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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8/134)
  • 108화

    ‘내가 정신 접촉을 끊어 버려서 금단 증상 같은 게 일어나기라도 한 건가.’

    이 힘은 골치 아프다. 이렇듯 계속 상대방을 돌봐야 하는 일이 생긴다.

    게다가 그녀가 신성 기사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신성 기사에게 그녀 역시 영향을 받았다. 좋든 싫든 간에 그런 법칙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 무시하기도 어려워, 레그리아는 억지로 라히크에게서 눈길을 뗐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난 이제 지쳤어. 투쟁하고 싶지도 않고 싸우고 싶지도 않아, 라히크. 나는 그냥 평범한 삶을 살고, 평범한 사랑이 하고 싶어.”

    “그래서, 네가 마음을 준 상대가 있긴 한가.”

    “그건…….”

    “혹 초원의 전사라 말하고 싶다면 그만둬라. 지금 네가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아나 모르겠군.”

    “무슨 표정인데?”

    “너 자신 외에는 누구도,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얼굴이다.”

    아, 그랬지.

    라히크가 싫은 건 꼭 이렇게 의표를 찌르기 때문이다.

    감추고 싶은 걸 기어이 끌고 나와 발치에 내동댕이친다.

    보라, 여기에 네 위선이 있다.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듯이.

    그와 그녀는 닮은꼴이었다.

    헤집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특히 그러했다.

    “초원의 그놈이라 해봤자 별수 없을 테지. 3년간 만나지 못한 건 같을 테고. 나와 같은 선상에 서 있지, 조금이라도 앞서나간 것 같진 않군.”

    “사랑에 대해 당신이 뭘 알아. 함부로 말하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면 그 빌어먹을 사랑. 나와 하면 될 것 아닌가.”

    “…….”

    방금, 뭘 들은 거지?

    레그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라히크가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저렇듯 무례하게 끊고 들어온 적이 있었나.

    그는 항시 우월했고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입장이지 듣는 쪽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굳이 저렇게 부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온 얼굴을 찡그리며 어색하고 낯설다는 티를 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나와 해. 그 사랑이라는 것.”

    대답 없는 그녀를 향해 라히크가 다시 한번 채근했다. 누가 들으면 죄를 추궁하는 줄 알 법한 무시무시한 어조로.

    “흐… 하, 아하하. 아하하!”

    미처 막지 못한 웃음이 발작적으로 터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레그리아는 눈가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당신 표정이야말로 좀 보고 말해. 그게 어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인지.”

    “입에 단 것만이 사랑이던가.”

    “당신 말대로, 그야 나도 몰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사랑받아 본 적도 거의 없고. 하지만 바라는 건 있어.”

    “그게 무엇인데.”

    라히크의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간 게 보인다. 거절하려는 걸 이미 알았는지 미간에 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반면에 레그리아는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었다.

    라히크와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 ‘대화’의 끝이 결렬이더라도 그는 그녀를 해할 수도,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에화가 버티고 서 있으니까.

    그리고 저 바깥에는… 비칸이 있으니까.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레그리아는 자유를 느꼈다.

    에화의 말대로, 이건 권력에서 오는 자유였다.

    신분적인 권력이 아니라 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력.

    그래서 레그리아는 눈치를 보지 않고, 라히크의 신분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나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관계를 원해. 서로 어떤 상처도 없이, 망가지지 않은 그런 거 있잖아.”

    관계의 완전무결함에 집착하는 건 일종의 정신병일까.

    그녀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있었다.

    모친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 생긴 그 균열은 쉽사리 메워지지가 않았다.

    계속해서 ‘완전함’이라는 헛된 개념에 집착하게 만드는 걸 보면.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거다. 첫 인사부터 다시 하지.”

    “그래 봤자 흠집 난 게 어디 새것만 할까.”

    항시 짐승 같다 느낀 금색 눈동자가 지금 만큼은 사람의 것 같았다.

    그녀가 자조적으로 던진 말에 상처 입은 게 보인다.

    굳이 그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을 텐데,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게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당신은 내가 적응할 수 있도록, 그래. 당신 딴에는 많이 도와주려 했었지. 당신 기준에서… 나를 챙긴 것도 알아.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계속 전하고 있는 거지만… 우리는 맞지 않아, 라히크. 당신과 나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엔 너무 부족한 사람들이야.”

    한쪽이 0이라면 다른 쪽은 100이어야 한다.

    그래야 나누어 50이라도 될 것 아닌가.

    그러나 라히크의 잔에 채워진 건 없었다. 그녀의 잔도 빈 것은 마찬가지.

    그런 우리가 무엇을 하자고.

    “인정해, 라히크. 당신에게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좀 더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사람. 남들의 배로 상냥해서 당신의 모난 부분도 거리낌 없이 안아 줄 수 있는 그런 여자.”

    그리고 그런 남자가, 그녀에게도 ‘필요’하다.

    물론 에화는 그런 사람이었지. 겉으로는.

    “결국 어떻게 해서도 나는 안 된다는 거절이군.”

    “맞아, 라히크. 당신과 내가 3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워, 그 점은.”

    굳이 연인이라 이름 붙인 사이는 아니었으되 어느 선까지 몸을 섞은 이상 감정의 찌꺼기가 없을 수야 있나.

    하지만 오늘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 남겨져 있던 흔적마저 모두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왠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새로운 시작, 출발. 뭐 그런 걸 하려면 과거의 잔재를 털어내야 하니까.

    “집은 고맙지만, 됐어. 가져가.”

    “아니. 그건 너를 위해 사 둔 것이다. 에화에게서 빠져나가 거기에서 살 수 있게 해 주지.”

    “함부로 들락거리려고?”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하겠다. 허나 네가 받지 않는다면 그 집은 근시일 내에 철거하지.”

    라히크가 묵묵히 답했다.

    거절에 대한 반응치고는 생각보다 유하다.

    잠시 열쇠를 내려다보던 레그리아는 그걸 손에 말아 쥐었다.

    준다는데 거절하진 말자.

    어쩐지 이것까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집에 대한 대가는 한발 물러서서 명목상 황태자비가 되어 주는 거면 되겠지.

    “황태자비 자리의 자격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봤는데, 정말 어쩔 수 없다면 내 이름을 올려 두도록 해. 하지만 나는 당신 곁에 있진 않을 거야, 라히크.”

    “그렇군.”

    “만약 내가 필요하다면, 이따금… 아주 가끔. 정신 접촉은 해 줄 수 있어.”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양보였다.

    라히크가 한발 물러섰으니 레그리아 역시 물러서는 것이다.

    이 정도 간격. 이 정도 거리.

    이걸 무어라 불러야 할까.

    안전거리?

    ‘이상하네. 아까는 후련하더니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지금은 또 왜 이렇게 가슴이 무겁지.’

    열쇠를 쥔 손이 아파 온다. 간신히 손가락을 펴자 너무 꾹 눌러 쥐어 열쇠의 모양대로 자국이 난 손이 보였다.

    “참, 아직 못 들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라히크.”

    그걸 등 뒤로 감추며 레그리아는 보다 가벼워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해 주기로 했잖아. 초원이랑 신성인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걸까.

    그래도 라히크가 제안이 거절당해서 말해 주기 싫다고 하는, 그런 치사한 사람은 아닌데.

    라히크가 그녀를 고요히 응시했다.

    그건 꼭 묵상 같았으며 이별하는 자리에서 차인 연인이 보일 법한 태도였으며 혹은 죽은 반려 동물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라히크는 입을 열었다.

    “용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초원에 실존한다는 그 용?”

    “그래. 초원의 야만족들은 그 용을 지키는 걸 일생의 영예로 여기지.”

    비칸에게 들은 적 있는 이야기다.

    다만 얼토당토않다 싶어 그냥 잊었던 건데, 그게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용은…….”

    하지만 그때였다.

    “레그리아! 형이, 형이 뭐라고 했어?”

    “!”

    “믿지 마!!!”

    쾅!

    테이블이 뒤집히며 그 자리에 에화가 나타났다.

    어딘가 절박한 얼굴로, 온통 눈물이 진 상태로.

    “형이 뭐라고 했든 그거 다 거짓말이야. 안 믿잖아, 그치?”

    “…….”

    들이닥친 에화의 얼굴에서 공포를 발견한 레그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물어 볼 필요도 없구나.

    레그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에화의 얼굴은 점점 더 사색이 되었다.

    게다가 잠시 멈추었던 두통이 사람을 놀리기라도 하듯 다시 시작되었다.

    “라히크가 무슨 말을 했을 줄 알았기에 표정이 그래.”

    욱신.

    관자놀이를 찌를 듯한 고통이 눈가를 찡그리게 만든다.

    이마를 짚은 그녀의 앞에 에화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한텐 너밖에 없어. 뭐든 네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고, 네가 하라고 하면 할 거야. 알잖아. 나 말 잘 듣는 거.”

    그런 체하면서 제멋대로 하는 거라면 아는데.

    하아.

    짤막하게 한숨을 내쉰 레그리아는 시선을 올려 라히크를 바라보았다.

    오만한 낯가죽 아래에 뭔가가 흉포하게 들끓고 있는 게 느껴진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에화가 이러는 건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거 잘 됐군. 한 번 물어보지 그래, 레그리아.”

    “라히크.”

    “저 녀석이 무어라 답할지는 나로서도 꽤 궁금한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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