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34)

111화

7. 후회(Reue)

소름 끼치는 침묵의 밤이었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옳고 바른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이고 귀와 마가 깃든다는 새벽 4시 44분.

실로 악마가 존재한다면 바로 저런 것이리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

녹아내려 키가 작아진 촛불이 한 사내의 얼굴을 비춘다.

황금 관의 정당한 주인이요, 숱한 공을 세운 사령관이요, 스스로를 신의 자손이라 칭하는 자라.

그는 이제껏 무언가를 잃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라히크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쉬이 칭하지 못했다.

이 생소한 공허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까지 느껴 왔던 감정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만 같다.

공포나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그러한 쓸모없는 감정이 어째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였던 오만은 어디로 갔는가.

죽은 듯 창백한 얼굴로 누운 레그리아를 눈에 담으며 라히크는 몇 시간 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새액거리는 얕은 숨이 금세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들린다. 잠시 눈을 붙인 사이 그녀의 영혼이 결코 잡을 수 없는 신의 땅으로 가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그의 손아귀에서 도망하는 일은 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라히크는 그녀가 죽지 못하도록 살피고자 했다.

‘어째서인가.’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마 하였다.

우리의 대화는 사뭇 일반적이고 평범한 ‘대화’ 같았으며 너는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안심한 것도 분명히 있었다.

레그리아에게서 보이는 삶에 대한 희망이, 살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가 기꺼웠다.

헌데 잠시 등을 돌린 사이 그녀는 창문에서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불운한 사고라 수군거렸지만 라히크는 확신했다.

이 여자는 원해서 떨어진 것이다.

다만 그를 미치게 만드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네 무엇이 그리도 싫었기에.

‘내 눈앞에서 보란 듯 그리 떨어져야만 했나.’

빌어먹을 신성 기사의 기억력은 몇 시간 전의 상황을 계속해서 생생히 되풀이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웃는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하늘거리는 머리칼이 핏빛으로 짙붉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잡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아슬아슬하게 놓쳤다.

그건 마치 레그리아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보라, 이게 우리의 간극이다.’

그렇게.

“전하. 조금이라도 주무셔야 합니다.”

“되었다. 모스그라토 공자는.”

“자해를 너무 심하게 해서 일단 세비레이크 경이 제압하였고, 그 틈에 약을 먹여 재웠습니다. 머리 셋 달린 괴물도 잠들 만큼 강력한 수면제이니 깰 일은 없을 겁니다.”

레그리아와 지젤이 동시에 떨어진 직후, 얼어붙었던 라히크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일단 모스그라토에 속하여 3년간 레그리아의 몸을 돌봐 왔던 주치의를 부르는 동시에 사람을 보내 황궁에서 그의 심복인 의사를 불러오도록 명했다.

새벽 늦게 도착했지만 의사는 레그리아의 상태를 살폈고 목숨에 지장은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교차 검증을 하고서야 라히크는 간신히 레그리아가 오늘도, 내일도. 그 이후에도 살아 있을 것임을 믿었다.

“나가 보라. 수고했다.”

“예, 전하.”

오래 잠들지 못한 탓에 안압이 올랐다.

눈가를 꾹 누르며 라히크는 레그리아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쉽사리 되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 단 한 조각도 지젤에 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 우습기는 하였다.

아, 아니지.

그 고약한 계집이 감히 레그리아를 타고 앉아 있었지.

깨어나거든 레그리아를 다치게 한 값을 엄중히 물을 것이다.

로에르멜 공작도 마침 이곳에 있으니 멀리 돌아갈 것도 없었다.

“그래, 깨어나기만 하면…….”

죽은 듯 누워 있는 레그리아를 눅눅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라히크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아까부터 ‘무언가’가 자꾸만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그의 폭주를 유발하기라도 하듯이.

- 죽이고 싶잖아. 지금이 기회야.

- 지금 저 목을 졸라.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

- 그러면 네 소유가 될 거야. 네가 죽인, 온전한 너의 것!

- 지금 갖지 않으면 달아나 버릴걸?

- 깔깔깔깔!

낄낄거리는 음성들은 귀신인 듯, 유령인 듯 실체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바람일 수도, 혹은 그저 정신병의 일환일 지도 모른다.

폭주라는 것도 결국 허무를 이기지 못한 병증이지 않던가.

‘나는 레그리아를 죽여 소유하고 싶지 않다.’

비록 그것이 진실된 그의 속내라 할지라도 그 행위가 불러올 만족보다도 후회가 더욱 클 것을 안다.

그는 자기 통제 하나 하지 못해 벽에 머리를 찧어대는 에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신황청에 네가 쓰던 침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라히크는 본능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미쳐버리는 대신 레그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쓰던 것이라면 터럭 하나 바꾸지 말라 해 두었다. 네가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겠지만.”

그녀는 단 하나도 가져간 게 없었다. 그랬기에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그가 선사했던 목걸이나 여타 장신구 중 없어진 게 무엇도 없다는 건 그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그만큼 레그리아에게는 무엇도 가치가 없었다는 것이니까.

“나는 네가 즐기던 과일이 딸기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더군.”

자조적인 어조였다.

생각을 이어 나가면 이어 나갈수록 숨이 막혀 온다. 한순간 호흡이 막혀 라히크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쿵.

쿵.

심장이 폭주하기라도 할 것처럼 무겁게 뛰었다.

광증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처음 그녀를 만나 길들일 수 있노라 자신하던 그는 어디로 갔는지.

애초에 신성 기사가 신성인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제 짝이라 생각한 자를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을 리가 없음인데.

어찌하여 그는 그토록 교만하였는가.

“……윽.”

통렬한 후회였다.

레그리아가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걸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괜찮은 척해 왔지만 결국 의자에서 앞으로 쓰러진 그는 두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헐떡였다.

까드득.

카펫을 쥐어뜯을 듯 손을 그러쥐지만 잡히는 건 무엇도 없다.

피가 나도록 혀를 깨물어 속에서부터 짓쳐 오르는 그악스러운 소리를 간신히 억눌렀지만 결국 목구멍 끝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났다.

‘괜찮다. 괜찮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시간을 주고 그런 다음 설득하면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라히크는 그렇게 되뇌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지 않으면 이 침실을 중심으로 반경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켜 버릴 것 같아서.

‘그러니 어서 일어나라. 어서….’

아침이 되면 어련히 눈을 뜨겠지만 이 새벽이 견디기 힘들다.

저러다가 가느다란 숨이 기어코 끊어져 아침에 맞이한 것이 싸늘한 시체일까 봐.

만약 그렇다면 짝이 될 여자를 잃고 살아갈 수는 없음이니.

“…….”

입 안 가득 비린 맛이 감돈다.

고개를 든 그의 눈길 닿는 곳에 거울이 비스듬히 놓여 있다.

그 속에 비친 것은 황태자도 아니요, 잘난 군 통수권자도 아니요, 나는 길들이는 자이노라 거만 떨던 사내도 아니다.

무릎 꿇은 채 시꺼먼 피를 토해내는 그것은, 단지 한 마리의 마귀였다.

* * *

사박사박.

수평선도 없으며 지평선도 없고 머리 위도 없으며 발아래도 없는 공간.

사방이 열려 있으나 어디로도 갈 수 없고 나로서 존재하나 실재하지 않는 장소.

바깥이 어떠한지도 모른 채 레그리아는 지금 기묘한 꿈의 공간에 서 있었다.

‘여긴 대체….’

마지막에 바닥에 추락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게 꿈속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자각몽인가.’

그렇게 읊조리자마자 사방에서 제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 왔다.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들기 딱 좋은 공간이다 싶다.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주변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멈추어 서 있는 것 같은데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으나 레그리아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금 ‘누군가의 꿈’에 강제로 초대받은 것임을.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안녕.”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레그리아는 몸을 홱 돌렸다.

“너를 오래도록 기다렸는데. 너는 와주지 않았어.”

하지만 목소리는 또다시 등 뒤에서 들린다.

아무래도 이 공간의 주인은 쉽사리 얼굴을 보여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너는 누구야?”

“나는 너를 필요로 하는 자. 너의 종착지. 네가 찾던 이상향. 내가 너의 낙원이야.”

수상쩍은 대답이다.

목소리는 잔잔하기도 했고 노도와 같이 밀려오기도 하였으며 어린아이인지 어른인지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어서 내게 와. 나는 더는 기다릴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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