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34)
  • 116화

    레그리아는 정말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이 부산스러운 소음 속엔 분명 아이들의 목소리가 있기는 했다.

    아까 꼬마들을 보기도 했고.

    하지만 엄마라니?

    알-마하카가 엄마라고?

    “아이, 낳으면, 죽….”

    지나치게 놀란 게 이유일까. 한순간 입이 트였다. 동시에 생각이 고스란히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헉하고 숨을 들이켰으나 여자들의 반응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아아, 애 낳으면 죽는 거? 여기선 괜찮아. 그보다 물 좀 마셔요.”

    “맞아, 괜찮아. 괜찮으려고 여기로 왔지. 우린 그래도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었거든요.”

    “이런데 떨어지게 됐지만 어쩌겠어. 여기서도 뭐, 사랑하고 살아야죠. 그러다 보면 애도 생기고.”

    조심스레 그녀를 받쳐 안은 비칸이 여자들이 건네주는 물을 조금씩 먹여주었다.

    까슬거리는 목 안이 진정된 레그리아는 어떤 여자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놀란 눈을 고정했다.

    “엄마, 형이 나 또 때렸어!”

    “아이고, 왜들 그리 싸워대!”

    형?

    자식이 둘인 건가?

    하지만 하나를 낳으면 죽는데.

    자신이 알던 것과 달라진 정보에 레그리아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들이 처음부터 초원인에 빙의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구나 했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 벨리그레엄인에 빙의한 거잖아.

    ‘그런데 왜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거지?’

    가슴 속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마치 북이 울리듯이.

    초원이 숨기고 있는 것. 초원이 독점하고 있는 것.

    그게 설마…….

    “여하튼, 나머지 설명은 루카가 해 줄 거예요!”

    “엄마아아!”

    “알겠어, 알겠어. 나가자. 다들 이제 그만 일터로 돌아갑시다. 나머지는 루카가 설명하겠지.”

    벨리그레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겨운 광경이다.

    최소한 그녀가 지내던 곳에서는 저런 장면은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멍하니 굳어 있는 레그리아에게 어떤 여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루카예요. 궁금한 게 많죠?”

    “……네.”

    “아직 당신은 의식을 치르지 않아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에요. 그래도 알-누히람의 어머니 중 어머니가 딱 하나 정도는 대답을 해 주라고 하시네요.”

    레그리아의 흔들리는 시선이 아까부터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노파에게로 옮겨졌다.

    물어볼 것은 어차피 단 하나.

    하나뿐이었다.

    라히크가 나를 기만한 것이, 정말로 아닌가?

    “아이를 낳…아도 죽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요.”

    목이 탁하게 쉬어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그간 쌓아 왔던 오해와 편견이 쏟아져 내리는 게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레그리아는 라히크와 몸을 비빌 때 역겨웠다.

    그가 제게 씨를 뿌리고 싶어 한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그녀가 죽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배를 갈라 애를 빼내겠지.

    한번 극단적으로 치달은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지 못했고 그냥 그렇게 켜켜이 쌓여만 갔다.

    틀림없이 그럴 것으로만 믿었다.

    “다 들었다. 신성인이 출산 이후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왜 초원 연합국과 전쟁을 벌였는지도 알겠군.”

    “……여기서 초원이 왜….”

    “너의 그 다정하기 짝이 없는 전사가 알려 주지 않던가? 저들이 무엇을 독점하기 위해 싸우는지.”

    라히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혹, 라히크는 이 사실을 모두 알았나?

    “좋은 질문이네요. 우리 샤-히메룸에는 기적과 축복의 힘이 담긴 열매가 있습니다. 그걸 먹으면 그 어느 알-마하카도 죽지 않아요. 둘이건 셋이건 사랑하는 전사와 맺어져 얼마든지 차세대 전사를 낳을 수 있지요.”

    아.

    그간 가져 왔던 의문 중 하나가 풀렸다.

    벨리그레엄과 초원 연합국은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까지 정복해 밀어버리지 못했나 싶었더니.

    ‘열매 덕분에 초원은 전사의 숫자가 많은 거야.’

    벨리그레엄이 한 명의 신성 기사가 10만 명의 군사를 이끈다면, 초원은 대군을 상대할 50명의 전사를 보낼 수 있다.

    10만 명이라 해봤자 모두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맹수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초원의 전사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초원의 전사는 한 명당 적으면 두 마리에서, 재능이 뛰어나다면 스무 마리 넘는 동물을 부릴 수 있으니까.

    ‘라히크. 당신은 그럼… 이 모든 것을 알아서 열매를 원했던 건가?’

    레그리아는 그 오만한 남자의 속내를 읽어 보려 애를 썼다.

    그 남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황태자라는 어떤 종족에 가까웠다.

    무너지지 않는, 항시 남들보다 우월한. 그리하여 반드시 타인의 위에 서서 만민을 굽어살펴야 살 수 있는 족속.

    레그리아는 그가 싫었지만 라히크가 반듯한 황태자가 되기 위하여 기울이는 노력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가 제위에 오른 뒤 썩어 있는 황실을 어떻게 개혁하고자 하는지도 알았다.

    알지만 그게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황태자비라는 자리에 앉히려는 걸 거부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라히크는 작게는 신성인을 위해서. 크게는 이 나라 전체를 위해 열매를 구하려 한 걸지도 몰라.’

    아리툼 정복이 목표인 척했지만 사실은 초원에서 그 열매를 구하는 게 중요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아리툼과의 전쟁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끝이 났거든.

    라히크는 초원을 정복해 열매를 얻고자 했고, 초원은 전쟁을 불사하여 열매를 지키고자 했고.

    이제야 뭔가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이맛살을 찌푸린 레그리아에게 루카가 말을 건네 왔다.

    “의식에 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레그리아는 이미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제껏 초원에서 절대 열매를 내놓지 않으려 한 거라면.’

    그건… 그건 독점이 맞다.

    열매가 초원에서만 자라고, 초원 사람들이 너무도 귀중히 여기는 건 알겠지만 그러면 벨리그레엄에 떨어진 신성인들은?

    ‘이미 죽은, 귀족 계보도에 있던 그 여자들. 계보도에조차 오르지 못했을 여자들.’

    그 수많은 사람들은?

    살 수도 있었던 거잖아.

    초원에서 일찍이 열매를 내어줬더라면 말이다.

    “자, 이건 두 눈을 가릴 천이에요. 이건 머리에 쓸 베일이고. 의식용 차림으로 툼룬에 들어가야 해요. 의식을 거부하면 여기서 지내실 수 없어요.”

    “…….”

    “더불어 한번 의식을 치르겠노라 받아들이시면 중간에 멈추거나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이해하셔야 해요.”

    “아아….”

    알고 있다. 이것이 정당한 원망이 아님을.

    다들 사정이 있는 거지. 각 나라마다 이익을 추구해야 하고, 비밀을 지켜야 하고.

    다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걸 내가 이해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레그리아는 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애초에 황태자비 자리에 앉는 걸 극도로 거부하게 된 이유가 ‘예정된 죽음’ 때문이지 않았나.

    지금까지 그녀는 라히크가 그녀에게 주려 했던 죽음을 피해 왔다.

    최소한 그렇게 믿어 왔다.

    하지만…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그녀를 살리려고 한 건 결국.

    라히크였다.

    그가 전쟁을 감행하고, 그가 열매를 구한 거라면.

    표드르도 아니요, 에화는 더욱 아니다.

    표드르는 그저 제 속의 기근을 채우기 위해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짝을 맺었을 뿐이었다.

    에화는… 아마 평생 속이려 했겠지.

    자신이 죽음을 즐기는 자라는 걸.

    둘 다 레그리아에게 있어서는 똑같이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들 중 누구보다도 라히크가 최악이었다.

    라히크에게는 배신감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도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군.”

    문득 그가 한 말이 하나 더 떠오른다.

    비칸도 결국 다를 것 없다는 듯 픽 웃던 얼굴도.

    거기에 겹쳐서 떠오르는 건 놋쇠 열쇠 하나였다.

    만약 라히크가 선물이라며 준 그 집에 용의 열매가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라히크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속인 적은 없다는 게 증명이 된다.

    라히크가 그녀를 죽이려 해 왔던 게 아닌, 살리려 했다는 증거였다.

    “저기, 듣고 있어요?”

    “……아뇨.”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본 라히크의 모습이 훅 떠올랐다.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듯 보였지. 폭주의 기미가 있었다. 알면서도 눈을 감았다. 듣지 않았다.

    저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기에 외면도 쉬웠다.

    하지만 그가 저를 살리려 한 거라면…….

    “의식에 관한 건 나중에 설명해도 되는 것 아닌가.”

    레그리아의 반응을 살피던 비칸이 언짢음을 담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루카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전사여. 알-누히람의 어머니 중 어머니께서 지금 알리라 하세요. 의식은 오늘 밤에 열립니다.”

    “그렇게 일찍? 어째서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신께서 그리 명하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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