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4)
  • 100화

    “얘기 좀 하자고!”

    억누른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슈만은 지젤이 이렇듯 예의범절도 모르는 듯 구는 걸 처음 보았는지 놀람과 함께 분노의 빛을 띠었다.

    “자중하세요, 지젤 양. 비전하 앞입니다.”

    “비전하는 무슨…! 언니, 나랑 얘기할 거 많잖아.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알기는 해?”

    “저런…! 지젤 양이 대체 힘들 것이 무엇이 있어서요. 지금은 황태자 전하의 궁에 머물고 있기까지 하잖습니까. 과한 은혜를 입고 계시는 처지시면 더욱 자중하셔야지요.”

    “싫어, 싫다고! 원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언니, 나 좀 구해 줘…!”

    빙의를 해서조차 아름답던 아이인데 지금은 눈 밑이 퀭하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뾰족뾰족한 말투에 눈물기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라히크의 아이를 임신한 것까진 좋은데 생각과는 달리 그가 다정히 대해 주질 않아서 화가 난 걸까.

    라히크가 엄하게 통제를 하니 제멋대로 할 수가 없어져서 우는 걸지도.

    ‘하지만 무엇이 이유이든 네가 힘든 게 내가 너와 대화를 해 줘야 할 이유가 되진 않지.’

    그것도 이렇게 정중한 부탁이 아니라 징징거리며 달려오는 것에 일일이 반응해 줘야 할 의무가 없었다.

    레그리아가 무시하며 대꾸조차 하지않고 고개를 돌리자 지젤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떨리는 손을 뻗는 게 아닌가.

    “어, 언니. 내 말 좀 들어봐.”

    그때였다.

    찰싹!

    레그리아의 몸에 함부로 뻗던 지젤의 손 위로, 부채가 내리쳐졌다.

    금세 빨갛게 부어올라 버린 손등을 아연하게 바라보던 지젤이 눈에 독기를 품고 슈만을 노려보았다.

    “왜 때려!”

    “어디 감히 비전하의 옥체에 손을 댑니까. 주제를 알아야지.”

    “언니랑 나랑 뭐가 그렇게 달라서! 언니가 저 몸에 들어간 건 그냥 우연이잖아. 운이 좋았던 거라고! 게다가 지금은 더 운 좋게 에화랑 있는 거잖아. 에화는 원래, 원래… 흑….”

    “신의 뜻을 그리 방자하게 해석하는 사람은 내 태어나 처음 보았습니다.”

    슈만이 혀를 쯧쯧 찼다. 지젤은 억울한지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이제 이쯤이면 그녀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전 황태자비였던 레그리아 로에르멜.

    황태자의 아이를 품은 지젤 로에르멜.

    자매간에 벌어진 이 일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지젤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으니 하는 수 없지.

    “기다리렴, 지젤.”

    “언니…!”

    “네 차례가 올 때까지. 오늘 대화를 나눌 사람들이 많단다.”

    그렇게 말하며 지젤의 대화 요청을 거절한 레그리아는 우아하게 일어섰다.

    “오랜만에 만나 정말 즐거웠어, 슈만. 앞으로도 종종 만났으면 해.”

    “저야 영광이지요. 잊지 말아 주세요. 이 슈만 부코바츠는 비전하의 영솔임을요.”

    슈만 역시 함께 일어서서 내게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이제 어떻게 나올까.’

    동생이라면 그녀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쓰러지기라도 할 것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대화하는 게 간절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속셈에 별로 넘어가 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에 레그리아는 근처에 있는 하녀를 불렀다.

    “귀한 황손을 품은 분이시다. 감정이 격해지신 듯하니 휴게실로 모셔라.”

    “아, 안 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나, 나 정말 급하단 말이야…!”

    이곳은 모스그라토령.

    하녀들은 모두 내 말을 따른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우르르 몰려온 하녀들이 지젤의 팔을 양쪽에서 잡았다.

    그래도 임산부이니 함부로 끌어내진 않았지만 더 추해지기 싫으면 제 발로 휴게실에 가리라.

    “참으로 추하군요. 쯧.”

    슈만 역시 레그리아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지젤의 앞을 막아섰다.

    슈만의 경우, 지금 솔직히 많이 놀란 상태였다. 내색하지 않을 뿐.

    ‘어린 것이 눈빛이 상당히 표독하구나.’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을 것처럼 약이 바짝 올라 있는데, 저런 건 보통 귀족의 정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광기였다.

    정확히는, 버려진 정부.

    ‘황태자 전하가 이리 수준 떨어지는 것을 곁에 두셨을 리가 없는데.’

    슈만이 알기로 황태자는 이런저런 여성을 만나기는 했으나 모두 깔끔하게 끝이 났다.

    사랑 같은 질척거리는 감정 없이, 모두 어느 정도 조건을 맞추어 서로에게 필요하여 만났다는 의미다.

    게다가 그간 어느 여성도 임신을 한 적 없었다.

    황태자는 그만큼이나 철저했다.

    ‘백합 숙녀회가 움직였다는 건 들었지만.’

    그 후로 모든 게 흐지부지된 정황을 보자면 뭔가 알 수 없는 문제가 있었을 터.

    슈만은 나이가 제법 있었고, 인간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아는 귀부인이었다.

    그러니 젊어 혈기 왕성하며 오만한 황태자의 성품과 고집이 세고 강직한 레그리아의 성질이 서로 맞부딪치며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아마 지젤은 질투를 유발하려는 목적이었거나 그랬겠지.

    ‘참, 신기한 일이야.’

    그냥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하면 될 것을.

    왜 그리들 돌아가시는지.

    ‘오늘 어떻게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 오해도 좀 푸시고.’

    본래 남녀 관계라는 게 다 오해로부터 비롯되는 거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이 너무 깊어서, 생각이 아예 없어서, 혹은 생각하기 싫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지 않고 오직 제 생각만을 하는 이기로 인하여.

    다만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한발 물러서야 할지는 자명했다.

    ‘남편을 대하는 아내 마음이란 게 원래 어제는 죽일 듯이 밉다가 오늘 다정하게 굴면서 숙이고 들어오면 또 좀 봐줄 만한가 싶고 그렇답니다, 황태자 전하.’

    가서 싹싹 비세요.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지 말고.

    ‘우리 비전하 얼굴 뚫리겠네.’

    물론, 안타깝게도 전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 * *

    지젤을 외면한 레그리아가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다음 순번으로 말을 걸고 싶은 사람.

    표드르.

    그는 웅성거리는 무리로부터 한 발짝 멀어져 테라스 근처에 서 있었다.

    웬만하면 누구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스산한 기류가 감돌고 있어 표드르의 주변 반경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지경이다.

    ‘어두워졌네.’

    예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비전하.”

    “난 이제 황태자비가 아닌데 다들 그렇게 부르네요.”

    “레그리아 님은 적법한 황태자비시니까요.”

    오늘 여기 들어와 본 사람 중 가장 상태가 나빠 보이는 이를 고르라면 단연 표드르였다.

    그는 꼭 영혼이 반쯤 날아간 사람 같았다.

    아름다운 남자인 건 여전한데 거기에 어딘가 모를 비통함이 덧발라져 있다.

    고장 나버린 태엽 인형처럼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고, 스스로가 말을 한다는 게 이상한지 몇 번이고 목을 더듬었다.

    레그리아가 보기에, 표드르는 산화되고 있었다.

    ‘이런 줄은 몰랐는데.’

    에화는 그녀의 부탁대로 지원품을 가져다주고 전황이 어떤지 보고 와서 설명해 주기는 했지만 결코 표드르라는 개인이 어떤 상태인진 말해 주지 않았다.

    표드르가 이렇다는 걸 알면 그녀가 어떻게든 전장에 가겠다고 할 것을 알아서겠지.

    레그리아는 목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요.”

    “이해합니다. 원해서 한 것이었으므로 사과하거나 감사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나는 미안하고 고마워요.”

    표드르는 아마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폭주를 일으켜 마귀가 되면 처단당할 수 있으니까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겠나.

    다만 레그리아는 그가 어떻게 라히크의 시선을 앗을 것인지 몰랐다.

    물어봤어야 했겠지만… 당시는 너무 지쳐 있었다.

    말리는 것도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마음에 여유가 많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지난날을 얼기설기 이어 붙이기라도 할 시간인 것이다.

    “약을 가져왔어요. 겨울 망루인 당신의 내면에 들어가도 이전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예요.”

    “잠시 봐도 되겠습니까?”

    건조한 목소리가 마음 아팠다.

    마지막 기억 속에 표드르는 이렇게까지 위태하진 않았는데.

    ‘죽는 걸 몇 번이고 실패해서 산 채로 흩어지는 중인 것만 같잖아.’

    그녀가 치유되는 동안 표드르는 어째서 죽지 못했을까 하고 끊임없이 자책하고 있었을까.

    “이건 확실히 필요한 약물이 맞군요.”

    “아마 내가 경의 안에 너무 큰 흔적을 남겨서 다른 신성인들의 치유가 잘 먹히지 않았을 거예요. 이번엔… 제 영향력을 줄이면서 동시에 광기를 다스려 줄게요.”

    표드르가 허락을 해야 할 텐데.

    그가 싫다고 하면 강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설득할 시간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이 지나 다시 모스그라토로 돌아가면 에화가 어떻게 나올지야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나.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야.’

    레그리아는 표드르의 손에서 약물을 빼냈다. 그러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마개를 열어 병째로 약을 들이켰다.

    보랏빛이 도는 약물은 처음에는 차갑다고 느껴졌지만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안착하자마자 잔잔한 불꽃 같은 뜨거움을 선사했다.

    이거면 그 미칠 듯한 추위를 이겨낼 수 있겠다 싶다.

    꼭 눈 속에 파묻혀 구조를 기다리는데 품에 커다란 강아지를 안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테라스로 나갈까요?”

    잔기침을 하며 그렇게 묻자 표드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그리아 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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