을 꽉 잡고 빠르게 속삭였다.

    저 미치광이의 말을 더 들어줄 필요 없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이 동굴 전체가 용의 본체인 것 같아.”

    “탈출구를 찾겠다.”

    비칸은 더 묻지도 않고 그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를 지배하려 든 만큼 나 역시 너에 대해 눈치를 채게 되었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건 그만큼의 영향을 받는 일이기도 하니까.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엔 잘 몰랐는데 이렇듯 거리가 가까워지니 아까부터 무언가 정신적인 마찰이 일어난다.

    레그리아는 놈에게 본능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정신 접촉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반룡은 계속해서 밀어냈지만 레그리아는 침식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는 확신이 든다.

    그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형태로 살든 반룡은 계속해서 쫓아오리라.

    진정한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네게 먹히기 위해 여기까지 내 권리를 주장하며 온 줄 알아?”

    - 이상하네. 지금까지 겪어 봤으면 알잖아?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넌 사랑받을 수 없어.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아. 너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지. 그런데 왜 자꾸 살려고 발버둥을 치지?

    “죽음을 택해도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죽을 거야. 너 따위에게 먹히는 것 말고.”

    그녀의 차분한 말이 끝나는 순간, 비칸의 모습이 사라졌다.

    쾅!!!

    폭격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닥이 깊게 패며 돌조각이 튀어오른다.

    뒷걸음질을 친 레그리아는 벽면에 몸을 대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웅크렸다.

    ‘정신 접촉을 하기만 하면… 한 번이라도 가능하다면 이길 수 있을 거야.’

    비칸은 이 동굴의 천장 일부를 무너트리는 걸 목표로 삼은 듯했다.

    그게 유일한 선택지이기는 하다.

    돌아가기엔 구불구불한 식도를 따라 다시 나가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비칸을 여기 혼자 두고 그녀만 달아나고 싶지도 않았고.

    도망치는 대신 레그리아의 선택은 싸우는 것이다.

    비칸이 저 반룡을 없앨 수 있게 틈을 버는 것.

    -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넌 내 거야. 넌 내 거야. 내 거야. 내가… 내가 먹을 거야!!!

    원하는 대로 쉽게 되지 않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노하던 반룡이 고함을 질렀다.

    짐승과도 같은 포효에 튕겨져 나간 비칸이 목젖처럼 생긴 거대한 석주에 부딪혔다.

    다행히 어디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는지 반룡이 몸을 돌려 그녀를 조종하려던 그때, 비칸이 달려들어 주먹으로 놈의 뿔을 후려갈겼다.

    - 아아아악! 아파! 아파! 아프다고!

    쿠르르릉.

    뚝. 뚝, 뚝, 뚝.

    위가 쪼들리며 나는 듯한 허기진 소리와 함께 위액 같은 액체가 머리 위로 퍼드득 떨어진다.

    반룡은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위태위태하게 버티며 비칸의 공격을 받아냈다. 이래서는 승부가 쉽사리 날 것 같지 않았다.

    ‘살다 살다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 자까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매번 달아나려 했던 것에 대한 벌인가.

    허탈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레그리아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본래 정신 접촉은 상대와 신체 일부를 닿은 상태에서 하는 게 가장 빠르다. 특히 처음 접촉하는 상대라면 더욱더.

    애초에 그녀가 용에게 정신 접촉이 될 거라 생각한 이유는… 용이 데려온 것이 알-마하카이기 때문이었다.

    굳이 정신 접촉이라는 속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냥 데려와서 하나씩 잡아먹으면 되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이 힘이 용 또한 필요하단 거겠지.

    지금 반룡이 보여주는 모습 역시 마귀에 가까웠다.

    ‘시도해 보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싸우는 둘을 그대로 두고, 레그리아는 미끈거리는 벽에 두 손을 댔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던 레그리아는 문득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놈은 자신을 최대한 보호하고 있다.

    정신의 틈을 뚫기 위해서는….

    ‘소음!’

    짤그락.

    그녀의 치마 주머니에서 떨어진 피리가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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