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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34)
  • 115화

    * * *

    벨리그레엄의 두 황손이 마지막으로 힘을 합쳤던 것은 라히크의 나이가 여덟 살쯤의 일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아이는 그 나이부터 이미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아차린다. 누가 우위이며 누가 아래인지. 겉보기에 저보다 못할 거라 여겼던 이가 실은 훨씬 사랑받고 있다든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갖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것.

    그 사이의 간극에서 좌절하고 분노한다.

    그러므로 라히크는 저보다 어린, 제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에화를 싫어해 왔다.

    에화에게 제가 가진 빛나는 것들을 빼앗기지 않을 것임은 알았으나 마찬가지로 라히크 역시 빼앗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까슬한 턱으로 뺨을 마구 부비며 사랑한다 말해 주는 행위라거나, 부드러운 모친의 품이라거나, 배우지 않고 익히지 않아도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는 자유 같은 것들.

    그래도 에화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라히크의 열패감은 격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노력해 얻은 지식들이 에화에게는 몇 번 머리를 굴리면 금세 된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사람들이 독하게 노력하는 그를 칭찬하되 좋아하진 않는다는 걸 알기 전까지.

    그보다는 무엇이든 대충 하는 것 같고, 설렁설렁 여유롭게 하는 에화 쪽을 훨씬 예뻐한다는 것을… 그런 대화들을 엿듣기 전까지는.

    에화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애교가 많았다. 이따금 감정이 격해지면 스스로를 해치곤 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안타깝게 여겨 더욱 사랑을 주려 했다.

    반면, 라히크에게 돌아오는 말들은 거의 같았다.

    “넌 혼자서도 잘하잖느냐.”

    “황태자답게 구셔야지요.”

    “훌륭하십니다. 허나 더욱 정진하셔야 합니다. 에화 도련님은 한 달 전에 모두 뗀 내용이라 하더군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완벽주의적인 성향은 점점 더 통제광으로 변모했다.

    좀 더 완벽하게. 좀 더 위대하게.

    하찮은 것들과 같아지지 않도록.

    그렇게 에화와 스스로를 분리해 온 라히크는 ‘완벽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혐오감이 극심하였으며 그의 기준에서 ‘반려에게 미친 신성 기사’는 완벽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랬는데 내가 지금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우스운 일이다.

    삶은 희극이라 누가 말하였나.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기에 항시 겸허하라고 말한 것은 또 누구이던가.

    옛 선인들이 개 같은 일을 겪고 내뱉은 교훈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오늘까지는.

    “네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만 질질 짜고 일어서라. 레그리아가 어디로 갔을지 알고 있다.”

    강한 약을 먹고 잠들었던 에화는 오늘 오전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어느 정도 진정을 하기는 했으나 텅 비어 버린 두 눈이 여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 라히크에게는 에화가 가진 축복이 필요했다.

    어디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 축복이.

    “어디로, 갔는데.”

    “늪을 열어라. 그 뒤에 알려 주겠다.”

    “하지만 그랬다가, 나, 더 미움받으면 어떡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꼴이 실로 못 봐줄 지경이다.

    그렇다 하여 여기서 몰아붙이면 한 번에 초원에 갈 길이 사라지니 라히크는 최대한 인내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형… 레, 레그리아가, 내가 싫대. 나를 선택하지 않겠대….”

    항시 사랑만 받아온 에화는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에 예민하게 굴었다.

    모든 관심은 항상 자신에게 쏠려 있어야 하고, 누구든 자신을 좋아해 줘야 한다.

    그런 에화가 당한 첫 번째 거부가 바로 레그리아였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움직여라. 레그리아가 초원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일방적인 짝이라 하더라도, 짝이 사라진 표드르의 상태 역시 좋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폭주한 바 있기에 표드르는 두 번 폭주할 시 목숨이 위태했다.

    벨리그레엄이 자랑하는 신성 기사가 셋이나 이성을 놓는 사태만큼은 일어나서는 안 되기에 라히크는 그의 이성만큼은 붙잡으려 노력했다.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다시 찾아가도 될까? 그래도 레그리아가 안 싫어할까?”

    “가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이다.”

    같잖은 칭얼거림에 일일이 대꾸해주며 라히크는 헛숨을 들이켰다.

    역시 그의 상태 또한 불안정하다.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가 다시 밝아졌다가를 반복했다.

    3년 만에 만난 레그리아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눈앞에서 본 건 충격이 상당했다.

    이미 그녀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접촉이 오래되어 짝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에화를 달래기만 하면 초원에 가는 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잡아야겠다거나 어떻게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레그리아가 필요하다.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하듯,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 펄떡거리는 심장이 있듯.

    레그리아 없이는 더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 * *

    “으음….”

    눈앞이 가물거린다. 온몸이 천근만근이고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신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마치 이곳에 처음 왔던 그때처럼.

    ‘여기는 어디지?’

    입안이 바짝 메말라 목구멍이 따가웠다.

    힘없이 눈을 굴리자 시야에 나무 대야 같은 것이 보인다. 그 뒤에는 베이지색의 벽이, 아니, 천이 펼쳐져 있는 공간이었다.

    ‘천으로 만들어진 내부…라면. 초원에 온 건가?’

    비칸은 의식이 없는 그녀를 둘러멨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더 빠르게 내달려 초원으로 향했겠지.

    위험할 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아직까지는.

    [어? 일어났다!]

    [깨어났어! 알리러 가자!]

    그때, 천막의 입구를 걷고 들어온 꼬맹이 둘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어라 소리쳤다.

    아마 저 아이들이 어른을 불러와 주겠거니 싶어 레그리아는 차분히 기다렸다.

    꼼짝도 할 수 없는 감각은 끔찍했지만 이미 겪어 본 것이니 충격은 덜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임을 아니까.

    “할리카!”

    이윽고 나타난 것은 비칸이었다.

    하지만 혼자 온 것은 아니다.

    그의 뒤에는 수많은 초원인들이 있었다.

    동물의 이빨과 푸른 보석 같은 걸 꿰어 만든 목걸이를 차고 손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노파가 아무래도 알-누히람이겠지.

    안 물어봐도 그렇게 생겼다.

    다른 젊은 여인들의 눈초리에는 연민과 동질감이 진하게 배어있는 걸 보니 아마도 알-마하카들이다.

    그들을 차근차근 살핀 레그리아는 문득 제 손을 쥐는 온기에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다행이다….”

    비칸이 그녀의 손에 이마를 댄 채 기도하듯 무릎을 꿇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그는 정말 낮은 곳에 위치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네요.”

    “몸이 움직여지나요?”

    “혹시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예요? 그래도 걱정 마요. 알-누히람이 약을 줄 테니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여자들이 침대 주변을 둘러싸며 거리낌 없이 벨리그레엄어로 말을 걸어왔다.

    경계하는 빛도, 거부하는 분위기도 없었다.

    “참, 알-누히람의 어머니 중 어머니는 벨리그레엄어를 모르거든요. 통역을 해 줄게요.”

    그러는 당신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입조차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마하카 중 눈치가 가장 빨라 보이는 여자가 레그리아의 질문을 읽어냈다.

    “어머, 우리 수상쩍은 사람 아니에요. 우린 로에르멜에서 왔거든요.”

    로에르멜? 지금, 로에르멜이라고?

    영락없이 초원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로에르멜이라는 명칭은 레그리아를 혼란케 하기에 충분했다.

    “벨리그레엄이 지긋지긋한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여기로 보냈어요. 물론 뭐… 여기라고 살기 좋은 건 아닌데. 그래도 나는 씨받이 꼴이 되고 싶진 않았거든.”

    “!”

    “평민에게 빙의한 게 죄지, 죄야. 뭐, 가만히 있다가 우리 중에 하나를 고르러 오는 새끼랑 결혼해서 애 낳다가 죽으라고?”

    비밀을 ‘알고 있는’ 여자들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전부 천사가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이들은 여기에 있었다.

    설마, 로에르멜 공작이 영지 내에 발생하는 신성인을 빼돌려 왔나?

    “설마 로에르멜 공작님이 우리를 빼돌려 줬느냐고 생각하는 거면, 맞아요.”

    “은인이시지.”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갈 뻔했다니까, 정말.”

    여자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황청에 한 번 끌려가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를 말살당한다.

    하지만 이들은 공작이 먼저 빼냈고, 공통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벨리그레엄어를 가르친 다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려 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다.

    부러울 정도로.

    “공작님이 남자였으면 안 믿었겠지만… 애초에 남자였으면 우릴 이렇게 도와줄 생각도 안 했겠죠.”

    “공작님 덕에 나름대로 인간답게 살고 있어요.”

    “당신도 그렇게 될 거예요. 여기까지 고생해서 잘 왔어요.”

    “게다가 비칸이라니! 최고 전사의 짝이라니. 어휴, 부러워.”

    환하게 웃는 얼굴들이 낯설었다.

    어떻게 저렇게 다들 여유로운 걸까.

    어떻게 저렇게 다들, 행복해 보이는 거지?

    “엄마아!”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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