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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34)
  • 104화

    이건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그녀에게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레그리아도 눈치라는 게 있다.

    모스그라토는 은밀히 사병을 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권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이 정보를 이용할 수는 없을까.

    톡톡.

    편지를 두드리던 레그리아는 일단 중요한 부분을 따로 찢어 두었다.

    [그 다음엔 식량 등을 빌미로 겨울 망루의 세비레이크와 손을 잡고, 누님과 세비레이크 공자를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누님에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살아야 할 인생이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누님이 유순했다면 모를까…

    양친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비트리체 누님은 그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제멋대로였으며 통제되지 않는 성정이었습니다.

    이는, 레그리아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비트리체는 그랬지.

    그리운 이름이다.

    오랜만에 떠오른 친우의 이름을 살며시 쓸어본 레그리아는 한숨을 흘려냈다.

    [저는 가문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주실 리 없지요.

    애초에 어머니의 사후, 가문이 건재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기에 어머니는 그러한 말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님은…….

    위에 적은 이 모든 사실들을, 스스로 알아냈습니다.

    단 하나.

    제게 가문을 물려주지 않을 거라는 것 빼고는요.]

    편지지를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비트리체는 실로 긍지 높은 공작 영애다. 그 오만함, 자신만만함, 당당함. 그녀로서는 발끝도 따라갈 수 없는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헌데 그런 비밀들을 알게 되었다면… 그러고도 공작이 네게 작위를 계승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면.

    ‘마땅한 제 것을 빼앗긴 것처럼 느꼈을 거야.’

    그래서 디트리히를 찾아갔고, 한쪽 눈을 대가로 받아 갔다.

    그다음엔 통로인에 자원-

    ‘내게 자유롭게 살라고, 그렇게 말하던 것엔 더 깊은 뜻이 있었구나.’

    로에르멜 가문의 비사에 대해선 그녀가 무어라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우스운 건 공작이 지젤을 되찾아 왔다는 점이었다.

    첫째 딸이 그렇게 통로인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결혼시킬 상품이 없어져서.

    ‘당신도 상품이기 싫었으면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 가해자는 다시 피해자가 되고.

    [어머니는 지젤을 시궁창에 살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마 지젤을 다시 데려와 처음부터 다 가르칠지, 아니면 친딸은 없는 셈 치고 어디서 적당한 아이를 구해 딸이라 할지 고민이었겠지요.

    헌데 찾아가 보니 지젤이 신성인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사교계에 대한 걸 꽤 잘 알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신성인이 깃든 것이죠.]

    그랬구나.

    이렇게 세 장의 편지가 모두 끝났다.

    쓰다가 급히 마무리를 지은 것인지 마지막이 어색하지만….

    ‘뒷장?’

    이만 다시 읽는 것도 멈추고 봉투에 편지지를 넣으려던 레그리아는 멈칫했다.

    뒷면을 볼 생각을 못했는데 거기에 채 읽지 못한 내용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비밀리에 신성인을 모으고 있습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본래 어머니의 계획은 지젤을 그 신성인들과 함께 초원에 보내려 했다는 겁니다.

    초원인들의 신부로서, 평화를 위한 화친혼을 위시해서요.

    그런데 누님은 사라졌고, 지젤은 뭣도 아닌 남자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어머니는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십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사교계에 나오겠다는 생각을 하신 거라면 정말 몸조심하십시오.

    대낮에도 혼자 계시지 마시고, 늘 주변을 살피십시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추신. 언젠가 누구에게는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는데… 그다지 재미없으셨겠지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셀린을 빼돌린 값은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으로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디트리히 로에르멜.]

    편지가 끝났다. 더 살펴봐도 이제 정말 읽지 않은 글자는 없었다.

    ‘초원. 초원이라고.’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지 않아 편지를 태울 수는 없지만 다행히 이 드레스에는 비밀 주머니가 있다.

    레그리아는 다 읽은 편지를 비밀 주머니 안에 넣은 뒤, 거기에 있던 피리를 대신 빼내 손에 말아 쥐었다.

    ‘초원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리울까 봐 실수로라도 떠올리지 않으려 하는 남자가 별안간 시야를 뒤덮었다.

    3년이다.

    그동안 3년이란 말을 참 많이 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다.

    <에화와 함께 보낸 3년>이라는 문장보다 <비칸을 만나지 못한 3년>이라는 문장의 무게감이 훨씬 크다고 해야 할까.

    ‘몸이 바뀌는 한이 있어도 비칸을 보러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는 싶다.

    전쟁 후에 몸은 건강한지, 힘들지는 않은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다치진 않았는지.

    비칸이 새를 보내주는 걸 보면 이따금 그도 그녀를 떠올린다는 것 같은데, 그렇다 해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파쥬 현상은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일단 바뀌게 되면 임신을 한 상태가 되니까 몸도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죽게 될 테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초원에 가서 비칸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아, 레그리아는 애꿎은 피리만을 문질렀다.

    그러면 마법처럼 그가 나타나 주기라도 할까 봐.

    삐이이.

    그동안 에화의 눈치가 보여 한 번도 불어 본 적 없던 피리였다.

    지금만큼은 확실히 에화가 주변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라히크라는 강적이 있으니까.

    ‘라히크의 성질에 에화가 나와 단둘이 있게끔 할 리가 없어. 어떻게든 잡아 두며 심술을 부리겠지.’

    그 증거로 바깥엔 인기척이 없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보니 역시나, 복도 전체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에화는 자신이 근처에 있을 수 없는데 다른 인간이 있도록 놔둘 만한 성격이 아니지.

    복도의 양 끝에서 지키고 서 있더라도 문 앞엔 없다.

    덕분에 레그리아는 마음껏 피리를 불어 볼 수 있었다.

    ‘이게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신기해라.

    치마 주머니에 숨길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였다. 이런 게 플루트처럼 맑은 소리를 낸다는 게 재미있다.

    햇살이 좋은 날, 언덕에 앉아 다 함께 피리를 불면 장관일 텐데.

    그런데 그녀가 장난삼아, 또는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피리나 불며 장난을 치고 있는데 한 마디마다 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뭐지?’

    일정한 간격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끈질기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레그리아가 그 창문을 연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연회장에 돌아갈 시간을 늦춰 보려고.

    라히크를 마주할 순간을, 에화를 밀어낼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회피해 보려는 얕은 수작.

    그런데 그 핑계가 얇아질 대로 얇아져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인연의 실을 다시 붙일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문이 열린다.

    그러자마자 덩치가 큰, 근육이 부풀어 있는, 머리칼이 청회색인, 무심한 듯 다정한 눈동자가 하늘빛인…….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남자가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왔다.

    아니, 창틀에 앉았다고 해야 하나.

    늘 보내오던 새가 아니라 이번엔 비칸이다. 진짜 비칸.

    레그리아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어떻게…….”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새를.”

    “보냈었지.”

    남자는 기억 속에 남겨진 것보다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완연히 다 자란 수컷임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분위기가 조금은 감도는 건 그녀를 보는 표정 때문일까.

    비칸은 꼭 따스해서 녹아내릴 것만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나의 할리카. 초원으로 가자. 너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함께 도망하던 기억이 눈앞을 뒤덮는다.

    기이하게도 힘들고 지쳤던 기억은 퇴색되고 그 자리에 채워지는 건 물방울이었다.

    그와 함께 개울에서 발을 담갔던, 그가 구해 온 열매를 먹었던, 들킬까 싶어 솔방울을 모아 작은 불을 피워 놓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우리의 탈출극은 아슬아슬했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의 삶에 한 부분을 차지했다.

    “나를 찾아올 줄 몰랐어. 아마도 다른 사람과 반려를 맺지 않았을까, 했는데.”

    “전쟁, 그 이후의 문제까지 빠질 수 없었을 뿐이다.”

    “그랬구나.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으니까?”

    비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전쟁 후의 초원보다 전쟁을 겪지 않은 모스그라토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 판단한 것이다.

    안전. 평화. 공존.

    모두 레그리아가 갈망하는 단어들.

    비칸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꼈다. 두려웠지만 높은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할 수 있었다.

    레그리아는 그의 책임감이 좋았다.

    예절이니 규칙이니 문명이니 하는 것을 다 떨쳐내고 먹고, 자고, 생존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기간.

    라히크에게 본격적으로 쫓기기 전의 일주일이었던가.

    그때가 레그리아가 이 세계에 와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갈래. 갈 거야, 비칸.”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대답이었다.

    이건 어쩌면 두통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아까 마신 샴페인 때문일지도.

    무엇이 이유든 간에 상관없다.

    레그리아는 비칸의 목에 홀린 듯 팔을 걸었다.

    “그날 그때처럼 나를 데리고 떠나 줘.”

    그렇게 속삭인 레그리아의 허리를 비칸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레그리아가 창문을 넘으려던 바로 그때.

    “아이고, 이러시면 안 되십니다요.”

    “비켜라.”

    “여긴 집무실입니다! 누구라도 함부로 들어가실 수 없다는 걸 아시… 컥!”

    집무실의 바깥문이 열렸다.

    굉음이 나는 걸로 보아 문짝이 통째로 뚫렸거나 부서진 듯했다.

    ‘라히크!’

    일순, 3년 전 그날이 오버랩되며 차디찬 현실이 머리 꼭대기부터 쏟아져 내렸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그 몇 초 사이, 레그리아는 비칸에게서 확 떨어져 나왔다.

    ‘가.’

    이미 늦었다.

    여기서 들키면 라히크가 문제가 아니라, 에화가 쫓아올 텐데 그러면 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현실을 외면하고 유토피아로 떠날 수는 없는 거구나.’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잠시 꿈을 꿨을 뿐이다.

    비칸이 데려가는 길의 끝에 낙원이 있을 것 같아서.

    “자살하려거든 뛰어내리는 것보다 약물을 먹는 걸 추천하지.”

    문이 열린다.

    창문을 등지고 선 그녀의 앞에 찬란한 금발을 지닌 금안의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밉살스러운 독설과 함께.

    그는 실로 변하지 않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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