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34)
  • 101화

    이쪽으로 귀를 쫑긋 열어놓고 있는 인파를 헤치고 디트리히가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와 조금 길러서 묶고 있는 붉은 머리칼.

    진짜 제 누나도 아닌데 누나의 몸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와준 착한 동생이다.

    다행히 디트리히는 표드르처럼 망가진 모습은 아니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테라스로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두 분이 대화 나누시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막고 있겠습니다.”

    “고마워. 인사를 더 하고 싶은데 적절치 못한 상황이기는 하네. 나중에 따로 연락할게, 디트리히.”

    “예, 그럼 이쪽으로.”

    라히크와 에화의 기운이 손에 잡히기라도 할 것 같이 선명하여 몹시 부담스럽다.

    슈만과 있을 때는 괜찮아 하더니 지젤과 이야기를 할 때엔 날카로워졌고, 지금은 벼린 칼 수준이다.

    어찌나 콕콕 찔러대는지, 원.

    표드르와 테라스로 나가자 그제야 호흡이 편안해졌다. 뒤따라 들어온 디트리히는 일단 문을 닫아 잠가 버렸다.

    그러고는 누구도 제 입 모양을 읽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문을 등지고 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렇게 따로 찾아온 건… 레그리아 님께서 표드르 형님과 대화하고 계신 지금이 아니면 제겐 차례가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셀린을 빼내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는 이미 이전에 했다. 에화를 통해서.

    지금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탓에 그런 이야기는 가볍게 건너뛸 필요가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를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노골적인 본론인데.

    물론 레그리아는 로에르멜 공작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들어 알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어 정확히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는 모르되 조심해야 하는 건 알고 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장기 말로 본다던가.

    쓸모가 없으면 가차 없이 버려 버린다거나 하는 건 로에르멜 공작을 늘 수식하는 소문이었던 탓이다.

    “어머니는 무서운 분입니다. 결코 어머니가 하는 말을 다 믿지 마시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마십시오.”

    “걱정 말렴.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안단다.”

    “어머니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말 무엇이든 하십니다. 그게…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더라도요.”

    굳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할 정도라면 로에르멜 내부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지.

    사실 로에르멜은 지금 전에 없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두 딸이 모두 신성인으로 변한 데다, 둘 다 황태자를 끼고 있으니 이 나라의 중심 권력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간 셈 아니겠나.

    거기다 공작은 딸의 목숨도 모두 가문을 위한 장기 말로 쓰는 성품이라고 하니 딱히 진짜 자식이 죽었다고 하여 슬퍼할 것 같지는 않았다.

    ‘헌데 여기서 뭘 더 가져야 만족할진 모르겠지만.’

    레그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라스에 비치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서둘러야 해.’

    예상하기로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에화와 라히크의 인내심은 십 분 남짓.

    이젠 표드르의 내면에 잠수를 할 시간이었다.

    * * *

    ‘엉망이네.’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반짝반짝한 얼음 호수가 시야 한가득 펼쳐졌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웠으나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움직여 다가가자 레그리아는 볼 수 있었다.

    이 거대한 호수에 일어나고 있는 균열을.

    게다가 지금도 곳곳에서 굉음이 들린다. 눈부신 건 그녀가 서 있는 이곳뿐. 발아래에선 얼음이 깨어지고 갈라지며 저들끼리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연히 성도 다 부서졌고.’

    예전보다 훨씬 작은 덩어리로 쪼개어져 있어 큰 성을 쌓아 올리는 건 무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만 한 바위쯤은 되어야 들어서 쌓지. 조약돌로 성을 지을 순 없잖아.

    하지만 애초에 오늘 그녀는 거대하고 멋들어진 성을 만들려고 들어온 게 아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작지만 견고한 얼음탑 하나.’

    그것만 만들고 나갈게.

    그러면 표드르는 안정을 되찾고 그녀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날 것이다. 남은 조각들은 다른 신성인들이 돌보아 줄 테지.

    손이 시리긴 하지만 예전처럼 추워서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정신 접촉은 정말 오랜만이네. 맞아, 이런 감각이었지.’

    빙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레그리아는 작은 얼음 조각을 끌어모았다.

    넓적한 것을 아랫면으로, 위로 갈수록 작고 가벼운 조각을.

    그렇게 어쩌면 귀엽다 싶은 탑을 쌓고 있는 와중이었다.

    지끈.

    여긴 내면세계이니 머리가 아플 이유가 없는데 왜일까.

    두통이 일었다.

    오늘 아침부터 그녀를 괴롭혔던 바로 그 두통이었다.

    “읏….”

    아랫입술을 꾹 깨문 레그리아는 저도 모르게 멈춰 버린 손을 다시 움직였다.

    이 간헐적인 고통은 대체 무엇이기에 그녀를 쥐고 놔주지 않는 건지.

    그녀 내면에 감춰진 ‘뭔가’를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 ‘뭔가’를 불러일으키려 자극하는 것 같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렇진 않겠지.

    ‘아, 너무 아파.’

    하지만 아파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레그리아가 탑에 마지막 조각을 올린 뒤 휘청거리며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내 심정을 알겠습니까? 당신이 그녀의 몸을 빼앗은 겁니다.

    ‘목소리?’

    이건… 표드르의 음성인데.

    - 하필이면, 어째서 하필이면 비트리체여야 했습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그리아는 문득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균열이야.’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얼음이 벌어지며 그 사이에서 표드르의 속내가, 삼켜 미처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물거품처럼 새어 나오는 것이다.

    - 왜 비트리체의 몸에 들어가 제게 혼란을 일으키고… 왜 비트리체를 잊게 하는 건지…….

    - 싫습니다. 저를 흔들지 마십시오. 제게 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기대하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 이런 지원품이 아니라 당신이 보고 싶은 건데…….

    표드르의 음성에 배인 울음기가 처절하게 들린다. 어딘가 몹시 지쳐 보이기도 하고,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아, 표드르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내뱉지 못하고 삼키느라 얼마나 고되었을까 싶다.

    표드르는 확실히 배려심이 강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망친다.

    자기 파괴를 할지언정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라니.

    가히 숭고하다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건 처음이야.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 경우는 이제껏 한 번도 없었는데.’

    그의 내면이 그만큼 불안정하기 때문일까.

    지금도 끊임없이 목소리는 새어 나오고 있었다.

    - 당신을 마음에 품은 건지, 아니면 비트리체를 덧입혀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 내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을.

    - 한 번만 진지하게 만나 보았으면. 그대가 나를 짝으로 선택해 주기만 한다면… 이 모든 고통도 끝이 날까.

    - 이 지극한 감정이 사실은 전부 조작된 건 아닐지. 정신 접촉이 불러일으킨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놓을 수가 없어서.

    - 당신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그림이나 그려 둘 걸 그랬나 봅니다.

    혼란, 불안, 초조함.

    느껴지는 감정의 색은 얼룩져 있었다.

    레그리아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치닫는 두통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런 다음 가장 가까이 있는 균열에 비척거리며 다가갔다.

    “괜찮아. 경의 잘못이 아니에요.”

    본래 신성 기사는 신성인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미쳐 간다.

    아마 그녀의 영향이 컸는데 만날 수 없게 되니 고통에 빠진 것이리라.

    미안함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균열을 쓸어 보았다.

    “이제 그만 편해지기를. 당신이 더는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프지 않기를.

    행복을 찾기를.

    - 그래, 짝을 맺으면 차라리 편할 텐데.

    ‘어…?’

    오늘은 기이한 일이 끝이 없다.

    표드르의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레그리아의 전신에서 엷은 광휘가 일었다.

    잘 익은 열매가 향기를 내뿜듯, 활짝 핀 꽃에서 꿀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력하고도 순도 높은 힘이 만개했다.

    너울처럼 번져 가는 빛이 벌어져 있던 얼음의 틈새를 메운다. 엉망으로 부서져 있던 조각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갑자기 맞추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자각자각.

    깨진 면이 날카로운 얼음들이 반대쪽 면을 찾아 움직이며 기둥을 세운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알아서 바닥을 다지더니 이젠 첨탑을 올리기까지 했다.

    그녀가 손수 세운 돌탑마저 우웅 하는 진동과 함께 뒤흔들리더니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가는 성의 어디론가 빨려들었다.

    ‘맙소사.’

    분명 영향력을 줄이려고 했는데….

    반대로 제 앞에 드러난 것은 멀쩡한 형태의 얼음 성이었다.

    당장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처럼 대단한 크기. 겉면이 예술적으로 세공된 게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건축물이다.

    ‘아니, 이렇게 되면…!’

    의도와는 정반대로 표드르는 그녀에게 종속될 것이다.

    당황한 레그리아가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려 했으나 성은 이미 굳어졌다. 어떻게 해도 녹아내릴 것 같지가 않았다.

    ‘아, 한기가 닥쳐와.’

    이제 제한 시간이 다 되었다.

    여기서 더 머물면 어떤 끔찍한 꼴이 나는지 이미 해보아서 알고 있기에 레그리아는 충격적인 광경을 내버려 두고 빠져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왜? 난 분명 편해지기를 바랐는데. 게다가 표드르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정신 접촉 때문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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