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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134)
  • 113화

    확실하다고?

    믿을 수 없다. 신뢰할 수 없었다.

    본디 저리 확언하는 것일수록 거짓일 확률이 높지 않던가.

    허나 공작은 너무도 태연했고 우아하게 앉은 그 어디에서도 거짓의 기미는 비치지 않았다.

    적이라면 가장 위험할 사람.

    긴장하며 공작을 살피던 레그리아는 문득, 의아해졌다.

    ‘로에르멜 공작은 저런 정보를 어떻게 다 아는 거지?’

    꼭, 용을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레그리아는 살짝 입을 벌렸다.

    이것은 단순한 의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물어본 적도, 누구에게 들어 본 적 없는 것.

    디트리히가 쥐여 준 편지에조차 적혀 있지 않았던 정보다.

    - 아, 그거 재미있는 질문이네. 좋아, 허락할 테니 물어봐.

    그녀의 머릿속을 읽은 목소리가 낄낄거린다.

    그와 동시에, 제약에서 훅 풀려난 레그리아는 헛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처녀적 성은 뭔가요?”

    당신은 어느 가문 출신이지?

    로에르멜 공작과 결혼을 할 정도면 비슷하게 강력한 가문이어야 마땅했다.

    헌데 지금까지 그 가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양쪽의 조부모가 다 일찍이 숨을 거둔 게 아니라면 손녀가 신성인이 되었는데 한 번쯤은 나타날 만도 하지 않나.

    그런데 슈만 역시도 그녀에게 조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다들 위대한 로에르멜 공작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

    철혈의 여인, 두려운 존재, 심장이 없는 사자. 강하고 똑똑한 권력자. 신성 기사들과 어깨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사람.

    그러나 이 사람을 낳은 그 누군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대답할 의무는 없겠지. 나는 지금 네게 협상을 청하는 게 아니란다. 협박을 하는 거지.”

    공작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데 능했다.

    여유롭고 느긋하였으며 절박하지 않다.

    초조하고 간절하고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 아예 새로운 땅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건 그녀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디트리히의 경고는 무실하였다.

    이런저런 의문이 든다고 한들, 이런 의심이 어떤 쓸모가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지금 이 순간에 레그리아가 공작을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꿀 바른 유혹이 지나치게 달았다.

    잇몸이 아릴 정도로.

    “열매의 독점 유통권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자세히 말해 줘요.”

    “샤-히메룸에 도달하면 모든 알-누히람의 어머니를 찾아라. 이름은 아스코샤탄이다.”

    “그리고요?”

    “용을 낫게 할 음악을 만들겠다고 하고, 용이 나으면 열매에 관한 유통 권리를 내게 독점으로 넘기겠다고 말해. 그들이 섬기는 용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고 해라.”

    아스코샤탄.

    그 이름을 입속으로 외던 레그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열매란 게 대체 뭐기에 공작이 이토록 상세히 알고 원하는 걸까.

    뭔가 아주, 아주 중요한 것 같은데.

    핵심 정보에 대해서 공작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 열매가 당신에게 많은 이득을 주나 보군요. 어떻게 해서든 가지려는 걸 보니.”

    “딸을 잘 키워 좋구나. 덕분에 똑똑한 신성인이 깃들었으니.”

    소름 끼치게 무심한 대답이다. 비트리체가 저 말을 듣지 못해서 다행일 정도로.

    입술을 잘근거리던 레그리아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이곳에서 정리해야 할 모든 관계는 정리를 하지 않았던가.

    라히크도, 에화도, 표드르도.

    이제 그녀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없었다.

    또한, 그들의 감시가 약해진 지금이 유일한 탈출 기회였다.

    “가겠어요. 나를 초원으로 보내 줘요.”

    “그래. 그러면 바깥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전사를 불러야겠구나.”

    “!”

    “피리를 받았지 않으냐.”

    어떻게 알았지?

    공작이 실크 햇을 다시 쓰며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휘파람을 불어 말을 불러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그리아는 자꾸만 위화감이 들어 멈칫했다.

    그녀는 본의는 아니었으되 신성 기사들을 많이 보았고 그들에게 익숙했다.

    신성 기사는 보통 사람과 확실히 달랐다.

    날렵하고 단단한 근육질의 체형.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 소리 없는 발걸음.

    그 모든 게 합쳐져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로에르멜 공작에게서도 그런 분위기가 나는 거지?’

    혼란스럽다.

    우선 피리를 불어 비칸을 부른 레그리아는 순식간에 창틀에 올라앉은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저 말을 타고 이곳을 빠져나가라. 초원까지 가는 길 내내 필요한 식량과 물도 따로 챙겨 두었으니 재빠르게 움직이면 될 거다. 나는 이곳에서 황태자가 빠르게 움직일 수 없도록 막아 주겠다.”

    “잠시만요. 내가 차후에… 독점 유통권을 당신에게 주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건가요?”

    “로에르멜은 샤-히메룸과 가깝지. 내가 알아서 갈 테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할 것 없다.”

    잠시, 뭐라고?

    태양이 전사들의 영혼을 이끄는 땅.

    샤-히메룸.

    초원국이란 명칭보다 훨씬 국격이 올라가는 단어.

    하지만 벨리그레엄 인은 샤-히메룸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 리가 없다. 그렇게 부르지도 않는다.

    초원을 샤-히메룸이라 칭하는 건 오직 초원인들 뿐.

    [네게 태양의 축복이 임하기를.]

    설마.

    비칸에게 안겨 저택을 떠나는 그녀에게 던진 공작의 마지막 한마디는 분명 초원어였다.

    비칸 역시 살짝 놀란 기색이었으나 우리에겐 로에르멜 공작의 출신을 추궁해야 할 이유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비칸이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무어라 속삭였다. 동시에 말이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이제야말로 벨리그레엄을 떠난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땅으로, 레그리아는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창가에 서서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던 로에르멜 공작. 아나코샤 로에르멜은 픽 웃으며 입매를 비틀었다.

    본디 아나코샤는 승리를 쉽게 자축하지는 않는 편이다.

    적의 목을 꺾어 창을 박아 넣기 전까지. 그 피로 제 몸을 적시기 전까지는 하부로 이겼노라 외치지 않는다.

    허나 오늘만큼은 기뻐해도 되리라.

    ‘드디어 모든 패가 갖추어졌다.’

    툭.

    아나코샤의 머릿속에서 체스 말이 킹을 향해 한 걸음 크게 움직였다.

    체크메이트까지 남은 건 앞으로 세 칸.

    ‘곧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이뤄지리니.’

    레그리아는 반드시 초원에 가야만 한다.

    그래야 레그리아에게 꿰여 버린 사내들이 줄줄이 따라갈 테니까.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싸우게 되어 있다.

    현재 초원을 지배하고 있는 자.

    가짜 신.

    신성도 힘도 무엇도 없는 반룡과 전투를 치르게 되겠지.

    “그런데 레그리아 님의 영혼이 그 몸에 안 계시면 우리는 누구를 섬겨야 하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헷갈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아나코샤는 빠르게 몸을 감추었다.

    “어?”

    “왜 그래?”

    “방금… 아냐, 잘못 봤나 봐.”

    창틀을 밟고 순식간에 지붕 위까지 오른 그녀는 실로 날렵했다.

    마치 신성 기사가 그러하듯이.

    “샤-히메룸의 거룩한 전사들에게 축복을.”

    세상에 저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없기를 바랐던 어린 시절의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나코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

    용에게서의 해방이었다.

    * * *

    공기가 무겁게 짓누르는 침실 안.

    여전히 의식이 없는 지젤을 앞에 두고 라히크는 침묵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의 몸뚱이에 레그리아의 영혼이 들어갔다.

    검을 들어 갈라 빼낼 수만 있었더라면 당장 그리했을 텐데.

    파쥬 현상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지젤을 데리고 온 것은 그 무표정한 낯에 아주 약간의 질투라도 감돌기를 바라서였다.

    지나친 바람이었던 모양이지만.

    “…….”

    그런데 정말로, 파쥬가 일어났나?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라히크는 아까 있었던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복기했다.

    천천히, 눈길 하나 호흡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전부.

    그러던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젤 로에르멜이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지껄일 수 있었던가?’

    분명 처음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 좋던 기세도 독방에 갇힌 뒤로 한풀 꺾이지 않았나.

    말을 걸어 주는 상대도, 들어주는 상대도 없이 오랫동안 혼자 있게 되자 지젤은 버릇이라는 걸 배웠다.

    공포를 체득한 것이다.

    ‘헌데.’

    라히크의 미간이 점점 더 좁혀졌다.

    날카로이 치뜬 눈매가 의심하고, 간파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어이없는 결론 하나에 도달했을 때였다.

    “전하, 레그리아 님이 방금 말을 타고 영지를 빠져나가셨습니다! 야만족이 함께였습니다!”

    “!”

    속았다!

    의심이 현실이 된 순간, 라히크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잡아야 한다.

    이렇게 보내지 않겠다. 놓치지 않겠다.

    나는 너를……!

    허나 레그리아는 이미 흔적조차 없다.

    이번에는 뒤늦게나마 달려가 잡아채지도 못할 만큼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 사실을 완연히 깨달음과 동시에 무릎이 휘청였다.

    하늘 위에 서 있다 자신하던 그였으나 지금은 더러운 흙바닥에 가까울 뿐.

    “……네가 야만의 땅에 속하겠다면 나 역시 그러겠다.”

    잠시 뒤.

    라히크는 스산히 중얼거리며 몸을 폈다.

    그가 가야 할 곳은 단 하나.

    레그리아의 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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