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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2/134)
  • 102화

    신성 기사의 내면은 결코 그 본인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는다.

    제아무리 잘 치유해주고 싶어도 당사자가 거부하면 신성인이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심하게는 튕겨 나가기까지 하니까.

    그렇다면 저렇게 완전해진 것 역시 그녀의 힘을 받아들이겠다는 표드르의 의지라는 소리인데…….

    “레그리아 님. 레그리아 님! 괜찮으십니까.”

    “아….”

    깜빡, 깜빡.

    몇 번 눈꺼풀을 움직이자 흐릿하던 시야에 초점이 잡힌다.

    디트리히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상 증상이 있는지 살펴 보았지만 무탈하십니다. 다행이에요.”

    간이 의자에서 일어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게 느껴졌다.

    “!”

    그런데 갈지자로 움직이다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그녀를 단단히 붙잡는 팔뚝이 있었다.

    뺨에 내리닫는 눈부신 은발에 레그리아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표드르다. 동시에 깨어난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라, 심장 박동이…….

    쿵쿵쿵쿵.

    빠르게도 뛰어댄다.

    그의 너른 가슴에 맞닿은 그녀의 등을 통해 고동이 번져오는 것만 같았다.

    ‘뭐랄까. 에화의 것보다 더 빠르고 거센 느낌이야.’

    이렇게 말하면 조금 그렇지만 있어야 할 곳을 비로소 찾은 심장이 기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그 팔, 치우지? 잘리기 싫으면.”

    몹시 심술궂은 한 마디가 귓전을 때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이러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에화가 옆쪽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입이 비죽 튀어나온 게 아주 불만이 많은 듯한데.

    난간에 위험하게 기대서는 몸을 까딱거리는 게 인내심이 타들어 가다 못해 심지만 남아 있는 걸로 보였다.

    “레그리아 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에화에게 말을 건네기도 전, 레그리아의 허리에서 깔끔하게 손을 뗀 표드르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숙여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그는… 손등도 아닌 곳, 신체의 가장 아래.

    그녀의 발 등에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온몸을 낮게 하여서.

    그가 그럴 줄은 몰랐기에 멍하니 내려다보던 레그리아는 문득 알아차렸다.

    아까 마주한 남자와 지금 이 남자는 대단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활력이 돌아?’

    다 부서진 채 죽어가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온전한 하나가 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뚝 선 얼음 성.

    이보다 더 지금의 표드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너무 도드라지는 변화다.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래 고민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이 무엇일지.”

    “…….”

    “당신은 제 마음의 기근을 채워 줄 풍요입니다. 당신을 따르면 앞으로 저는 더는 괴롭지 않겠지요.”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고백이 아니다.

    이건 그보다는 좀 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연보랏빛 눈동자에 갈망이 어린다. 성적인 느낌이 아닌, 신의 뜻을 갈구하는 종의 그것과 같았다.

    “변태네. 에비.”

    말문이 막혀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손쉽게 테라스를 건너뛰어 다가온 에화가 레그리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래도 표드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온히 질문할 뿐이다.

    “그자가 당신을 괴롭게 합니까?”

    “에화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만에 하나 누군가 나를 괴롭게 한다면…?”

    “제거하겠습니다. 당신의 평안을 위해.”

    혹시나 싶어 던진 질문에 표드르는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대꾸했다.

    그녀가 달을 가리켜 저것이 악마라 칭하면 기꺼이 검을 빼 들고 형체 없는 적을 향해 휘두를 것처럼.

    ‘반문조차 없이 행하겠다니.’

    아예 스스로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느껴졌다.

    ‘아, 어지러워.’

    계획한 것과는 다른 일이다.

    아마 아까 내면세계에서 그녀의 몸 주변으로 뻗어져 나왔던 빛줄기가 원인인 것 같은데, 당장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다.

    완전한 성을 구축한 그의 내면이 지금 와서 다시 부서지거나 녹아내려서 바뀔지도 의문이었다.

    이젠 그녀 외에 다른 누구도 표드르의 내면에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꼭 짝이라도 맺은 것처럼…….

    “당신을 괴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고 이 자리 있을 테니 필요하실 때 불러 쓰시면 됩니다.”

    “도구가 되겠다는 거야?”

    “도구든, 검이든, 연인이든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말이 통하지 않아.

    할 말을 잃은 레그리아를 에화가 이끌었다.

    “일단 가자.”

    “하지만…!”

    “그건 건강하지 않은 일이라거나 하지 말라고 해 봤자 소용없을걸? 쟤 눈이 완전히 맛이 갔어. 내면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진 모르겠지만 저게 어떤 상태인지 내가 알아. 가르쳐줄게.”

    떠나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던 표드르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

    레그리아가 에화와 함께 사라졌을 장소를 향해 있다.

    그건 마치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듯했다. 레그리아는 늪 능력으로 사라졌음에도.

    ‘연결이 느껴진다. 일방적이지만 상관없다.’

    언제든 그녀가 도움을 청하면 달려가겠다는 듯이.

    그 외의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에선 찬연한 광기가 느껴졌다.

    ‘아내로 맞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욕심내지 않겠다. 내 곁에 묶어두려 하지 않겠다. 나는 그저 그녀가 필요하다 할 때 나서면 그만이니.’

    이게 표드르의 결정.

    그는 완전한 종속을 통해 그녀를 갖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면 그녀는 반드시 주기적으로 그를 찾아야 한다.

    쌓여 가는 광기를 나아지게 해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레그리아뿐일 테니까.

    ‘아무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평화롭구나.’

    매번 들끓으며 이런저런 주장을 해대던 내면이 고요하기만 하다.

    비로소 그의 호수에는 균열이 일지 않았다.

    * * *

    “너는 왜 따라온 거야?”

    잠시 뒤, 에화가 레그리아를 데려온 곳은 저택 내의 에화 전용 집무실이었다.

    하지만 디트리히를 함께 데려올 생각은 없었기에 에화는 덜컥 짜증을 부렸다.

    “늪 능력을 타고 이동하면 어머니께서 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실 테니까요.”

    단번에 공간을 이동한 게 신기한지 제 몸을 더듬던 디트리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

    “레그리아 님께 더 드릴 말씀도 있고요.”

    “참 나. 다행인 줄 알아. 늪 능력으로 세 사람까지는 한 번에 옮길 수 있으니까.”

    “예, 뭐. 그것참 감사합니다?”

    “예쁜아. 네 동생, 쟤 너무 싸가지 없어.”

    생각보다 에화와 디트리히가 잘 맞네.

    둘이 아웅다웅하는 걸 들으며 소파에 앉은 레그리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방금 있었던 일을 되짚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디트리히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식은땀이 나세요, 레그리아 님.”

    “아, 챙겨줘서 고마워.”

    연적이 아니니 어떻게 못하겠는지 지켜보던 에화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얼굴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중요한 건 이거야. 이유가 뭐든, 왜 저렇게 됐든 간에 세비레이크 경은 방금 너를 짝으로 삼았어.”

    “…어떻게 그게 가능해? 난 연결이고 뭐고 하나도 느껴지는 게 없는데.”

    “맞아. 보통 짝이 되는 건 일방적일 수가 없어. 보통은. 하지만 저놈의 상태는 분명 짝을 맺었을 때 나오는 상태야.”

    절대복종.

    그렇게 중얼거리던 에화는 쾅 하고 탁상을 걷어찼다.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에화가 열을 식히는 동안, 이번에는 디트리히가 나서서 설명을 더했다.

    “형은… 내면에 감춰져 있고 억눌러 놓았던 갈등이 아마 컸을 겁니다. 레그리아 님께 이끌리지만 그게 제 누님을 배신하는 일이 된다고 여기셨으니까요.”

    “…응.”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던 차에 정신 접촉을 했고, 형은 그냥 그 순간… 갈등을 더 이어가지 않기로 한 모양입니다.”

    서투른 설명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

    “그게 아마 형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알겠는데.

    “내가 뭐라고 나랑 짝을 맺어…….”

    “그보다는, 글쎄요. 누님에 대한 죄책감과 레그리아 님에 대한 마음을 하나로 합치면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레그리아는 침묵했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원래 짝은 한 사람만 맺을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보통은. 하지만 100년 전에, 모든 신성 기사와 정신 접촉을 할 수 있고 그러고도 멀쩡한 신성인이 있었어.”

    그때였다.

    “소문으로는 다섯 명과 동시에 짝을 맺었다던가. 신성인과 쌍방으로 맺는 건 한 명뿐이지만 다른 신성 기사들도 일방적으로 그 신성인을 짝으로 둘 수 있었어.”

    탁상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던 에화가 느리게 허리를 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린 창밖에 등불이 하나둘씩 켜진다.

    벌떡 일어서 그 앞에 선 에화는 마치 망자를 죽음의 세계로 끌고 가는 사신처럼 보였다.

    “알다시피 짝은 신성 기사에게 몹시 특별한 존재야.”

    “응.”

    “짝의 곁에 있거나 작은 스킨십을 하는 것만으로도 신성 기사는 환희에 떨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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