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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34)
  • 114화

    10. 열매(Frucht)

    산다는 것이 이토록 생생한 일인 줄 경험하기 전까지, 나는 내 삶의 불우함을 다 알지 못했노라.

    * * *

    비칸과 함께 초원으로 떠난 지 며칠째.

    하루하루 지날수록 레그리아는 꽃처럼 피어났다.

    쫓기는 일은 이미 해본 적 있다. 그러니 라히크든 에화든 누군가 그녀를 찾고 있을 거라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레그리아는 순간을 즐기고 기뻐하는 법을 배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더욱 충만하게 즐기는 것만이 제 삶에 대한 예의이지 않겠나.

    “저것은 큰 물소 자리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은 작은 물소 자리. 거기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발굽 자리가 있다.”

    “신기해. 새에 관련된 별자리는 없어?”

    “그건 지금 계절에 뜨지 않는다. 지금은 네 발 달린 것들의 계절이니까. 시간이 지나며 저 별들이 하늘 너머로 사라지면 그제야 다른 별들이 오는 것이다.”

    비칸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비칸이 알려 준 것이 고작 별의 이름 따위는 아니다.

    그는 순리에 대해 말했다.

    붙잡아 둘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진리. 순환하는 우주.

    에화와 함께 지낼 때 보았던 별과 지금 보는 별이 다른 이유는 단 하나.

    자유로움.

    비칸은 흘러가는 것을 잡으려 들지 않았다.

    초원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러하다고 한다.

    소유하지 않고, 탐욕하지 않고.

    어차피 그 안에서도 나쁜 사람이야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소위 문명화된 제국보다는 미친놈 비율이 낮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알아. 이런 건 그냥 내 바람일 뿐이겠지.’

    선한 사람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천국에서도 반드시 분쟁은 일어날 것이다.

    레그리아는 사람의 본성이 악함을 믿었다.

    만약 누군가가 착하다고 느껴지면 그자의 속에 깃든 악이 발휘될 마땅한 장소와 상대가 없을 뿐이지, 정말 완벽하게 선한 자가 어디에 있겠나.

    그러니 초원에 가도 실망스러운 일은 생길 것이다.

    온통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종교적인 일들로 가득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초원에 가 보고 싶었어.’

    비록 꿈속의 누군가가 불러서, 로에르멜 공작이 등을 떠밀어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면 그저 비칸과 함께 달아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녀의 탈출을 도와준 사람이니, 다시 한번 그 그리웠던 순간을 재현하고 싶었을지도.

    어느 쪽이든 레그리아는 ‘지금’ 만족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처음 느껴 보는 충만감이었다.

    “너에 대해 이미 말해 두었다, 할리카.”

    “초원의 법과 문화를 모르는 알-마하카라고 다들 싫어하는 것 아냐?”

    “아니. 모르면 배우면 된다. 익히면 되는 거다. 아직 배우는 자를 일컬어 우리는 ‘나툿’이라 부른다. 그 누구도 ‘나툿’을 욕해서는 안 되는 게 규율이다.”

    “나툿이 사실 멍청이라는 뜻은 아니지?”

    “그럴 리가.”

    명예로운 비칸만 모를 뿐, 어딘가에서는 그런 의미로 부를 것 같은데.

    피식 웃던 레그리아는 그래도 그런 단어가 있는 문화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나이와 관계없이 배울 자는 배우게 해 주는구나.

    어째서 제대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느냐는 말로 상처를 주는 대신.

    “비칸.”

    “그래.”

    “너는 나와 결혼할 거야?”

    비칸의 어깨에 기대어 그렇게 묻자 닿아 있는 피부에 움찔하고 전율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레그리아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성적인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쩌면 정신 접촉을 한 탓일지도 몰라.”

    “그러면 안 되는 것인가?”

    “응?”

    “그대가 내 짝이 되어 준다면, 그게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비칸의 음성은 진지했다.

    동시에 그의 팔뚝에 겹겹이 깃든 강인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뭔가 불만인 것처럼.

    “내가 초원에서 살려면 당신과 꼭 짝을 맺어야 하는 거야?”

    아직 초원에서 살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비칸이 좋은 것, 비칸에게 감사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니 반드시 그와 짝을 맺어야 한다면 그건 아무래도 곤란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알-마하카니까. 알-누히람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며칠간 재계를 한 뒤, 우리의 신에게 인사를 하러 가게 될 거다. 신이 네게 열매를 주면 그것을 먹으면 된다.”

    “열매?”

    “알-누히람의 어머니가 열매의 즙을 내어 네 이마에 찍으면 그때부터는 샤-히메룸의 일부이며 하나의 샤-히메룸이다.”

    비칸과 짝을 맺지 않아도 적절한 의식을 치르면 초원인으로 받아들여 준다는 뜻이구나.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열매가 중요시되고.

    ‘열매가 둘 있을 리는 없으니 공작이 말한 게 저거겠지.’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제 발등을 간지럽히는 풀을 뜯어내며 무심한 듯 속삭였다.

    “그 열매엔 이름이 있어?”

    “용의 열매라 칭한다.”

    “엄청 귀한 거겠네.”

    “그렇다.”

    “외부에 반출도 안 되겠고.”

    딱 보니 그렇다. 그걸 독점적으로 공작이 유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약속 따위는 지키지 않아도 이제 더는 상관없으리라.

    원하던 탈출은 손에 넣었고 공작을 두 번 볼 일도 없을 터였다.

    공작이 직접 초원에 오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제게 그럴 능력 따위는 없다고 말해도 될 일이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리는 건 그저 양심이라는 게 아직 그녀의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것 따위, 없을수록 살기 편한데.

    “일전에 당신이 들려줬던 신화, 기억나. 용이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지.”

    “그래.”

    “용을 위한 노래를 작곡하는 사람도 있어?”

    “알-누히람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알-마하카는 할 수 없고?”

    “본래는 불가하나… 의식 때 직접 고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

    말꼬리를 늘이던 레그리아는 이내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웠다.

    지금은 도착이 우선이니까 더 생각하지 말자.

    ‘그 이상한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아. 내가 초원에 가기를 종용하는 듯했는데… 초원에 가고 있으니 그런 건가?’

    스르르 미끄러지듯 내려가 비칸의 단단한 허벅지를 베고 누운 레그리아는 초원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일을 세었다.

    앞으로 사흘.

    ‘결행한다면….’

    그것은 머릿속을 조종한다. 그것은 몸을 조종한다.

    그러니 레그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뿐.

    다행히 비칸은 그럴 수 있게 해 주는 최고의 상대였다.

    그리고 그날 새벽.

    조용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레그리아는 홀로 일어섰다.

    며칠 내내 주변을 경계하느라 비칸은 많이 피곤해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래도 만약 깨어나 붙잡는다면 할 말은 있었다.

    “어디 가나.”

    “…화장실.”

    졸음기 어린 눈을 깜빡이던 비칸은 그녀의 답에 안심했는지 다시 잠이 들었다.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릴까 싶어 조심스레 은신처를 빠져나온 레그리아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거슬러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은 상태로.

    -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대꾸하지 않는다. 답하지 않는다.

    -돌아간들 네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역시나. 며칠간 얌전하던 목소리는 그녀가 초원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자 다시 울려왔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일전에 들었던 것보다도 훨씬 큰 목소리였다.

    -내게 와. 네가 쉴 곳은 내 안뿐이야.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거지? 그러니까 누구도 널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잖아. 부모에게서도 버림받은 너!

    알게 된 사실들.

    첫째, 목소리는 말이 많다.

    둘째, 목소리는 그녀를 제 영역 안에 두고자 한다.

    셋째, 목소리는… 그녀의 육신을 지배할 수 있다. 초원에서 떠나려고 하면.

    레그리아는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굳어 버린 두 발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매번 무언가에게서 달아나는 삶이었다.

    그걸 못하게 막으니 차라리 고맙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할리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칸이 그녀를 찾아왔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그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왜 여기까지밖에 가지 못했나.”

    “누가 못 가게 막아서.”

    “그게 나라면 좋을 텐데.”

    역시, 거짓말이 티가 났나 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칸은 그녀를 보내주었다. 잠든 척하면서.

    ‘정말 좋은 남자야.’

    아마 비칸의 짝은 몹시 행복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비칸의 짝이 된다면…….

    “윽.”

    “할리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두통이 심해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머리가 아파 와 헛구역질마저 난다.

    휘청거리다 쓰러지는 그녀의 온몸을 울려대는 목소리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 용납 못해. 넌 내 거야!

    욕망으로 들어찬 음성이 레그리아의 고막을 소름 끼치게 긁어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레그리아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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