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34)

110화

쿵.

심장이 불온하게 내려앉았다.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왠지 올 것이 왔다 싶기도 하였다.

‘온종일 이 사람 저 사람의 비밀이 기다렸다는 듯 터지더니 이젠 내 차례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에화와 라히크는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쁘고, 평범한 병사들이 둘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표드르가 이 복도를 깨끗이 비워 두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표드르 역시 지금 여기에 없지.

“네가 천재일 거라고 생각해서래. 네가 천재일 거라고 기대해서! 웃기지 않아? 너 같은 게 무슨 천재라고!”

상처받기를 바라고 쏴붙인 거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생채기가 나진 않았다.

그녀가 천재가 아닌 점에 대해서는 이미 오랫동안 상처입어 왔기에 이제 와서 다시 듣는다 한들 그다지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레그리아는 이제 천재라는 의미가 갖는 한계성을 뛰어 넘어버렸다.

2등이어도 좋다.

내가 내 음악을 사랑하니까.

내 음악을 좋아해 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제와서 알게 된 거지만 레그리아는 딱히 천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천재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니까 그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을 뿐.

그녀는 그냥 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내가 누구 자식인데.”

다만 단순히, 알고는 싶었다.

그토록 그녀를 멸시하던 어머니가 친모가 아니라면 대체 저는 누구의 자식이란 말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연유로 그 끔찍한 집에 들어가-

동생의 수발을 들며 지내 와야 했었는지.

그런 게 궁금할 따름이다.

어머니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무명 피아니스트라던가. 하여튼 널 낳자마자 자살했대! 자긴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그리고 이 애는 무슨 반응을 바라서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어딘가 조금 미쳐 있는 건 알았지만 오늘따라 더욱 불안정해 보이더니 기어코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

미간을 꾹 누르던 레그리아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들었니?”

“아이를 낳으면 신성인이 죽는다는 거? 그래, 들었어. 내가 임신한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우스웠니? 이제 내가 죽게 되니까 속이 편해?!”

이해한다.

죽음이란 공포는 제 일이 아닐 때는 그러려니 하지만 코앞에 닥쳐오면 이성을 잃게 만드니까.

제 몸을 스스로 끌어안으며 파들파들 떨던 지젤은 이내 손톱을 까득까득 씹기 시작했다.

“그 무명 피아니스트는 엄마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대. 그래서 엄마는 언니를 자기 호적에 넣은 거야. 근데 이듬해에 내가 생겼지 뭐야?”

아, 그러니까 보석일 줄 알고 주워 왔던 것이 실은 폐품이었다. 그래서 버렸다.

헌데 이미 호적에 넣어 두어서 어떻게 하질 못했다.

‘그런 뻔한 이야기.’

우습지도 않아.

아무런 타격도 없다.

친부모가 누구인지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이 세계로 떨어졌는데.

원래부터 그녀가 사라졌다 하여 슬퍼해 줄 사람은 없지 않았나.

차라리 이 세계가 더… 지금 그녀가 없어져 버리면 슬퍼할 사람이 많으리라.

“하! 기왕 죽게 생겼는데 무슨 말을 못하겠어. 다 한통속이라는데, 황태자는 언니만 살리겠다는데!”

최소한 대화의 초반부는 다 들었네.

속이 답답해져 레그리아는 지젤에게서 몸을 돌렸다.

창문, 창문이라도 열자.

잠금쇠를 향해 뻗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 탓에 두어 번 실패했지만 레그리아는 끝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인간의 하찮은 이야기 같은 건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별밤이 빛난다.

모스그라토의 여름밤은 늘 저렇듯 별자리가 잘 보였다.

“그런데 언니. 언니만 사는 건 불공평하잖아. 나도, 나도 살고 싶단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황태자한테 가서 나도 살려 주라고 말해. 아니면 약이든 뭐든 황태자가 나눠주는 걸 나한테도 줘.”

“…어쩌면 그렇게 뻔뻔하기만 할까, 너는.”

그래도 되는 삶이었으니 그렇겠지. 원하고 바라면 뭐든 나왔으니까.

‘아… 지긋지긋해.’

눈에서 빛이 꺼져간다.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현실 도피라 해도 좋고, 회피라 해도 좋다. 어쨌든 지금 생각이 나는 얼굴은, 라히, 아니.

비칸이었다.

‘나도 미쳐 가는 건가. 여기서 라히크가 갑자기 왜 나와.’

임산부만 아니었더라도 뺨을 쳤을 텐데.

한숨을 삼킨 레그리아는 제 팔을 우악스레 쥐는 손을 탁 쳐서 떨어트렸다.

“네가 직접 가서 애원해. 너도 혀라는 게 있지 않니. 무릎이라도 꿇으며 매달리면 또 알아? 나눠줄지.”

“……!”

“왜 그러니? 네 친언니도 아니라면서. 그런데 내가 왜 널 챙겨야 하지?”

지나간 시간을 억울해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앞으로 남은 시간도 원망이나 하며 지내야 할 테니까.

레그리아에게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였다.

어떻게 살아 왔는가가 아니라.

‘이제 이만하면 다 들은 것 같으니 이만 가야겠다. 비칸이 오래 기다렸어.’

그렇게 생각하며 레그리아가 표드르를 부르려 했던 찰나였다.

“역시 너 같은 거, 더 밟아 놨어야 했는데.”

“……?”

“아예 기어오르지도 못하게 더 싹을 밟았어야 했어. 그랬으면 네가 지금 그렇게… 그렇게 나보다 우월하다는 듯 쳐다보진 못했을 텐데!”

이따금 어떤 이야기는 한 문장만으로도 확 와닿곤 한다.

그간 쌓여 왔던 의심이 증폭되고 마침내 터져 진실을 눈앞에 들이미는 것이다.

‘라히크가 내가 치는 피아노가 이상하다고 했었지.’

슈만도, 자꾸 의아해했다.

어째서 그녀가 자존감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며 칭찬을 거듭해 주었지만, 그저 그런 재능을 추켜세워 주는 거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사실 그녀는 좀 더, 그보다는 좀 더 나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꽃피우지 못했을 뿐이라면.

그 의심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있지, 언니. 난 항상 언니를 죽여 버리고 싶었어. 가만히 뒀다간 내 머리 꼭대기를 밟고 올라서서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겠더라고.”

“너.”

“언니가 제대로 된 연주를 하는 걸 듣는 순간 알아차렸어. 엄마 귀는 썩었다는 걸. 이대로 몇 년만 지나도 네가 나를 추월할 텐데, 그것도 몰라보고. 아니면 알았는데도 무조건 내가 잘나길 원했던 거야. 내가 자기 친딸이니까. 내가 언닐 이겨야 자기가 이긴 것 같지 않았겠어?”

사근사근한 음성에 진득한 악취가 배어 있다.

그녀가 무너지길 바라는 눈빛이 하도 저열하여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개인 레슨을 해 주는 척하면서 나를 망쳤니?”

“응, 맞아. 언닌 멍청하게 내 말을 다 받아들이더라. 그리고 자책하는 꼴이 얼마나 웃겼는데. 그게 언니의 자리였어. 내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거! 그런데… 그런데 감히 나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돼?”

지젤의 손이 확 치켜 올라가는 게 아주, 아주 느리게 보인다.

1분이 몇백 초로 나뉘어 쪼개진 것처럼 느리게.

그 순간, 레그리아가 느낀 것은 절망도 아니요, 좌절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시나리오에 대해 생각했다.

‘내 등 뒤는 창문이고.’

두어 발짝 물러서서 때리는 걸 피한 레그리아가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았다.

‘아, 달빛이 참 환하게도 쏟아져 들어오는 밤이다.’

레그리아는 저를 향해 다시 한번 날아오는 지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거, 놔…?!”

잡힐 줄은 몰랐는지 지젤이 용을 쓰며 팔을 마구 흔들었다.

레그리아는 그걸 놓아주지 않았다.

이 계획엔 네가 꼭 필요하거든.

“황태자비 자리, 너 줄게. 너 하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숨기고 있을 비칸이 볼 수 있도록 레그리아는 확실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서지 마.

때마침 수상쩍은 기척을 느꼈는지 복도 오른편에서 표드르가 나타났다. 왼편의 집무실에서는 손수건에 손을 닦으며 나오는 라히크가 보였다.

‘여길 빠져나갈 방법.’

그래서 초원이든 어디든, 마음대로 떠날 수 있을 만한 유일한 길.

‘모든 위대한 선택에는 희생이 동반된다는 명언을 누가 남긴 거더라?’

하긴, 알 바인가.

당황한 지젤을 바짝 끌어당겨 안은 레그리아는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기우뚱.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림과 동시에 가벼운 몸은 쉽사리도 넘어간다.

드레스 자락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그토록 빠르다는 두 남자가 달려와 손을 뻗었을 때, 레그리아는 이미 낙하하고 있었다.

잡을 수 없을 만큼 아래로.

쿵…!

마지막으로 본 라히크의 얼굴이 어땠나.

새파랗게 질렸던가. 아니면 흙빛이었던가. 그도 아니면…….

‘아.’

죽지는, 않는댔으니까….

눈앞이 가물거린다.

지젤을 깔고 떨어진 게 아니라 그녀의 위에 얹은 채 바닥에 처박히는 바람에 둔통이 심하게 올라왔다.

‘아래쪽에 작은 나무들이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어딘가 한 곳은… 부러졌을지도…….

아프다.

알싸한 통증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까마득히 점멸했다.

최악의 생일 파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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