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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3/134)
  • 103화

    “…….”

    “그리고 한번 맺은 짝은 풀 수가 없지. 혼자만 종속되기로 했든 아니든.”

    할 수만 있다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듯 분홍빛 두 눈이 위험하게 가라앉아 있다.

    레그리아는 참았던 숨을 짧게 토해냈다.

    에화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둑했다. 저 정도로 화가 나 있는 건 처음 보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싶어 레그리아는 일단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막상 튀어나온 건 달래려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러면 만약 내가 없어지면 표드르는…….”

    “죽겠지. 마귀가 되던가.”

    에화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역시 접촉하게 두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게 보였으나 레그리아 역시 아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표드르가, 그녀가 신황청에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그가.

    이번엔 그녀가 결코 이 세상에서 달아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존재 자체를 족쇄로 만들어 채운 것이다.

    ‘내가 한 번 그를 이용했으니 이번엔 표드르가 나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그래. 할 말은 없었다.

    공평하다면 공평한 거겠지.

    “일단 지금 상황을 좀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맞아. 좀… 혼자 있고 싶어.”

    표드르에게서 비트리체를 영영 빼앗아 버린 것에 대한 대가 같은 걸까.

    사람이 저렇게 확 변해서 그녀를 숭배하는 게 너무 이상하고 무서웠다.

    짝이라는 게 저런 거구나.

    ‘아무리 내가 편해지라고 했지만.’

    그걸 그렇게 받아들일 줄이야.

    이마가 뜨끈했다. 열이 오르는 기분에 레그리아는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어 버렸다.

    집무실 안에 적막이 감돈다.

    이 충격적인 상황을 앞두고 다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 명은 분노, 한 명은 공황, 다른 하나는… 고민.

    “참, 이걸 받아 주십시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내 심각한 얼굴이던 디트리히가 잊을 뻔했다는 듯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편지입니다. 제가 레그리아 님과 오랫동안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듯하여 만나기라도 하면 드리려고 써 두었습니다.”

    “무슨, 내용이기에 편지까지….”

    “아셔야 할 내용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디트리히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에화는 몹시 움직이기 싫어 보였지만 그녀가 고개도 들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늪을 불러냈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알았지?”

    “그럴게. 네 생일에 이렇게 돼서 미안해.”

    “아냐. 내 생일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벌써 크게 상심한 것 같은데.

    어디 가서 울기라도 하는 것 아닌가 몰라.

    혼자 남은 뒤, 몇 번 길게 심호흡을 한 레그리아는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여기에서 얼마나 쉴 수 있을까.

    길어 봤자 한 시간 정도겠지.

    그보다 길어지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에화가 오늘을 얼마나,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기에 뒷수습이라도 좀 해 주고 싶었다.

    ‘그럼 그냥 이걸 지금 읽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 하루가 끝난 다음에 읽어서 굳이 충격을 두 배로 늘릴 필요 없다.

    붉은색 봉투를 뜯자 그 안에서 솔방울 냄새가 나는 편지지가 나왔다.

    단 세 장정도의 편지.

    정갈한 필체로 쓰인 내용의 첫 문장은 이러했다.

    [로에르멜 공작가 잔혹사]

    자극적인 제목이었으나 그만큼 눈길을 확 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에 레그리아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문장까지 확인했을 때.

    그녀는 로에르멜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진정하게 알 수 있었다.

    * * *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가문에 얽히고설킨 비밀은 무수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을 고르자면 역시 어머니의 이야기일 겁니다.

    어머니 본인에게도 잔인하며 그 자식인 저희들에게는 더더욱 잔인한… 그야말로 잔혹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어째서 수년간 입을 다물어 오던 진실을 밝히게 되었는지는 미리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저는 누님이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를 내버리고 마셨는지를 알리고 싶습니다.

    누님이 제 한쪽 눈을 앗아간 이유에 대해서도요.

    누님은 미친 게 아닙니다.

    그저… 오래 슬퍼하셨을 뿐. 그 슬픔이 켜켜이 쌓여 독이 되었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통로인에 자원하신 누님은 그 바람대로 육신에서 영영 떠나가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 친애하는 어머니, 로에르멜 공작께서 레그리아 님께 방문하신 적 있으십니까?

    따로 찾아뵌 적은요.

    피가 이어진 딸이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단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을까요.

    그건……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찾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서 그리 내버려 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모스그라토 공자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시겠다 합니다. 그것도 직접요.

    저는 여기서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결코 이유 없이 행보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만약 레그리아 님이 모스그라토령에 있음을 알아채시고 가시겠다 하는 거라면.

    어머니가 내놓는 제안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독입니다.]

    단정적인 어조로 쓰인 첫 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레그리아는 이미 읽은 첫 장을 두어 번 더 읽은 뒤, 다음 장으로 눈길을 옮겼다.

    [누님의 머리 색은 채도가 높은 빨강이지요. 하지만 제 머리 색은 채도가 낮은, 어두운 붉음입니다.

    지젤의 머리 색은 또 분홍에 가깝지요.

    하지만 모친과 부친, 두 분이 각기 적발과 은발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섞여 분홍색이 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제 머리 색이지요.

    눈치채셨을까 싶지만, 저는 누님의 친동생이 아닙니다.

    아니, 아예 피조차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사실을 어린 제게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상기시켰습니다.

    너는 진짜 로에르멜이 아니며 로에르멜의 이름을 입고 있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요.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침실에 불려 가면 거울을 보며 그런 말을 반복해서 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 줄 바로 그 시간에 말입니다.]

    앞선 장보다 좀 더 꾹 눌러 쓴 필압이 느껴진다.

    단 한 번도 디트리히가 친동생이 아닐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어, 레그리아는 이 부분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당황을 위로할 새도 없이, 문장은 날개 돋친 듯 이어졌다.

    [우선 어머니에 대해 이해를 하기 위해선 로에르멜 공작가가 본래 남아 선호 사상이 극심한 곳임을 밝혀야겠습니다.

    어머니가 공작위를 그 손으로 빼앗아 거머쥐시기 전까지, 저택 내에서 여아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살아야 했다더군요.

    인형. 판매하기 좋은 상품. 잘 가꿔 비싼 값에 남자에게 팔아넘길 것.

    딸이 그런 대우를 받는 곳에서 공작 부인이라 하여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첫째로 딸인 비트리체 누님을 낳았을 때, 집안 분위기가 어떠하였는지는 쉽사리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전 공작은 사창굴을 자주 드나들었고 그걸 남자로서 대단한 자존심이라 여겼습니다.

    긍지 높고 자존심이 강하며 능력마저 뛰어나던 어머니는 그런 남편과 가문을 증오하였지요.

    남편뿐만 아니라 남편의 남동생들도 마찬가지로 증오했습니다.

    만약 공작이 일찍 사망할 시, 모든 유산은 적법한 후계자인 아들에게 갑니다.

    하지만 아들이 없다면 공작 부인과 딸은 무시하고 모조리 남편의 남동생에게 가게 됩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어머니의 위치는 위태하고 어쩌면 모든 것을 잃고 수녀원에서 여생을 썩혀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만약 둘째도 딸일 시, 바꿔치기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을 거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게 ‘합리적’이었다.

    아직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자식의 성별로 인해 가진 것을 부당히 잃을 바에야, 어차피 자식은 하나 있으니까.

    그런 레그리아의 추측은 다음 장에서 답이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빈민가의 붉은 머리 임산부를 구해 두셨지요. 그리고 출산 당일, 전 공작이 어김없이 사창가에 간 날.

    둘째 딸과 빈민가의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를 바꿔치기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디트리히 로에르멜이 되었고 지젤 로에르멜은 그대로 빈민가로 가게 되었지요.

    하지만 제아무리 아이를 바꿔치기했다 하더라도 결국 미봉책.

    한숨 돌린 어머니는 권력을 위해 다음 걸음을 옮겼습니다.

    유언장을 조작하고, 사고로 위장해 남편과 그 동생 하나를 죽였지요.

    그 이후에는 어린 아들이 있음을 내세우고 유언장을 증거로 주장해 공작위를 대리 계승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황제가 승인하지 않으면 작위를 받을 수 없는데…

    여기에서 어머니의 수완이 드러납니다.

    로에르멜의 수장으로서 중립파를 키우고, 황태자가 제위를 물려받을 시점에 그 파벌을 통째로 황제파로 넘겨주겠다.

    그게 어머니가 황제에게 내민 거래 조건이었지요.

    황제 역시 전 공작과 그 동생들이 손도 쓸 수 없는 쓰레기임을 알고 있었기에 무난히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거래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황제는 제위를 에화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는 건데.

    중립파의 현재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여기도 끼기 싫고 저기도 끼기 싫은 자들이 로에르멜 공작의 비호를 등에 업고 눈치를 보기 딱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통째로 황태자파가 된다면….

    모스그라토에는 승산이 전혀 없다.

    ‘에화는 이 사실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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