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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34)
  • 107화

    세련되게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라히크는 지금 자신이 완벽하게 ‘정상’처럼 보이는지를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정신인 자가 하는 해명과 미친놈이 하는 해명은 그 무게가 다른 법이다.

    그는 조금도 망가진 사내여선 안 됐다.

    특히 레그리아 앞에서는.

    “내가 너 외의 다른 것에게서 자손을 볼 거라 여겼다면, 실망이로군.”

    “……?”

    “자격 없는 자는 황손을 품을 수 없다.”

    “그럼, 그럼 그 말은… 지젤의 아이가 당신 아이가 아니라고?”

    찰나의 순간, 가시 돋쳐 있던 녹색 동공이 흔들렸다.

    어떤 의미로 충격을 받은 것이든 충격은 좋은 일이다.

    네 안에 내가 파고들 틈을 벌리니까.

    “루머와 진실을 구분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내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공식 석상에서 지젤 로에르멜의 아이를 내 아이라 인정한 적 있나.”

    “……없…지? 정보 통제를 당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탓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에화 놈이 네게 걸러진 정보만을 주입시켰을 테니. 그건 그놈이 가장 잘하는 짓이다.”

    교활한 여우 같은 놈.

    지난 몇 년 내내 샐샐 웃으며 앞에서 좋은 것만 보여 주었겠지.

    저열한 본성을 감추느라 꽁지 빠지게 힘겨웠을 걸 생각하면 실소가 샜다.

    “성 안에 갇힌 공주님으로 사는 건 어떻던가. 분명 내 마지막 기억에 네가 떠난 이유는 황태자비 자리가 강제되는 게 싫어서였던 듯한데.”

    “대체 왜… 왜 나를 내버려 두지를 못하는 거야?”

    “원망하려거든 원망하여라. 네가 가장 탓하기 쉬운 것이 나인 것 같으니.”

    “툭하면 사람 죽이는 게 일상인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라고. 나는 아무 위협도 받고 싶지 않아. 평범하게, 소박히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레그리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받아들이기 싫고, 인정하기 싫은 것은 다른 신성인에게서도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대부분은 어떻게든 받아들였지만 일부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미치기에 네 정신은 너무 강하고 견고하지.’

    차라리 아예 모든 걸 놔 버리면 편해질 텐데 네 고집이 그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결국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스스로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 이 또한 모르는 것 같아 이제 알려 주는 건데… 네가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너를 죽이려 했던 그 암살자들은 에화가 보낸 것이다.”

    “……뭐라고?”

    “그놈은 제국 최대의 암살단을 소유하고 있으니. 혹 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던가?”

    했을 리가 없지.

    놈은 눈치가 빨랐다.

    레그리아가 어떤 부분을 끔찍해 하는지 모를 리 있나.

    그러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제게 진하게 배어 있는 죽음의 냄새를 감춘 채 아양이나 떨었을 테지.

    “내가 아는 기만의 뜻은 그런 것이다. 이의가 있으면 반박해 보도록.”

    “하. 지긋지긋한 벨리그레엄 형제.”

    “새삼스럽군. 언제는 이 나라에 네가 지긋지긋해하지 않은 게 있던가.”

    “맞아. 난 이곳의 모든 게 싫어.”

    “초원으로 떠난다 한들 달라질 것 같은가. 그곳도 이익으로 돌아가는 집단이다. 네가 원하는 게 진실이라면 진실을 거머쥘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수밖에 없다는 걸 언제쯤 깨달을 텐가.”

    무의미한 말. 무의미한 논쟁이다.

    어차피 결론은 하나인데 왜 고집을 피우는 건지 라히크는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애잔하기는.

    “좋아. 그래, 당신이 지금 한 말들. 다 이해했어.”

    “그리고.”

    “이해는 했고… 하나가 남았잖아. 그래서 초원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내가 죽을 것을 알고도 아이를 낳으라 한 게 아니라면… 그게 어떤 방법인지 말을 해 줘야지.”

    “그 전에. 줄 것이 있다.”

    그를 바라보던 얼굴에 뚱한 표정이 스몄다.

    곧바로 원하는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고 저러는 것이다.

    ‘귀엽기도 하지.’

    꾸밈없이 본 모습대로 행동하는 건 제 앞에서뿐이라는 걸 언제쯤 인지하련지.

    네가 다른 사내 앞에서 이리 행동하진 않을 터인데.

    “이게 뭐야?”

    “뭐로 보이나.”

    “보석…으로 만들어진, 꽃 모양 브로치?”

    그녀를 연상시키는 붉은 벨벳에 감싸인 상자였다.

    그걸 열어보던 레그리아의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탄성이 스쳤다.

    중앙에는 에메랄드를, 꽃잎 부분은 모두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세공품이다.

    일전에 보좌관인 조슈아가 꽃이라도 선사하라는 말을 한 적 있었다.

    라히크에게 있어 시드는 것은 가치가 없었으므로 그는 불멸한 것을 준비했다.

    허나 재회 선물은 그 뿐은 아니었다.

    “이건 어디 열쇠야?”

    “수도에 있는 집.”

    “내게 집을 준다고…?”

    레그리아의 눈이 미심쩍음을 담고 가늘어졌다.

    라히크는 담담히 고개를 까딱이곤 낮게 말을 이었다.

    “넓은 곳은 외로워 싫다 하지 않았나. 거기에서 새로 시작하지.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연애부터.”

    * * *

    놋쇠 열쇠는 라히크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기에 너무 진짜 같았다.

    레그리아는 제 귓가를 울리는 사내의 음성에 잠시 침묵했다.

    오늘 이 많은 일이 일어나기 전, 셀린이 보여 주었던 잡지가 떠오른다.

    거기에 그려져 있던 예쁜 집도.

    허나 그녀의 상상 속에 이런 선택지는 없었다.

    ‘라히크가 한발, 물러섰어.’

    그는 곧 죽어도 황궁에서 죽으라고 할 것 같은 자였다.

    그 자신이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이뤄왔기에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본 적 없는 약자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하는 걸 포기했던 건데… 언제였던가.

    외로운 게 싫다고 고백한 적 있었다.

    기억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뱉은 말이다.

    그날따라 하도 외로워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걸 기억할 줄이야.’

    열쇠를 쥔 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얼떨떨해서 입이 벌어지질 않았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결국 그가 남편이 되는 결말을 상정한 건 같지 않나.

    하지만 이 정도도 라히크로서는 많이 물러선 것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떠돌며 입을 막았다.

    ‘에화에 관한 건….’

    솔직히 충격이 크다.

    에화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앞에서 누군가를 험히 다룬 적 없었다. 작은 동물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런 부분은 잘 맞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에화가 제 본성을 누르고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 가면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살인 집단의 수장이라니.

    그야말로 남편으로서, 내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직무로 인하여, 해야 할 일이어서 내키지 않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과 아예 그런 단체의 일원, 혹은 우두머리인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비교할 가치조차 없었다.

    ‘정이 떨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

    에화가 나이가 좀 더 어리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귀여워서. 그녀에게 잘 대해 주는 건 사실이니까.

    아리툼과 전쟁 중엔 모스그라토령이 가장 안전한 게 현실이라서.

    이따금… 비칸이 다 안다는 듯 새를 보내와서.

    그래서 정보를 차단하고, 그녀의 발목을 묶고, 아무것도 알 수 없게 하여도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아, 이건 배신감이야.’

    나를 속일 거라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또 멍청하게 믿음을 가졌구나.

    이번에는 많이 믿었나 보다.

    가슴이 이렇게 조여들면서 아픈 걸 보니.

    “에화에 대해 알려 줘서 고마워. 그게 진실인지는 에화에게 직접 물어볼게.”

    “그러던지.”

    라히크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를 조용히 살피던 레그리아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저렇게 식은땀을 흘리는 거지?’

    어디 아픈가?

    라히크와 마주한 시간 내내 레그리아가 느낀 것은 이런 거였다.

    아, 둘 다 성숙해지기는 했네.

    그래서 예전처럼 감정이 극으로 치달아 귀를 막아버리진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럭저럭 대화의 꼴을 갖추긴 한 것이다.

    게다가 그 고집불통에 오만불손한 라히크가 한발이라도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니 단단히 방어 기제를 세우고 있던 마음이 살짝 녹았다.

    그래봤자 살짝이지만, 그래서인지 레그리아는 그를 새삼스레 다시 보고 있었다.

    ‘아직 광기에 물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렴 황실이 소중한 황태자가 마귀가 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수많은 신성인이 투입되어 그를 낫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초조해 보이는 건지.

    메마른 뺨, 쥐었다 폈다 하는 손. 느긋한 척하지만 그가 정말 여유로울 때를 아는 레그리아로서는 라히크가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남자가 아닌데.

    “나는 당신과 있으면서 웃는 날보다 분노하고, 상처 입고, 두려워하는 날이 더 많았어.”

    “그랬나. 내게 보여 주질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음이다.”

    “그랬겠지. 당신은 절대자의 위치에 있었고 난 모든 게 불안하고 무서웠으니까. 살려고 당신 앞에선 다 괜찮은 척해 왔거든.”

    숨소리가 거칠어지는데, 정말 괜찮은 건가?

    소파 팔걸이를 툭툭 내리치는 손동작이 갈급했다.

    문제는 자기가 저러고 있다는 걸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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