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34)

98화

7. 생일(Geburtstag)

오늘 모스그라토 저택 곳곳에는 활짝 핀 흰 장미가 장식되었다.

주방에선 손님을 위한 예술적인 디저트가 끊임없이 생산되었고, 하녀들은 리본이며 꽃을 매다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일 당사자인 에화는 당연히 아침부터 일어나 단장을 해야 했는데, 파트너로 등장할 레그리아라고 해서 긴 시간을 들여 꾸미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아, 두통이… 가시지를 않네.’

하지만 모두가 들떠 있는 오늘, 레그리아는 그다지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따지자면 나쁜 쪽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차, 차를 좀 올려 드릴까요? 여전히 안색이 좋지 못하셔서 거, 걱정이 돼요.”

“그래 줄래? 고마워, 셀린.”

그녀의 시중을 드는 건 두어 명의 하녀와 더불어 셀린이었다.

레그리아는 로에르멜 영지로 은밀히 에화를 보내 셀린에게 선택할 수 있게끔 했다.

선택지는 셋.

사제가 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녀 일을 배울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다시 신황청으로 돌아갈지.

그것도 아니면 어디 한적한 바닷가 같은 데에 집을 사줄 테니 거기로 가서 몸을 감출지.

셀린이 택한 건 제일 첫 번째였고 지금까지 제법 정답게 지내오고 있었다.

“여기, 따끈한 루, 루이보스 차예요.”

“하아, 왜 이렇게 악몽을 꾸는 건지 모르겠어.”

“으음, 역시 마, 많이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셔서 그런 걸까요?”

빗을 집어 든 셀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집어 드는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그와 동시에 하녀 한 명이 그녀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발라 발톱 정리를 해 주었고 그동안 다른 하녀는 드레스를 손보았다.

레그리아는 거울에 비치는 드레스를 시야에 담으며 조금이나마 기운을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채도 높은 빨간색 천이 꽃잎처럼 하늘거린다.

온몸을 감싸며 차르르 떨어지는 디자인에 한 쪽 어깨끈은 없고, 다른 쪽은 장미로 장식이 되어 있는 육감적인 드레스였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에화가 고민하며 며칠 밤을 스케치하여 만들어준 드레스는 입어 보지 않아도 이미 잘 어울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또….’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며 환기를 시켜 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욱신.

머리가 아프다. 약까지 먹었음에도 누군가 뇌를 꽉 움켜쥐고 있는 듯한 두통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이미 거의 고질병이 되어서 더 그런 걸지도.’

두통은 신황청을 완전히 벗어나 모스그라토에 온 이후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일이라 치부했지만 점점 정도를 모르고 심해져 결국 의사까지 불러야 했지.

모스그라토에 속한 주치의는 그녀에게 전혀 문제가 없으며 심리적 요인이 클 거라 진단했다.

그 말을 듣고 다음 날부터 에화는 그녀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더더욱 각별하게 신경을 써줬다.

정말 공주처럼 모셔줘서 황송할 지경으로.

물론 그래도 두통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요즘은 꿈속에서 누군가 자꾸 이리 오라며 그녀를 불러대기 까지 했다.

도대체 뭔가 싶어 정말 가까이 가 봐도 상대의 얼굴은 보이질 않고 하는 말은 대부분 같았다.

“내게 와. 어서. 기다리고 있어. 널 보고 싶어. 왜 안 오는 거야. 내가,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솔직히 미칠 것 같았다.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고 꿈조차 꾸지 않는 날은 괜찮지만 약이 떨어지면 꼭 이렇게 기승을 부려댄다.

에화에게 말하면 더더욱 그녀를 걱정할 테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픔도 참아 삼켜 보았으나 오늘은 유독 심했다.

“레, 레그리아 님. 잡지라도 보, 보시겠어요?”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셀린이 그녀의 무릎에 쿠션을 대고 잡지를 펼쳐 주었다.

수도에서 유행하는 여러 장신구나 패션에 관한 내용이 즐비하다. 그다지 관심은 없었지만 가만히 있으면 더 아플 뿐이니 레그리아는 무의미하게 종이를 넘겼다.

‘어?’

그러던 찰나, 그녀의 눈길을 잡아끄는 코너가 있었다.

수도에 지어져 있는 예쁜 집을 소개하는 자리인데… 모양이 특이한 어느 벽돌집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예쁘네.’

노부부가 오랫동안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집.

그림 아래에 적힌 한 줄의 간략한 설명에 레그리아는 입을 살짝 벌렸다.

이상적이다.

이 집의 생김새도, 여기에 깃들었을 사랑의 추억도.

그리고 한없이 부러웠다.

“이런 집, 얼마 할까?”

어쩌다보니 속내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드레스를 다 다려 놓고 온 하녀가 그녀의 손끝이 향하는 곳을 보더니 아주 믿음직스럽게 웃어 보였다.

“아, 제 동생이 저런 집들을 돌아다니는 출장 청소를 하구만요!”

“응.”

“저런 집은 보통… 어, 그러니까. 금괴 세 상자면 살 수 있대요. 딱 보니까 크기도 작아서 두 사람만 살지, 애들 있으면 좁겠구만요. 세 상자면 족하죠.”

아이들이라. 그 생각은 미처 해 보지 못했다.

그냥 혼자 여생을 보낼 만한 집이라고 여겼는데 갑자기 미래에 어린아이들을 그려 넣자 확실히 좁아 보이기도 했다.

‘아냐. 그래도 이 집 정도가 좋아.’

가족들이 서로 무얼 하는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 떠난다고 하면 어쩔 수야 없지만 그전까지는, 최소한 품 안에 있을 때만큼은 가까이 지냈으면.

한집에 있음에도 거리가 벌어져 있는 건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그리아는 이미 그런 삶을 살아 보았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또 그러는 건 싫었다.

‘언젠가 나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어.’

그런 소망은 마음에 묻는다.

언젠가 이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그렇게 몇 시간이 더 지나가고 레그리아가 완전히 단장을 마쳤을 때.

시간을 맞춰 에화가 데리러 왔다.

“……!”

끼이이.

열린 문 안쪽에 서 있는 레그리아를 마주한 에화의 눈이 커졌다. 이보다 더 커질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세상에, 천사가 틀림없어. 꽃의 요정인가? 장미꽃도 네 아름다움 앞에선 숨을 죽일 거야. 안 죽이면 내가 죽여 줄게.”

“민망해, 에화.”

“아니, 정말로! 연회에 나가면 모두가 널 쳐다볼걸. 아, 벌써부터 눈알을 뽑아 버리고 싶다. 다들 널 보는 게 당연한데 그게 싫은 이중적인 감정이 들어.”

“호들갑은.”

이따금 에화는 저렇게 격한 말을 쓸 때가 있었다.

레그리아는 신나 보이는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걸음을 뗄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발밑이 쑤욱 꺼지더니 다시 주변에 빛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연회장이었으니까.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시누엘 모스그라토 공자 드셨습니다! 그리고 파트너인… 레그리아 로에르멜 님입니다!”

미리 언질을 해 두었는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하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쳐 이목을 끌었다.

이미 연회는 시작된 지 한 시간쯤 지났다.

올 만한 사람은 다 왔다는 뜻이다.

“화, 황태자비 전하?”

“무슨 황태자비야. 예비지. 지금은 그마저도 아니고!”

“하지만 갑자기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이렇게? 3년 만에?”

“와… 오늘 오기를 잘했다. 이런 일이…!”

젊은 축에 속해 아직 입을 다무는 법을 모르는 귀족들이 벌떼처럼 소란을 일으켰다. 나이가 지긋한 귀족들은 오늘 이 자리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빠르게 훑은 레그리아는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슈만을 발견했다.

‘가족과 함께 온 모양이구나.’

레그리아는 슈만에게 우선 미안한 눈빛을 전했다. 잘 전달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표드르도 있네.’

표드르에게는 각별히 고른 초대장을 보냈다.

기본적으로 모스그라토에서는 검은색 초대장을 쓴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녹색 잉크로 초대장을 쓰고 붉은 봉투를 골랐다.

나름대로 그녀가 이곳에 있으며 나타날 거라는 전언이었는데 다행히 표드르는 알아차린 모양이다.

‘많이 수척해졌네.’

에화와 함께 느리게 걸어 단상으로 가며 레그리아는 표드르를 스쳐 지났다.

침잠한 눈빛 아래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오늘 그녀는 표드르와 정신 접촉을 할 것이다. 겨울 망루 사람들과 접촉을 해도 되도록 약을 미리 받아 두었으니까.

그래서 그녀와 표드르 사이의 연결을 끊어낼 것이다.

표드르가 다른 신성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몇 계단 위쪽의 단상에 자리한 두 사람이 시야에 비쳐들었다.

라히크와 지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라히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침내 그녀와 에화가 둘과 같은 선상에 섰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라히크 쪽이었다.

“이거, 기대해 마지않은 상황이로군.”

“내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오다니, 기뻐. 형.”

에화는 발랄하게 라히크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는 게 아닌가.

신체적 접촉이 있는 부위에 라히크의 시선이 꽂혀든다.

메마른, 그러나 온몸의 털이 올올이 곤두설 만큼 두려운 위압감이 어린 눈빛이었다.

“잘 지냈습니까, 로에르멜 양.”

“네, 여기 있는 에화 덕분에요.”

좀 말랐나.

어딘가 야윈 기색인데, 착각일 지도 모른다.

그냥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렇게 느낀 거겠지.

‘안광 탓인지 예전보다 더 짐승 같아 진 것 같기도 하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