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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99/134)
  • 99화

    이렇게 얼굴을 보니 마지막 만남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고, 저를 얽매는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만 싶어 했던 가여운 자화상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사냥당하는 초식동물만도 못했었지.’

    빙의 이후로 라히크에게 질질 끌려다녔던 그녀는 결코 그와 동등할 수 없는 위치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만남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걸 의미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한 템포 쉬고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싶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라히크가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크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아서.

    매번 으름장을 놓는 태도 따위가 싫었을 뿐, 결국 라히크는 그녀를 감금하지도 못했고 통제하지도 못했다.

    하려고만 마음먹었다면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그녀를 망가트릴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에화의 생일이지만 전하께도 축하드릴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지젤에게 눈길을 주며 그렇게 말하자 라히크의 안면 근육이 실룩였다.

    무언가 아주 불만스럽고 화가 난다는 듯이.

    축하받을 일에 왜 저런 반응인 건지는 모를 일이다.

    “그에 관해서는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치 못한 날인 듯하군.”

    “하긴, 오늘은 에화의 생일이니까요. 차후에 다시 축하드릴 만한 날이 오겠지요.”

    딱히 빈정거린 것도 아닌데 라히크의 표정이 매서웠다. 비꼬듯 붙여주던 경어는 금세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를 채운 건 감당하기엔 버거울 정도의 노염이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그녀는 알았다.

    라히크의 두 눈에 담긴 것이 진하게 들끓는 살의라는 것을.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하기라도 했나?’

    지젤이 황손을 가졌다기에 축하한다고 한 건데.

    물론 그로 인해 지젤은 죽게 되겠지만….

    레그리아는 어딘가 파랗게 질려 있는 듯한 동생을 흘긋 돌아보곤 이내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신경 끄자. 라히크가 저렇게 성질 더럽게 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 만에 보았다지만 첫 감상은 ‘변한 게 없구나’다.

    그는 여전히 오만한 남자였다.

    ‘하긴, 변했다면 그게 더 충격적이긴 하겠다.’

    이상하게 라히크는 늘 저런 모습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가 입고 있는 황태자라는 옷을 벗으면 상대방이 조금 당황스럽지 않을까.

    표피 아래에 숨겨져 있는 라히크라는 사람의 영혼을 마주하게 된다면 말이다.

    ‘나조차도 라히크를 라히크가 아니라 황태자로만 생각하고 있구나.’

    새삼 깨달으며 레그리아는 우아하게 예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황태자비가 제 반려인 황태자에게 하는 것이 아닌, 신하가 황족에게 올리는 종류의 공손한 인사였다.

    “아, 댄스 타임이네.”

    상황을 잠시 지켜보던 에화가 자연스레 웃으며 레그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내게 첫 춤의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때마침 더 할 말도 없던 차다.

    에화가 내민 동아줄을 잡은 그녀는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중앙 무대로 나왔다.

    “허리, 허락 안 받고 잡아서 미안해. 그런데 한 번 더 잡아도 돼?”

    “생일이니까 그 정도는.”

    “와, 매일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눈웃음을 짓는 에화의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간다.

    첫 춤은 파티의 흥을 올리기 위해 빠른 박자에 맞추어 오 분 남짓.

    에화와 손을 맞대고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자 다이아몬드가 박혀 화려하게도 반짝이는 붉은 천 자락이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하지만 라히크는 그런 잔재주에 넘어가지 않는다.

    ‘숨 막혀. 왜 저렇게, 보는 건지.’

    등이 타는 것 같다.

    꼭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불을 붙이면 기름먹인 장작처럼 미친 듯이 타올라 단숨에 그녀를 삼켜 버릴 것처럼 그렇게 거세었다.

    저 눈빛에 어떤 의미가 있든 이제 아무 상관 없는데도 뒤를 흘긋거리게 되어 레그리아는 억지로 목에 뻣뻣이 힘을 주어 고정했다.

    라히크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형 생각, 하지 마. 질투 나.”

    그때, 에화가 고개를 스윽 숙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몸을 바로 해 그녀를 깊게 응시했다.

    “나만 봐줘. 오늘은 내 생일이잖아.”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에 실소가 샌다.

    에화가 남동생이 아닌 남자의 얼굴을 할 때마다 사실 조금 웃음이 났다.

    굳이 그렇다고 말하진 않지만.

    “어리광은.”

    “어리광부리고 싶은 날인걸. 네가 여기, 내 파트너로 있어 줘서 행복해. 진짜야, 예쁜아.”

    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보란 듯 그녀를 꼭 끌어안은 에화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나 진짜 너 좋아해.”

    “…….”

    “나랑 사랑하자. 오늘은 그 답을 듣고 싶어.”

    아, 어쩌면 좋지.

    웬만하면 생일을 슬픈 기억으로 남겨 주고 싶지 않은데.

    중앙에서 물러 나와 샴페인이 가득 쌓인 자리에 선 레그리아는 입가에 맺힌 난감함을 감추려 서둘러 잔을 들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다행히 그녀에겐 생각할 시간이 있다.

    파티에 사람을 불러 놓고 에화가 그녀의 옆에만 내내 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녀에겐 그녀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차례로 있었으니 다시 에화를 만나는 건 이 밤이 깊은 후이리라

    ‘에화에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거절할 수 있는 말 같은 건 없어. 알잖아.’

    에화는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3년간 그녀도 나름대로 노력해 봤지만, 도저히 이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상향에 가까운 저택과 이상적인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좋은 성품의 남자.

    그런 사람이 어딘가 조금 찌그러지고 어느 부분은 구멍이 뚫려 온전하다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그녀에게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구혼하는 건 사실 복 받은 일이다.

    고맙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게 쉬우면 좋으련만.’

    어째서 에화를 볼 때마다, 에화가 애정 표현을 할 때마다 그 위로 라히크의 상처 입은 얼굴이 덧씌워지는 건지.

    고백하자면, 그게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에화와는 라히크만큼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던 이유였다.

    말 한마디 없이 주먹을 말아 쥐고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라히크의 얼굴이 연상되어서.

    게다가 잊을 만하면 잊지 말라는 듯 찾아오는 새들까지…….

    비칸이 보내는 신호 역시 명확했다.

    초원을 잊지 말라.

    어디에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물건인 게 분명한 피리까지 매달아 보내지 않았나.

    “비전하……!”

    “슈만.”

    혼자 남으니 제일 먼저 찾아온 건 역시나, 슈만이었다.

    표드르는 조심스러운 성품이고 라히크는 이렇게 애가 탄다는 듯 제일 먼저 다가올 성정이 아니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거라 조금 긴장이 됐는데, 좋은 친구를 다시 만나니 근육이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레그리아는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슈만을 맞이했다.

    “어떻게, 어떻게 사셨어요. 세상에…….”

    “난 괜찮아, 보다시피.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아주 잘 지냈지요. 하지만 이따금 쓸쓸했어요. 비전하와 음악적 교감을 나누던 게 엊그제 같은데….”

    슈만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예법에는 조금 어긋나지만 레그리아는 소탈하게 슈만을 끌어안았다.

    내 나이 든 친구.

    여전히 친구를 해 주어서 고마워.

    “따뜻하네요. 정말 살아 계신 비전하가 맞군요.”

    “응, 맞아. 내가 보낸 곡들은 잘 받아 봤어?”

    “역시나… 비전하께서 보내신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제가 다 잘 모아 두었답니다.”

    이곳이 딱딱한 황궁 연회였더라면 이런 과감한 행동은 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여긴 모스그라토령이고, 모스그라토 사람들은 다소 예법에 어긋나더라도 친밀하게 구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레그리아는 슈만의 손까지 잡으며 연회장 한쪽에 마련된 담소 공간으로 향했다.

    휴게실처럼 사방이 막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여기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실크를 덧댄 고풍스러운 모양의 파티션이 소파를 가리고 있어 이목을 차단시켰던 것이다.

    “어디 봐요. 정말 얼굴이 밝아지셨어요…!”

    “그래? 잘 먹고 잘 쉬어서 그런가 봐.”

    “비전하께서 사라지신 뒤에 소문이 많이 떠돌았답니다. 사실 행방불명이 아니라 죽었는데 쉬쉬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부터, 초원으로 가셨다는 이야기까지… 헌데 모스그라토에 계셨다니…!”

    슈만은 여전히 놀라운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했다.

    레그리아는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며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도 전혀 모르셨던 건가요? 아니면 전쟁 내내 잠시 모스그라토에서 안정을 취하실 수 있게끔 뒤에서 다 정해진 일인가요? 뭐, 어느 쪽이든 비전하께서 이리 어엿하게 무사하시니 다행이지만요.”

    슈만이 안도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아직도 황태자비의 자리에 오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건 오해이며 다시 그 자리에 돌아갈 마음은 없다고 하고 싶었으나 듣는 귀가 많다.

    레그리아는 그 자리를 내버리겠다는 선언하는 것이 어린 치기에 불과함을 안다.

    이 세계에서 원하는 형태로 살아남으려면 좀 더 교활해져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의뭉스레 넘길 수 있는 건 넘기고, 아닌 척할 수 있는 건 아닌 척하고.

    잊을 수 있는 건… 잊어버리고.

    3년 만에 나타난 것도 난리인 상황에서 황태자비 자리를 내던지겠다고 선언했다간 이 시간부로 수많은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갖은 철퇴를 얻어맞을 게 뻔했다.

    “그건 글쎄. 나는 잘 알지 못해.”

    그러니 라히크와 에화에게 적당히 넘기는 수밖에.

    슈만은 캐묻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대화 주제는 금세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렇군요. 그럼 보내 주신 그 곡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요? 무명으로 발표해야 하나 했어요.”

    “그건 선물로 준 거야. 마음대로 해도 돼.”

    “어떻게 그래요! 전부 명곡뿐인데요!”

    슈만이 거의 비명을 질렀다.

    이렇듯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어제 본 것이나 다름없다니.

    친구란 신기한 존재이기도 하지.

    그렇게 오순도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다들 궁금해 죽을 것 같겠지만 라히크가 저편에서 이미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데다가, 에화가 알게 모르게 소파 근처에 있었다.

    그러니 누구도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이렇듯 온갖 시선을 다 무시하고 나타난 사람이라면…….

    “나랑 얘기 좀 해.”

    그래, 하나뿐이지.

    레그리아는 입매를 미미하게 끌어올리며 지젤을 돌아보았다.

    “안녕하니, 지젤. 인사가 우선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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