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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134)
  • 106화

    그에게는 육감이 있다.

    설명이 되는 힘은 아니다.

    이건 세상 그 자체가 그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 애를 쓰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라히크는 제 몸이 이끄는 대로 스스로를 내버려 두었다.

    이제 불안감은 더욱 증폭하여 그를 침식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호흡이 막혀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걷는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자, 잠시! 거긴 제한 구역입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시끄럽다.

    레그리아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그녀가 언제부터 연회장에서 사라졌더라.’

    이 저택 어딘가에 있을 거라 여겼다. 소란한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 성품이니 제 방에라도 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또한, 제 눈앞에서 보란 듯 벗어나려는 술수라면.

    쾅!

    본능이 시키는 대로 문짝을 뜯어낸 그는 활짝 열린 창문 앞. 환한 여름밤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여자를 보고서야 간신히 멈춰 설 수 있었다.

    아, 여기에 있구나.

    하지만 어째서 창문을 저렇게나 열어 둔 거지.

    “자살하려거든 뛰어내리는 것보다 약물을 먹는 걸 추천하지.”

    “라히크.”

    “우리 사이에 할 말이 있을 텐데. 하도 오지 않기에 기억이라도 잃어버렸나 싶었더니 그건 아닌가 보군.”

    무어라 대꾸하려는 듯 레그리아가 지독하게 예쁜 입술을 벌렸다.

    저 입술이 얼마나 단지, 그 사이에 숨겨져 있는 혀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는 안다.

    그의 시선이 꽂혀 들자 레그리아는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할 말은 많은데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인 모양이었다.

    ‘너는 피해자가 되고, 나는 너를 위한 가해자가 되고.’

    달라진 게 없다.

    그 점은 오히려 라히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침착해질 수 있다. 잠시 진정하며 호흡을 가다듬자 식도를 갉아대며 역류하던 쓴물도 다시 내려갔다.

    서로를 마주하며 침묵하는 고작 몇 분 동안 그는 다시금 완벽한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를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대등하게 됐네, 우리.”

    “대등?”

    “응. 이제 내가 당신한테 질질 끌려다니지는 않잖아.”

    “언제 내가 너를 그리했던가. 네가 있는 곳에 찾아가는 건 언제나 나였던 것 같은데.”

    방금 에화에게 개 같다 하였으나 그라고 다르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린 라히크가 실소했다.

    무엇에 그리 미쳐서 일과만 끝나면 우트가드르도 달려갔었는지.

    무엇에 그리 홀려 저 여자가 온통 거짓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도 몰랐던 건지.

    한심했다.

    그러고도 지금 이 순간, 제 눈앞에 있는 여자가 실존하는 것인지 환각인지 재어 보고 있다는 게.

    “일단…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조금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기는 했어.”

    “오해라.”

    “당신은 결코 말을 다 하는 법이 없지. 나는 들으려 하지 않았고.”

    레그리아는 다투기 싫다는 듯 우선 그렇게 부드럽게 포문을 열었다.

    의외였다.

    모스그라토에서 지내는 시간이 그리도 행복했던가. 그래서 저런 여유가 생겼나.

    ‘변한 게 있기는 하군.’

    이전의 그녀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아슬아슬하였다면 지금의 레그리아는 저만을 위해 마련된 화원에 있는 듯 보였다.

    저게 에화를 믿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존감이 올라가서인지 모르겠으나 후자라면 그녀를 위해 좋은 일이다.

    전자라면, 글쎄.

    그런 혓바닥 가벼운 자를 곁에 두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일러 주는 수밖에.

    “왜 떠났나. 웬만한 것은 다 안겨 줄 수 있었는데.”

    “내게는 웬만한 걸 안겨 주는 게 아니라 대화가 필요했어.”

    “마치 대화한 적이 없다는 듯 말하는군.”

    “뭔가 착각하나 본데, 당신이 내게 한 건 명령과 지시였지. 단 한 번도 대화였던 적이 없어, 라히크.”

    대답이 차분하다.

    혹시 그녀의 말속에 숨은 증오나 그에 대한 혐오가 있진 않은지 면밀히 살폈으나 몇 년 만에 만난 레그리아는 그조차 읽기 어려운 상대가 되어 있었다.

    낯설다.

    이런 점은.

    “내가 바란 최소한의 것을 당신은 주지 못하더라. 그래서 떠난 거야.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래서 여기에서 그 꿈은 이뤘고?”

    “……아니. 하지만 이룰 거야. 언젠가는.”

    “에화의 곁에선 힘들 텐데. 인형 놀이도 3년이면 충분하지 않았나. 그래도 녀석은 질리는 법이 없었을 테고.”

    “…….”

    “네 성격에 이 정도면 오래 맞추어 준 것이지. 돌아와라.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외유는 그만해야지.”

    그래, 원래대로 돌아가면 된다.

    레그리아는 멍청하지 않다.

    모스그라토에서 지금껏 달아날 수 없었던 건 그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겠지.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니리라. 에화를 사랑해서와 같은 같잖은 이유가 아니라는 건 이미 표정만 보아도 알았다.

    “너는 이곳에서 천천히 잠겨 죽어 가고 있지 않나, 레그리아.”

    마지막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레그리아가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녹색 눈동자에 담긴 분노와 수치스러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그를 기껍게 만들었다.

    너는 이런 얼굴을 에화에게는 보여주지 않았겠지.

    “당신은… 정말 빌어먹을 인간이야.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

    “생소하지 않은 말이군. 더 해보지. 할 말이 많은 얼굴인데.”

    그래서 너의 목소리가 끊기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내 욕을 하는 것으로 네가 하룻밤 넘게 말을 건네준다면…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녀에게 제멋대로 짝을 맺은 세비레이크의 어린놈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 선택만큼은 괜찮은 수였다.

    이 여자는 잔정이 많아 저를 지키려 든 견습 신관마저 빼돌렸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다 발휘되는 저 동정심이나 연민, 책임감 같은 것이 오직 그 하나에게만 실종된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레그리아는 그녀가 없으면 망설임 없이 목에 칼을 찔러 넣을 표드르를 두고 떠나지 못하리라.

    완벽한 족쇄였다.

    “아이를 낳으면 신성인이 죽는다는 걸 알아. 당사자인 신성인만 빼고 이 나라의 모두가 알고 있다며? 그런데 절대 말해 주지 않는다면서.”

    “그게 결정적인 이유였나.”

    “그래! 그런데도 당신은 내게 아이를 가지라는 둥, 셋이나 낳자는 둥. 헛소리를 지껄였잖아. 그게 나를 기만한 게 아니면 뭐야?”

    “학습할 이유가 없는 불필요한 정보였기에 차단한 것이다. 너는 내가 너를, 죽게 둘 것 같은가.”

    “당신은 나만 살면 돼? 다른 신성인들은 다 죽게 두고… 그 잘난 방법이 뭔지는 몰라도 결국 바뀌는 건 없는 거잖아?”

    화가 난 피부가 탐스럽게도 붉었다.

    ‘지금 내가 너를 보며 꼴려 한다는 걸 알면 넌 절대 앞으로 더는 화를 내지 않으려 하겠지.’

    그건 좀 아쉬우니 결코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라히크는 저를 향해 입을 벌리고, 눈썹을 추켜세우고, 감히 화를 내는 여인을 눈에 담았다.

    살아 있다.

    이따금 그를 돌아 버리게 만들던 싸늘하게 죽어 시체로 나타나는 환영이 아니라, 피가 돌고 소리를 지르는 산 사람이었다.

    목이 탄다.

    입 맞추고 싶어서.

    그러면 저를 미친놈으로 만드는 이 광기가 가라앉을 것도 같은데.

    “당신. 듣고 있어?”

    “다 들었다. 신성인이 출산 이후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왜 초원 연합국과 전쟁을 벌였는지도 알겠군.”

    “……여기서 초원이 왜….”

    “너의 그 다정하기 짝이 없는 전사가 알려 주지 않던가? 저들이 무엇을 독점하기 위해 싸우는지.”

    레그리아가 아는 것.

    레그리아가 모르는 것.

    그 경계를 대충 파악한 라히크는 픽 웃었다.

    “누구도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군.”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절반만 알고 있다. 거기에서 비롯된 오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지. 허나 공포에 질려 도망할 길을 찾기 전에 내게 먼저 물었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

    “하! 당신을 믿어?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그리 믿음을 사지 못할 행동을 한 기억은 없는데. 내게 네게 거칠게 굴었던가?”

    담담한 어조로 뱉은 질문에 레그리아가 비로소 움찔했다.

    피식자의 공포란 평생을 포식자로 살아온 라히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류의 감정이었다.

    사냥감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기라도 하듯 매번 달아나는 게 일이지.

    그런 차원에서 라히크는 레그리아가 보였던 행동을 납득했다.

    너는 내가 두려웠을 수 있겠구나, 하고.

    “보아라. 나는 네게 지금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응.”

    “그러니 이제 앉아서 대화를 나누지. 긴 이야기를 해야 할 테니 계속 그리 서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자상하게 어르자 머뭇거리던 걸음이 소파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자리를 잡는 것을 본 뒤에야 느긋이 맞은편으로 향하던 라히크는 잠시 멈추어 섰다.

    ‘쥐새끼가 붙었군.’

    열매에 대한 내용을 발설하지 않도록 저주가 걸려 있기도 하지만, 일단 듣는 귀가 많다.

    이래서야 지젤 로에르멜이 품은 것이 그의 씨가 아니라는 것 외에 가장 실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가 없지.

    나직하게 혀를 차던 라히크는 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이제 말해. 정말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지. 그것과 초원이 무슨 상관인지도.”

    “우선 가장 최근의 오해부터 풀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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