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34)
  • 112화

    “윽…!”

    마지막 속삭임은 마치 주박처럼 그녀를 얽매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어떤 방법을 쓰면 되는지.

    그런 정보들이 갑작스레 머릿속에 밀어 넣어졌다.

    ‘용? 용을 찾으라고?’

    나는 용을 찾기 위해 초원에 가고자 하는 게 아닌데…!

    허나 거부할 수가 없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용을 찾는 것이 그녀의 어떤 대단한 의무, 삶의 목적, 이 고통의 세상에 태어나야만 했던 이유처럼 느껴진다.

    억지로 밀어 넣어지는 감정은 역했고 머릿속을 꽉 얽매는 듯한 기분은 더러웠다.

    하지만 거부하면 할수록 수렁에 잠기는 느낌이다. 벗어날 수 없다. 견딜 수도 없었지만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너는 내 거야.”

    오싹한 한마디가 거미처럼 등골을 타고 오른다. 그녀의 입에 산 채로 거미줄을 치고 손목을 붙잡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듯해 두려웠다.

    “잊지 마. 넌 나를 위해 존재해.”

    형체 없는 희뿌연 것이 그녀의 숨통을 옥죄었다.

    그녀의 자유성을 말살하고 끝끝내 굴복시키려 한다.

    발버둥을 치지만 이 ‘존재’에게 만큼은 이길 수 없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레그리아는 꿈에서 내쫓기듯 깨어났다.

    밭은 호흡을 내쉬며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녀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긴, 여기는.”

    익숙한 곳이다. 로에르멜 공작저의 침실이었다.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깐.

    - 너는 나를 찾아오게 될 거야.

    삐이이이.

    이명이 들린다. 귀에 맴도는 목소리는 낙인처럼 홧홧했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하던 레그리아의 동공이 서서히 비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폐허가 된 눈으로 일어선 그녀는 크게 호흡을 머금은 뒤, 그대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레그리아!”

    쾅!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금안의 사내가 들이닥쳤다. 저를 안아 드는 품을 거부하며 레그리아는 이내 훌쩍이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그만해.’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

    그녀의 의식이 원하는 게 아닌데 육신은 멋대로 눈물을 짜내고 어리광을 부리며 칭얼거렸다.

    그래, 지금 그녀는 연기를 하고 있다.

    마치 ‘지젤’이 된 것처럼.

    “너는 레그리아가 아니다.”

    “악!”

    라히크가 벌레 보듯 저를 떠미는 바람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은 레그리아는 질질 울며 동시에 웃었다.

    흡사 미쳐 버린 듯 깔깔거린 그녀는 이내 싸늘히 정색했다.

    “언니랑 몸이 바뀌었네? 이거 어쩌면 좋아?”

    “너.”

    “아이, 기뻐라. 이제 이 몸, 내가 멋대로 할 수 있는 거잖아?”

    맹세컨대 레그리아는 자신이 이토록 연기를 잘할 줄 몰랐다.

    머릿속에 주입된 대사를 그대로 읊고 동작을 흉내 낸다. 그러자 라히크는 너무도 쉽게 그녀가 ‘지젤’이라고 믿었다.

    하긴, 실로 지젤이 할 법한 행동과 말투이기는 했다.

    “더러운 것. 너 따위가 그 몸을 차지하게 둘 것 같으냐.”

    라히크의 시선에 경멸이 조각조각 박혀 쏟아졌다. 눈빛으로 죽일 수 있으면 진작 죽였을 거라는 듯이.

    그의 저런 눈길은 처음이라 속으로는 놀랐으나 몸은 여전히 멋대로 움직였다.

    “엄마! 엄마아아아!!!”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자 라히크의 눈치를 보느라 들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의사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사제가 기도를 올렸다. 하녀들이 이마며 손을 닦아주는 동안 라히크는 아예 나가 버렸다.

    아마 지젤에게 간 거겠지.

    “우선 몸에 큰 문제는 없으십니다. 하지만 파쥬라는 현상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미지수이니… 지금은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응.”

    “로에르멜 공작님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잠시 계십시오.”

    와글대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하녀들도 대충 시중을 들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레그리아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됐구나, 동생아.’

    이제 네가 황태자비란다.

    라히크를 상대로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 알지? 시간이 없어. 지젤이 깨어나면 라히크는 진상을 파악할 거야.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며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이 목소리가 알려주는 대로 따른다면 분명 초원에 갈 수 있겠지.

    그리하여 용을 만난다면… 그런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용이라는 존재가 갑작스레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비칸은 어디에 있지? 이미 초원에 돌아갔을까?’

    혼자 남겨진 레그리아는 창가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한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오며 머리칼을 흩날린다.

    잠시 크게 숨을 몰아쉬던 레그리아는 흔들거리는 나뭇가지 속, 어떤 인영을 발견했다.

    비칸이다.

    그는 그녀가 있는 곳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칸!’

    입을 뻐끔거려 보지만 어떤 소리도 말이 되어 토해지지 않는다.

    허나 그라면 입 모양으로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하지만 조종당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려야 할까.’

    그때였다.

    “건강해 보이는군.”

    낯선 음성이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서자 거기에는… 철혈의 여인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나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얼굴.

    레그리아 로에르멜과 너무나 닮았으니까.

    아비 없이 만든 자식이기라도 하다는 듯 레그리아는 로에르멜 공작을 완전히 빼닮았다.

    “그래서, 네가 지젤이라고. 아니면, 지젤인 척하고 있는 레그리아인가.”

    “!”

    “반응이 재미있는 걸 보니 역시 후자인 모양인데. 사내들이란 영 멍청한 족속이지 않으냐.”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공작은 징이 박힌 부츠를 신었고, 각이 빳빳하게 선 수트를 입었으며 조끼에는 시계 줄이 달려 있었다.

    세련된 차림은 공작의 나이를 잊게 하고 당당하게 펴진 어깨와 꼿꼿한 자세는 앞에 선 자를 위축시키기에 모자람 없다.

    쓰고 있던 실크 햇을 벗어 테이블에 던진 공작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파의 상석에 앉았다.

    태어나 그 자리 외엔 앉아본 적도 없다는 듯이.

    “앉거라. 이야기를 좀 나누자꾸나.”

    “떠날 길을 찾고 있어요.”

    “그래, 안다. 네 상황쯤은. 마지막으로 가 볼 곳은 초원이겠지.”

    “그걸 어떻게….”

    “안다고 하지 않았니. 본디 신성인은 저와 가장 비슷한 통로인을 골라 강림하는 법이니까. 내 딸은 나를 많이 닮았고, 그러하니 너의 본질 역시 나와 같다.”

    로에르멜 공작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을 해 본 적이 있기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 공작은 ‘어머니’의 얼굴을 한 적 없었다.

    모정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은 탓일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레그리아의 눈에 비치는 공작은 부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간 낭비는 질색이니 본론만 말하지. 나는 너를 초원으로 보내줄 수 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빼돌려 나갈 수도 있지.”

    “!”

    “지젤인 척 엉성한 연기를 펼쳤던데, 황태자는 물론이고 모스그라토 공자 역시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라 들키지 않은 것뿐이다. 지젤이 깨어나면 다들 상황을 파악할 테지.”

    날카로운 지적이다.

    상황을 명확하게 분석하고 대처 방법을 꺼내놓는 공작은 실로 든든하여 믿을 수 있게 느껴졌다.

    저런 화술과 분위기를 가졌기에 디트리히가 조심하라 한 거겠지.

    하나 거절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생각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것.

    육신은 여전히 ‘누군가’의 지배하에 있다.

    “나는 너를 초원에 보내주는 대신 어떤 열매의 독점 유통권을 원한다. 그걸 내게 가져오도록 해.”

    “어떤 열매인가요?”

    “지금 알 것 없다. 어차피 초원에 도착하면 모두 알게 될 테니.”

    - 그건 내 열매야.

    공작의 말과 동시에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 그건 내가 숨을 불어넣어 키워내지. 하지만 지금 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어. 나는 너무 쇠약해져 버렸어. 모두 네가 없기 때문이야.

    “듣자 하니 작곡에 재능이 있다지? 그 열매는 좋은 음악을 먹고 자란다. 가서 나무 옆에서 연주라도 해. 열매의 숫자가 늘어나면 초원인들도 거래에 응할 테니.”

    - 아! 음악! 음악은 좋지. 나는 노래를 듣는 게 즐거워. 맛있는 노래는 나를 아프지 않게 해줘. 이 통증을, 허기를, 갈증을 잊게 해 줘……. 하지만 제일 맛있는 건 그게 아냐.

    미쳐 버릴 것 같다.

    오른쪽 귀에서는 이런 말이, 왼쪽 귀에서는 저런 말이 울린다.

    분명 그녀는 초원에 가고 싶었다. 등을 떠밀려서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원해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결국 누군가의 요구로 인해 체스 말처럼 움직이게 된 꼴이었다.

    “너도 들은 적 있겠지. 용이 신성인을 이 세계에 데리고 왔다고. 그건 참이다. 그러니 반대로, 돌아갈 길이 있는 것 역시 참이다.”

    “돌아갈, 길?”

    “그래. 확실해. 용에겐 그럴 능력이 있다. 아프지만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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