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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09/134)
  • 109화

    그렇게 말하는 라히크의 목에 핏대가 섰다.

    이제 막을 수도 없이 난장판이구나.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레그리아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에화. 내가 너를 인간쓰레기로 경멸하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든! 뭐든 말할게. 응? 뭐가 궁금해?”

    “이 집의 고용인들 중에, 조직원이 있니?”

    “이, 있어. 있는데… 다 자를까? 아니면 다 죽으라고 할까? 눈앞에서 치워 줄까? 응?”

    지금 에화는 감정이 격화된 상태였다.

    평소에는 유들유들하니 화를 내지 않고 넘기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한번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에화는 상당히, 감정적인 편이었다.

    특히 그녀가 떠난다는 전제 앞에서는.

    “왜, 그런 단체를 만든 거야?”

    “만들면 안 되는 줄 몰랐어…! 누나가 싫어할 줄 알았으면 손도 대지 않았을 거야. 진짜야. 시간을 뒤로 돌릴 수만 있으면 그런 거 하지도 않을 텐데…!”

    횡설수설 하면서도 어떻게든 예뻐 보이고 불쌍해 보이려고 하는 모습이 가당찮았다.

    아니, 그래 뭐. 귀엽기는 해.

    안 그래도 예쁜데 처연하게 엉엉 울고 있으니 더 예쁘지 않을 수야 있나.

    하지만 그게 다였다.

    “누나, 누나 나 좀 봐. 나 좀 봐 줘. 나 에화야. 네가 3년 동안 나 봐 왔잖아.”

    에화가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레그리아는 문득 그의 손아귀 아래에 잡힌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 이 드레스도.”

    살인 의뢰를 받아서 번 돈으로 산 거겠구나.

    뒷말은 삼켰다.

    이러다간 에화가 콧물까지 흘리며 울 것 같아서.

    실연은 아프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에화를 달래 주어야 할 의무까지는 없었다.

    “형도 사람을 죽였어! 형이 더 많이 죽였어. 전쟁을 했잖아. 거기서 민간인이 얼마나 희생되었겠어!”

    레그리아가 에화의 손을 조용히 치웠다. 그러자 밀려난 제 손을 망연히 바라보던 에화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난 다 죽여야 할 만한 사람만 죽인 거야. 내가 나쁜 놈들을 없애서 이 세상이 좀 더 살만해졌을걸?”

    “맞아, 에화. 난 너를 미워하거나 비난하지 않아.”

    딱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고리타분한 걸 주워섬기려는 건 아니다. 그런 거 잊은 지가 언젠데.

    그녀 역시 에화가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3년 간 호위호식하지 않았나.

    그러니 레그리아에겐 에화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그간 먹은 것, 입은 것, 누린 것을 다 토해내지 않고서는.

    “그렇지만… 단지 너를 사랑할 수 없을 뿐이야.”

    “레, 레그리아.”

    “노력해 봤어. 시도해 봤어. 하지만… 너와 입 맞추면서 점점 아무 감정이 들지 않더라. 편안하고 즐거웠어. 그런데 단지 그뿐이야.”

    무엇보다 너와는, 정신 접촉도 한 적 없으니까.

    정신 접촉을 하게 되면 쌍방이 영향을 받는다.

    그 점에서 제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에화는… 글쎄.

    라히크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에화에게 느끼는 감정이 더 클 수야 없겠지.

    미움 같은 것도 결국 관계의 일부.

    “너와의 시간은 즐거웠어. 꼭 꿈을 꾸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깨어날 시간인가 봐.”

    “아아아악!!!”

    짧은 이별 통보.

    그에 에화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소파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오싹한 소리를 지른 뒤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이내 고개를 든 에화는 실로 불쌍한 모습이었다.

    “내, 내가 어떻게 하면 안 떠날래? 응? 내가 죽으면 안 갈 거야? 아, 근데 죽으면 너 못 보잖아. 그건 안 되는데.”

    “미안해. 하지만 3년이면… 많이 노력한 것 같아.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줘. 너도 네 인생을 살아야지.”

    “싫어. 싫어. 싫어! 너 아니면 싫단 말이야.”

    “내가 뭐라고 그래.”

    게다가… 너는 내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한 적 없는데.

    에화는 늘 그랬다.

    좋아한다고.

    ‘강아지를 좋아해. 고양이를 좋아해. 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해. 그 말에 어떤 깊이가 더 있을까.’

    그녀도 에화를 좋아했다.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를 굳이 따지자면 후자겠지.

    그러나 사랑한다는 건 편안하고, 스킨십을 해도 가슴 속에 풍랑 하나 일지 않는 그런 고요함을 이르는 건 아니리라.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떨리고, 애가 타고, 울렁거리고. 그런 기분이 아닐까.

    ‘아니면 맞닿기만 해도 가슴이 조여들고 호흡이 턱 막히면서 긴장감으로 발끝까지 곱아드는, 그런 것. 싫은데 거부할 수 없는… 결국 행위를 할 때만큼은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런 거.’

    라히크와 무언가를 할 땐 그랬는데.

    “나가, 레그리아.”

    “!”

    언제 일어섰는지 라히크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레그리아는 잠겨드는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당신은.”

    “저 녀석은 그냥 두면 안 된다. 파티에 온 사람 절반이 죽어 나가길 바라는 게 아니면 당장 나가 있어.”

    어느새 에화는 그녀를 놓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봐서는 그다지 위험한 것 같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 라히크의 판단을 따르지 않는 건 위험하다.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자마자 에화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더니 그녀의 다리를 와락 안고 매달렸다.

    “아, 안 돼! 안 돼. 가지 마.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컥!”

    “꼴사납군. 정신 차려라.”

    “아악!!! 형이 뭔데!!! 형이 뭔데!!!”

    맛이 간 눈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에 등골이 오싹한 찰나, 라히크가 에화의 머리채를 잡고 내동댕이쳤다.

    그 사이 레그리아는 지체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바깥문은 라히크가 시원하게 뚫어 두었기에 중문만 나서면 금방이었다.

    “문제가 있으십니까.”

    “헉!”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레그리아는 망가진 문가에 기대어 서 있는 표드르를 발견하고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화가 갑자기 폭주 비슷한 걸 했어요.”

    “그런 모양이군요.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제압하실 테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모스그라토 공자는 자기 파괴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어려서부터 종종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학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자학을….”

    “그때마다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전하밖에 없었습니다. 외람되오나 안에서 나누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

    “모스그라토 공자에게 퀴제를 만들도록 권유하신 건 황제 폐하이십니다. 소중한 아드님이니 자학을 할 바에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게 낫다는 뜻으로 사료됩니다.”

    아, 그럼 가정교육이 문제였구나.

    ‘지난 날 에화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 단순히, 내가 하자는 대로 얌전히 따라서 그랬다는 거네.’

    한숨을 내쉰 레그리아는 복도 중앙에 우뚝 멈추어 섰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그 사이에도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

    비칸.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이 저기에서 꼼짝도 못한다는 거니까.’

    지금 당장 비칸에게 가야겠다.

    ‘초원에 가 보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만약 비칸이 데리러 온 게 아니었더라면 이런 결정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칸은 저 바깥에 있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초원 전체가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게 비칸이 내게 의도적으로 감추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정치적인 일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일일 수도 있으나 개인적인 일은 아닐 거란 뜻이다.

    그녀가 아는 비칸은 무엇이든 대답을 해 주는 사내였고, 무뚝뚝하지만 챙겨 주는 법을 아는 성품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를 속이려 할 리 없다.

    ‘게다가… 애초에 속이고 자시고 할 만한 시간도 없었잖아.’

    처음엔 지하에 갇혀 있었고, 그때는 서로를 믿을 수 없었으니 어떤 말이라도 하기 어려웠겠지.

    비칸과 제대로 함께 있었던 건 그 보름이 다였는걸.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어 활동성을 용이하게 한 레그리아는 복도를 달렸다.

    이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정원으로 나갈 거다.

    그러면, 그러면 비칸이 그녀를 찾아 올 테니까.

    “!!!”

    하지만 다음 순간.

    레그리아는 모퉁이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인영과 부딪칠 뻔했다.

    ‘지젤!’

    지젤이 갈고리처럼 휜 손을 내뻗고, 순식간에 나타난 표드르가 그것을 막고. 달리던 속도에 부하가 걸려 레그리아가 휘청거린 건 모두 동시에 벌어진 일.

    표드르는 한쪽 팔을 뻗어 레그리아의 허리를 받쳐 안았고 다른 손으로는 지젤을 저지했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표드르에게 두 손목이 잡혀 꼼짝도 못하게 된 지젤이 소리를 내질렀다.

    독이 새파랗게 올라 있는 목소리가 까랑까랑했다.

    “친언니도 아닌 게, 매번 언니처럼 구는 거. 어릴 때부터 재수 없었어. 그래도 내가 아량을 베풀어서 내 언니로 있을 수 있게 해 줬는데!”

    속눈썹에 칠해 둔 것이 번져 엉망이 되었다.

    바락바락 내지르는 것이 하도 황당하여 레그리아는 우선 침착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아무도 없네.’

    다행이다.

    저 헛소리를 들은 게 그녀와 표드르뿐이어서.

    “놔줘요, 경.”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일단, 둘이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어요.”

    오늘 어디 한 번 끝장을 보자.

    얽히고설킨 비밀이 계속 터져 나와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그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누구에게도.

    “똑바로 알아듣게 말해. 그게 무슨 소린지.”

    “네가 언제까지 내 언니인 줄 알아? 넌 처음부터 엄마 딸도 아니었어. 피가 아예 안 섞였다고. 그런데 엄마가 왜 널 딸인 척 키웠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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