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34)

117화

“납득할 수 없다.”

비칸에게서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위압감이 새어 나왔다.

뭔가 그 의식을 행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장 알맞은 날을 골라 치러야 하는 것이 의식이 아니던가. 이렇게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어찌 오늘 바로 툼룬까지 간단 말인가.”

“그것은 제가 전달하는 말이 아닙니다.”

방금 깨달은 내용이 너무 어질어질해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동안 비칸과 루카는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루카라는 사람은 알-누히람의 어머니 중 어머니라는 저 노파의 심복인 듯 보였다.

비칸의 위세에 밀리면서도 끝까지 할 말을 하는 걸 보아 하니.

그런데 노파 쪽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입에 풀이라도 붙었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주름진 입술 사이가 이상했다.

‘꿰매어져 있어?’

저게 뭐야?

흠칫 놀란 레그리아를 향해 노파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허나 그 눈엔 백태가 끼어 있다.

노파는 앞을 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 부족 내에서 지내려면 알-마하카는 반드시 의식을 치러야만 한다!

그때였다.

노파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까랑까랑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날개를 접고 있던 박쥐 떼가 한 번에 날아오르듯 노파의 ‘목소리’는 웅장했고 날카로웠으며 징그럽기까지 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 들었는지 어린지조차 분간이 안 된다.

그저 노파의 의지는 주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날아와 유리 조각처럼 콱 박혀들 뿐.

- 싫다면 지금 나가라. 누구도 잡지 않는다!

“어머니 중 어머니여!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의식을 거부하는 자는 우리 중 하나가 될 수 없다! 의식에 가장 알맞은 날짜도, 시간도 내가 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초원도 사람 사는 곳이라지만 이렇게 온 첫날부터 이럴 줄이야.

레그리아는 헛웃음을 머금었다가 이내 몸을 떨며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에화가 한 말이 옳구나.

이곳에서도 강요는 계속된다.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권력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을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가장 안전할 수 있다.

그녀가 느끼기엔 그저 이상한 노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이 이곳에선 누군가를 벌벌 떨게 만드는 권력자다.

벨리그레엄에서는 통하지 않을 힘이 이곳에서는 존중을 받는다. 나아가 공포 어린 존경까지 받는 듯 보였다.

만약 자신이 황태자비라는 지위로 지내보지 못했더라면 어쩌면 저 말에 복종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랄까.

레그리아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섬기는 신이 없다.

제 인생에서 믿는 건 오직 스스로뿐.

그러니 레그리아는 저 노파의 권위에 굴종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을… 강요하는 게, 초원의 방식인가 봐.”

“할리카. 네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그녀의 허리를 안은 비칸의 팔뚝에 힘이 단단하게 들어갔다. 슬쩍 올려다보니 그의 턱 역시 매섭게 굳어 있었다.

- 지금 신의 명을 거부하는 것이냐!

“제 반려될 여인입니다. 그런 식으로 함부로 다루지 마십시오.”

- 괘씸하구나.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너 역시 제명하겠다!

“그리하십시오. 누구도 할리카가 원치 않은 걸 억지로 시킬 수 없으니.”

막사라 불러야 할까. 천막집이라 해야 할까.

여하튼 부실해 보이는 이 공간에 분노의 열기가 들어찼다.

비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제 새끼가 있는 동굴을 몸으로 막은 채 웅크린 곰처럼, 목을 낮게 울려 으르렁거리며 위협했다.

아무도 그녀를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처럼.

“정신 차리세요, 비칸. 당신의 반려가 소중한 건 알겠지만 최고 전사라는 명예를 버릴 셈인가요?”

“그럴 것이다.”

“말 조심해서 하세요. 영예를 버리는 순간 당신은 모든 초원인에게 평생 쫓기게 될 겁니다.”

굳이 벨리그레엄어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건 그녀더러 들으라 하는 것이겠지.

비칸은 이런 상황이 닥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 역시 몰랐다.

이렇게 억지로, 마치 미친 것처럼 의식을 치르라 강요할… 줄은?

‘설마… 내 몸을 통제하던 그 힘이 저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노파의 의식 발현 역시 그것과 비슷했다.

머릿속을 그악스레 쥐어 잡아 뜯는 듯한 감각. 상대를 복종시키려는 강력한 의지. 주술과도 같은 속박 등등.

레그리아는 눈가를 찡그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어. 너를 만나러 갈 테니 협박은 거둬.”

“지금 누구에게….”

“하지만 만나러 간다고 했지, 의식을 치르겠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녀가 도망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갑자기 발끝에서부터 감각이 돌아왔다.

멈춰 있던 혈류가 핑 돌기 시작하는 것처럼 온몸이 뜨끈해진다.

어리둥절해하던 루카와 비칸은 다시 조용해진 노파를 돌아보며 의구심을 드러냈다.

“신께서 말씀을 거두셨습니까?”

“신이, 할리카를 데려오라 한 겁니까.”

그러나 노파는 더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영혼이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을 뿐.

레그리아는 자신이 이미 용의 손아귀에 떨어졌음을 알고 있었다.

반항하면 기절하게 되어서 의식이 없어지니 더욱 위험하다.

어떻게 그 먼 거리에서 그녀를 조종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의식을 치르길 원한다면 조건이 있어.”

“그게 뭐죠?”

루카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그녀의 요구에 루카의 안색은 흙빛이 되고 말았다.

“아픈 용을 치료할 음악을 만들겠어. 대신 그걸 연주하기 위해 의식을 치를 때 이 피리를 가지고 갈 거야. 더불어서, 그 열매의 독점 유통 권리를 로에르멜 공작에게 주길 원해.”

“뭐라고요? 그런 건 불가합니다!”

“불가할지 아닐지는 용에게 가서 물어봐.”

로에르멜 공작은 안 될 것을 달라고 하지는 않을 사람이다.

분명 되니까 그 권리를 받아내라 한 거겠지.

그 말을 따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 레그리아가 그 조건을 내건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방금 대충 흘려들은 것 중에 목욕재계를 하고 이들이 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때 비칸이 준 피리를 빼앗길 것 같은데 레그리아는 이걸 가지고 가고 싶었다.

‘정말 원하는 생각은 숨기고, 다른 생각을 겹겹이 쌓아 올려 감추고. 겉을 둘러싼 생각이 진짜 내 생각인 것처럼 스스로를 세뇌하여 연기한다.’

고마워요, 모스그라토 대공비님.

당신에게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네요.

- 뭐지? 너, 뭘 하려는 거냐?

용의 목소리가 또 울려댔다.

의심을 잔뜩 품은 채 고개를 기웃거려대는 이게 무슨 신이라고.

라히크만큼도 오만하질 못한데.

“내 조건을 모두 들어주지 않을 거라면, 비칸. 나를 데리고 즉시 여기를 떠나 줘.”

용은 전능하지 않다.

그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니 승부수를 던질 만했고, 용은…….

끝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의식 준비가 빠르게 시작되었다.

* * *

“자, 다 됐다!”

“어쩜. 너무 예뻐요.”

“이제 베일을 씌울 차례야.”

거동할 수 있게 된 레그리아는 여인네들과 함께 은밀한 샘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그런 뒤에는 알-마하카들에게 둘러싸여 의식에 관한 갖가지 설명을 들었다.

“아니,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내에 작곡을 하다니!”

“대단해요. 게다가 듣기도 좋아.”

화장을 하기 전, 레그리아는 알-누히람들이 보는 앞에서 피리를 불었다.

비칸이 정성껏 만든 피리는 소리가 잘 났고 덕분에 레그리아는 여러 사람들에게 반짝거리는 눈빛을 받게 되었다.

“어우, 정말 부러워. 비칸을 노린 사람들이 진짜 많았거든.”

“맞아요. 하지만 비칸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알고 보니 피리를 이미 준 사람이 있었다니! 엉큼해!”

그네들의 말에 의하면 피리란 정인에게 주는 선물인 모양이었다.

죽으면 무덤에 반드시 함께 넣어 주어야 하고 그게 백년해로를 했다는 증거라고 하던가.

‘어쩐지, 아까 내가 피리를 부는 걸 보면서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솔직히 아까는 감동이기도 했다.

초원 사람들은 물건이나 집 같은 걸 소유하지는 않되 오직 명예만은 목숨처럼 여긴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고 전사라는 그 어마어마한 광휘를 내려놓고 그녀와 함께 도망치며 살겠다니.

비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에 비하면 그깟 영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아까 말이야, 비칸.”

“그래.”

“왜 그런 말을 했어. 나는 똑같이 해 주지 못할 텐데.”

툼룬으로 가기 직전.

레그리아는 비칸에게 말을 걸었다.

비칸은 그녀가 곧 탈 흰 말의 갈기를 정돈하고 있었는데, 그 단조로운 반복 동작 속에도 정성이 엿보였다.

“꼭 같은 것을 원하여 마음을 주는 사내가 어디 있겠나.”

음, 있긴 한데. 에화라고.

“나는 네가 절뚝여도 좋고, 뛰어다닐 때도 좋다. 네 모든 걸음에 내가 맞추면 되니. 그러니 넌 그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라.”

그 모든 길에 내가 있을 것이다.

비칸의 속삭임은 영혼 어귀가 떨릴 정도로, 그렇게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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