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대략 50분 전.
레그리아를 집무실에 혼자 둔 뒤, 어쩔 수 없이 빠져나와야 했던 에화는 몹시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X같아.’
레그리아의 짝이 되는 건 그 하나만이어야 했다.
그간 불안해서 근처 마을도 내보내지 않고 귀하게 여겨왔는데.
그랬는데….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에화의 눈이 반쯤 돌아 번들거렸다.
‘죽인다. 죽일 거다. 너만큼은 꼭.’
그래, 없애 버리면 되지.
어차피 죽어 버리면 한 줌 재로 사라질 것 아닌가.
그러니까 괜찮다. 오늘만 지나면 퀴제의 모든 전력을 저 도둑놈과 겨울 망루에 퍼부을 테다.
입술이 피가 나도록 잘근잘근 씹으며 에화는 테라스로 이동했다.
“꺅!”
“꺼져.”
막 키스를 나누던 젊은 연인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었지만 흉포해진 에화의 눈엔 귀찮은 벌레 새끼로만 보일 뿐이었다.
착하게, 상냥하게. 레그리아가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만 있어 왔던 에화는 지금 여기에 없다.
극도의 충격 앞에서 이성이나 붙잡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여기가 모스그라토령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거리낌 없이 보이는 것들을 죄 목 졸라 죽였으리라.
‘여긴 안 돼. 레그리아가 좋아하는 정원이고, 레그리아가 서 있던 테라스고. 레그리아가 걸었던 공간이니까.’
더럽히면 안 되지, 안 돼.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씩씩거리는 숨이 참아지질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녀와 짝을 맺다니!
이보다 더 질투가 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존재한단 말인가.
통제되지 않는 시기와 욕망이 뒤섞여 덩치를 부풀린다.
레그리아와 함께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에화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첫눈에 반해 심장이 뛰었고, 그다음엔 닿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고.
제 품에 온전히 안고 난 뒤엔 어떻게든 마음 한 조각이라도 얻어 보려 개처럼 꼬리를 흔들어 댔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레그리아는 안식이었다.
살짝 허스키한 레그리아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 절대 달콤하게 굴어 주지 않지만 상관없다. 그건 그가 하면 되니까.
에화는 레그리아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 놓여 있을 때, 제일 설렜다.
이제 이 아름다운 저택을 울리는 연주가 없으면 너무 이상할 것 같은데.
사박사박 정원을 걷는 모습이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고요한 눈빛.
고용인 모두에게 친절히 굴고 작고 귀엽고 어린 것엔 특별히 더 다정한 성품.
그런 것들이 모여 그녀를 이룬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게 오직 밝고 예쁜 모습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에화가 반한 건 라히크를 앞에 두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 강직함이었다. 고집이었다.
천하에 누가 라히크를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
레그리아는 천하의 라히크 바라키엘 벨리그레엄을 조련했다.
더 재미난 점은 그게 레그리아가 인식을 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알려 주고자 했다. 매일 예쁘니까 예쁜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고 그녀만을 위한 낙원을 만들어 주려 했다.
모스그라토 저택은 레그리아만을 위한 이상향이어야 한다.
시내에 나가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집안에 모든 게 다 있는데.
바란다면 정원을 치우고 거대한 시장 거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손님은 오직 그녀와 그, 둘뿐인 곳으로.
마음은 점점 깊어질 뿐이고 끝 간 데를 몰라 괴로웠다.
태어나 이만큼 좋아해 본 사람이 또 있을까.
보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혼자 좋아하는 거라 하더라도 어쨌든 그의 공간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
처음엔 그 정도로 여겼던 마음이 괴물처럼 자라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1년이었다.
여름에서 여름까지.
그녀는 딱 그 정도의 시간 만에 에화가 답을 구하게 만들었다.
혼자 좋아하지 말고 같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 정도는 바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정도는…….
“씨발.”
에화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레그리아가 싫어하기에 끊은 담배가 급격하게 당기는 날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한심하게 빼앗겼지?’
정신 접촉을 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있겠나 싶었다.
레그리아의 말대로 표드르 놈의 내면에서 그녀의 영향력을 줄이면 좋은 것 아니냐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거기서 표드르가 갑자기 미쳐서 절대복종을 하겠다고 결정할 줄 누가 알았느냔 말이다.
“……아, 엄마. 보고 싶어.”
난간에 머리를 박은 에화는 그대로 쿵쿵 몇 번 더 박았다.
그는 천재다. 원하기만 하면 모든 수를 읽고 대처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표드르 놈에 대해서는 놓쳤다. 놓치고 말았다.
‘안이했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아서.’
이번에야말로 레그리아가 그의 마음에 대답을 해 줄 거라는 기대감에 들떠서는 멍청하게.
“멍청해 보이는군.”
“그래, 멍청…… 뭐?”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홱 돌아보자 거기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재수 없는 놈이 있었다.
원래는 제일이었는데 방금 표드르 놈이 1위로 올라갔다.
문가에 비스듬히 서서 에화를 내려다보고 있던 라히크는 느긋이 걸어 들어와 문을 닫았다.
“레그리아는.”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 하지?”
“함께 있지 않은 걸 보니 쫓겨나기라도 했나 보군. 버림받은 개새끼 같은 꼴을 보니 확실하고.”
“나는 형이 진짜 싫어. 알아?”
“이거 우연인데. 너와 내가 같은 생각일 때도 있군.”
라히크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오늘 보고 꼬시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바짝바짝 피가 마른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잖아. 저대로 두면 곧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근데 그게 내 미래가 될 줄은 몰랐지.’
에화는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 애쓰며 일어섰다.
하도 쪼그려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려 그러잖아도 튀어나와 있던 입이 더더욱 삐죽거렸다.
“그녀는 결국 널 선택하지 않을 거다.”
“뭐? 속 긁으러 온 거면 좀 꺼지지. 오늘은 내 생일이거든?”
“그러니 충격을 예방하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다. 생일 선물은 충고라고 해 두지.”
라히크가 쭉 뻗은 눈썹을 까딱이며 태연히 대꾸했다.
레그리아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도 주고 싶지 않지만 그 충격, 어디 한번 너도 받아 봐라 싶어 에화는 심술궂게 지껄였다.
“그런데 어쩌면 좋아. 형도 나도 떨거지가 됐는데.”
“나쁘지 않은 자기 객관화로군.”
“아니, 진짜로. 방금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가 레그리아한테 짝을 맺었거든.”
100년 전에 나타났던 특별한 신성인.
모든 신성기사가 짝을 맺을 수 있었던, 그 누구와도 정신 접촉을 할 수 있었던 전설적 존재.
그에 관한 기록은 사실 이전부터 간간이 있어 왔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 100년에서 길면 300년 정도의 주기로.
하필이면 레그리아가 그런 영혼일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알았더라면 아예 새장을 만들어 거기다 가뒀겠지.
“……그런 거였군.”
허나 라히크의 반응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담담했다.
에화는 눈을 치뜨며 짜증을 부렸다.
“반응이 뭐 그래? 더 격하게 화를 내야지!”
“글쎄. 그래서 네가 아직 어린 거다.”
“난 어린 게 아니라 순애보인 거거든?”
“그런 것치곤 인형을 빼앗긴 개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어때, 인형 놀이는 즐거웠나?”
라히크의 얼굴에서 거짓의 기미를 찾아보려 애를 썼지만 어디에도 거짓은 없었다.
정말로 담담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라히크는 그를 향해 나직하게 한마디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잖아도 넘어져 상처 난 무릎에 소금물을 붓는 격이었다.
“레그리아는 너 같은 자를 싫어한다. 3년간 웃어 주느라 상당히 힘들었겠지.”
“……형이 뭘 안다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알지. 레그리아가 가진 열등감.”
“열등감? 그녀에게 무슨 열등감이 있다고? 레그리아는 완벽해.”
내 공주님한테 무슨 미친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며 내뱉자마자 라히크가 장갑 낀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는 몸을 떨었다.
정말 웃겨서 웃는다는 투라 더더욱 사람을 열받게 만든다.
잠시 뒤, 라히크는 손을 내리고 다시금 그를 응시했다. 입매가 비틀린 채로.
“모르겠지, 너는. 그러니 네가 하는 그것이 소꿉놀이일 수밖에 없는 거다.”
하 하고 호흡인지, 미련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뱉어낸 라히크가 절제된 동작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화는 아직 이 상황을 좀 더 슬퍼해야 했다. 눈물에 잠겨 죽어도 모자랄 것처럼 서글픈데 냉혈한 같으니라고는.
그렇게 라히크를 욕하던 에화는 차가운 난간에 등을 대고 스르르 미끄러지듯 앉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된다.
그런 자신의 단점을 매우 잘 알지만 딱히 고칠 생각은 없었다.
저렇듯 징그럽게 감정을 완벽히 통제하는 형을 보고 있자면 그냥 이쪽이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에화가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때쯤.
테라스를 빠져나온 라히크는 자신의 감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속이 울렁거린다.
당장 토악질을 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지난 열여덟 시간 동안 먹은 거라고는 술밖에 없으니 뱉어낼 것도 딱히 없었다.
‘이상한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가슴이 수런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온 세상이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경고? 하지만 무엇을.’
여기는 안전하다.
이 세상에서 황궁 다음으로 안전한 곳을 고르라면 모스그라토령이지 않은가.
레그리아는 상처 하나, 흠집 하나 없이 무사할 텐데.
그녀를 보지 못한 세월이 길었다.
이제 와서 한두 시간 눈앞에서 사라져 있다 하여 불안증이 닥칠 것은 아니었다.
라히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레그리아는. 지금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