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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118/134)
  • 118화

    레그리아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마음이 달군 돌을 넣은 것처럼 따스하다는 것.

    그녀에게 비칸은 과분한 사람이었다.

    라히크의 말대로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허나 걱정 마라.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가겠다.”

    “고마워. 아주 든든해.”

    참 고마운 남자다. 그녀가 필요로 할 때마다 항시 있어 주는 사람이라 해야 하나.

    이 땅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행복하기를 비는 사람이기도 했다.

    “가기 전에… 내 행운을 반쯤 떼어 줄게, 비칸.”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네 행운은 네가 모두 가져야지.”

    “저 안에서 어떤, 만에 하나 나쁜 일이 생기면 당신이 날 구해 줄 거잖아.”

    비칸의 손을 잡고 말에 오른 레그리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녀가 안는 대로 순순히 다가온 그의 입술에 제 것을 꾹 누른다.

    그러자 비칸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아마 입맞춤을 할 줄은 몰랐을 테지.

    앓는 소리를 내던 비칸이 허겁지겁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다 고른 치열을 핥고 그 사이로 침입하는 혀가 달큰하니 뜨겁다. 뭉툭하고 더운 살덩이가 입안 곳곳을 침범했다.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기세는 거칠었으나 서툰 혀 놀림은 애절할 만큼 부드러웠고 그 뒤에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의 행동과 숨결 하나하나에서 앳됨이 묻어났다.

    라히크는 내가 마지막이라 했고, 비칸에겐 내가 처음이다.

    농밀하게 휘감아 뱃속까지 열기를 퍼지게 만드는 라히크의 입맞춤과는 달랐다. 사실 이가 부딪치는 바람에 조금 아프기도 했다.

    그래도 그를 온전히 받아들인 건 이 키스를 통해 정말 그녀가 가진 행운이 비칸에게 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가진 것 없는 그녀가 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무형의 소원뿐이니까, 이거라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렴풋한 예감이 든다.

    ‘이번이 내 도망의 마지막.’

    어떤 형태로든 끝을 보게 되겠지.

    “크흠.”

    “거, 보기 좋기는 한데 나머지는 집에 가서 하라고!”

    우리 둘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야유와 환호를 반반씩 섞어 외쳤다.

    그와 동시에 간신히 내게서 떨어져 나온 비칸이 숨을 헐떡이며 제 입을 손등으로 틀어막았다.

    몽롱하던 두 눈이 현실을 깨달은 듯 커졌다. 홧홧하게 달아올라 벌게진 귀와 목이 그가 한 이것이 첫 키스임을 증명했다.

    그런 비칸의 반응에 레그리아의 가슴 역시 어딘가 간질간질해졌다,

    “자자, 출발!”

    선두에 선 전사들의 외침 끝에 그녀가 탄 말이 움직인다.

    그녀를 둘러싼 행렬은 제법 거창했다.

    ‘꼭… 용에게 신부를 보내는 것 같네.’

    그럼 방금 나눈 절절한 키스는 바람을 피운 거라 봐야 하나.

    픽 웃으며 붉은 베일을 내린 레그리아는 고삐를 거머쥐었다.

    예상대로 옷을 갈아입으며 가지고 있던 소지품은 모두 빼앗겼으나 단 하나. 피리만큼은 쥐고 있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앞으로 내내 행복하기를!”

    “우리 중 하나가 된 것을 환영해요!”

    사람들이 가는 길 내내 머리 위로는 꽃을, 바닥에는 물을 뿌렸다.

    하도 요란하여 동물들이 놀라 날뛰고 짖어댄다. 평소라면 풀숲에 조용히 숨어 있었을 벌레들마저 이리 튀고 저리 튀며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있는 힘껏 노래를 불러댔다.

    아흔아홉 개의 횃불이 석양 아래 번들거리며 마지막 태양 볕을 담아내는 동안 레그리아는 어느덧 붉은 줄이 쳐진 곳에 도달했다.

    누가 봐도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구역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최고 전사를 비롯해 단 몇 명만이 들어갈 수 있다.”

    비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레그리아는 식은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음을 깨달았다.

    만약 라히크가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면, 혹은 에화를 어떻게든 설득하여 초원에 온다면.

    지금 툼룬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막아설 게 분명하다.

    아, 혹 이토록 의식을 서두르는 건 그 때문인가?

    라히크나 에화가 오기 전에 끝을 내려고?

    ‘그렇다면 옹졸하기 짝이 없네.’

    일전에 용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땐 그저 신비롭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싸늘한 조소만이 난다.

    라히크만도 못한 게 무슨 신이라고.

    계속해서 비교를 라히크와 하게 되는 건, 그녀가 아는 모든 인간들 중… 가장 신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는 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만하고, 재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교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

    사박사박.

    꼬리가 길던 행렬도 이제 세 사람만이 남았다.

    노파와 그녀와 비칸.

    셋 다 말이 없었으므로 침묵과 침묵 사이에는 풀벌레의 울음이 끼어 있었고, 간간이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렸으며 타닥타닥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천둥처럼 거세었다.

    이미 의식을 치러본 다른 알-마하카들의 설명처럼 대체 언제 이 길이 끝이 날까 싶은 바로 그 순간. 풀숲 너머에 어떤 시커먼 형체가 보였다.

    이제는 해도 져버려 더는 베일 너머로 윤곽을 식별할 수 없어, 레그리아는 그 덩어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용인가?

    거대한 덩치를 웅크린 채 잠든 짐승 같기도 한데.

    “여기가 진짜 툼룬이다. 신성의 동굴. 이 푸른 초원에 첫 사람이 태어난 곳.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 한다.”

    아, 저 앞에 있는 게 동굴이구나.

    툼룬을 신성하게 여기는 초원인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방인인 레그리아로서는 도저히 성스럽게 느껴지질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지금 거대하게 벌린 누군가의 입으로 기어들어 가 식도를 타고 느릿느릿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용이 그녀를 통째로 삼키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면 너무 비약적인가.

    ‘하지만 정말 그런 착각이 들어.’

    폐소공포증이 있다면 이 좁은 길을 결코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쩍 벌어진 입구를 지나자마자 나온 길은 위, 아래, 오른쪽, 왼쪽 할 것 없이 비좁았다.

    키 작은 노파야 쉽사리 움직였지만 그녀나 비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는 더욱더 난관일 뿐.

    “아.”

    그래도 잠시 뒤, 레그리아는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서는 것과 거의 비슷한 순간.

    레그리아는 코를 찡그렸다.

    ‘이건 무슨 냄새지?’

    어디선가 악취가 진동한다.

    고개를 들자마자 주변을 둘러본 레그리아는 동굴 저편에 사람 비슷한 것이 누워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제단 같은 넓적한 바위에 실크 한 겹을 깔고 누운 자는 살아있긴 한 건지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노파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동안, 레그리아는 마음대로 베일을 벗었다.

    갑갑해서 더는 이런 걸 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용에게 산 제물로 시집이라도 가는 듯한 느낌이 싫기도 했고.

    ‘그런데 열매는 어디에 있지?’

    동굴 안은 호화로웠다.

    동굴이라는 것만 빼면 여기저기에 금은보화가 널려 있었고 상자마다 보물이 가득했으며 거미줄 대신 비단이 온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등불이 벽면에 달려 빛을 발하고, 거기에도 꼭 보석으로 된 목걸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공간을 장식했다.

    부유함이 무엇인지 잘 아는 레그리아로서도 이 안의 광경은 질릴 정도다.

    대체 무엇을 위해 ‘돈’이라는 개념이 무용한 이곳에서 저렇듯 재화를 쌓아 둔 걸까.

    저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

    - 드디어. 드디어 왔네!

    잠시 뒤.

    늘어진 채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알-누히람의 어머니라던 노파가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 너무 반가워. 보고 싶었어!

    그 기묘한 광경에 레그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뒤로 물러섰다.

    상황을 살피던 비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레그리아를 등 뒤에 숨기자 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 당장 꺼져. 나와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지 마.

    그림자가 진 곳에서 벗어난 놈은 몇 걸음 더 다가와 비칸의 뒤, 그녀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에 레그리아는 비로소 저를 괴롭히고 통제하던 자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용?’

    반은 인간. 하지만 또 다른 반은 두꺼운 외피로 덮여 있다.

    이마에는 뿔이 길게 자랐고, 흰자위가 아닌 검은자위에 붉은 동공이 자리했다.

    표정은 천진난만하고 머리칼은 길어 땅까지 닿았으며 어딘가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기색 또한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도 오래 묵은 이무기를 보는 것처럼 시선만 마주해도 목구멍에서 신물이 솟았다.

    봐서는 안 될 것.

    부정한 존재.

    썩어 버린 몸뚱이를 이끌고 버티고 있는 노괴.

    레그리아가 마주한 용은 그러했다.

    - 감히 신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하지만 오늘은 용서해 줄게. 기분이 몹시 좋거든.

    용의 목소리가 동굴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비칸은 어쩐지 몹시 경계하는 기색이었는데, 놈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던 그가 그녀를 향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것은 반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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