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34)
  • 97화

    초원의 남자들에게 피리는 구혼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자 정표였다.

    당신이 언제 어디에 있든 위험에 처해 이 피리를 불면 내가 꼭 달려가겠다는 그런 약속.

    그래서 피리는 개인마다 재료도 다르고, 양각인지 음각인지, 어떤 모양을 새겼는지도 달랐다. 피리의 길이나 음색 역시 다른 게 당연했다.

    초원에서는 체모가 굵어지고 허벅지가 짐승의 그것처럼 단단해지는 나이가 오면 어른들이 피리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언젠가 생길 반려를 생각하며 그렇게 꼭 닮은 두 개를 제작하는 것이다.

    비칸은 피리의 끝에 구멍을 뚫어 줄만 끼우면 목에 걸 수 있게끔 만들어 두었다.

    하나는 친한 매의 발목에 묶어 그녀에게 날려 보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목에 걸려 있다.

    초원에서 그녀가 있는 그 먼 땅까지 매를 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비칸이었기에 교감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이후로도 그는 종종 시간을 내어 파랑새나 종달새 같이 의심받지 않을 만한 종류를 보내었다.

    그러면 그녀는 다 안다는 것처럼 먼 길을 날아온 새에게 물과 곡식을 주고는 했다.

    새의 망막에 비친 할리카는 편안해 보였지만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몸의 편안함이 꼭 마음의 편함을 뜻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비칸은 그녀가 머물 곳이 되어 주고자 했다.

    가능하다면 제 곁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면.

    ‘내게는 대단한 성도,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드레스라는 것도 없으나….’

    넘치도록 쏟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

    물론 마음만으로 부족한 부분들이 다 채워질 수는 없을 테니 비칸은 처음으로 자신이 최고 전사임을 다행으로 여겼다.

    부족 내에서 존경을 받는 최고 전사는 그 반려 또한 함께 존경받는다.

    최고 전사가 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니 대우받아 마땅했다.

    초원인이라면 모두 그녀에게 경어를 써야 할 것이고, 부족장이라 할지언정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녀의 발언권은 우선시 된다.

    할리카는 초원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누구도 그녀를 강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참, 비칸. 그분의 상태가 너무 좋지 못하대. 어떤 걸 바쳐도 드시지 않는다던데.”

    밤이 깊어 풀벌레 소리가 점점 더 커질 때쯤, 눌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애초에 제 반려에 대한 이야기가 다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저게 원래 하고 싶은 말이었겠지.

    “알-누히람이 어떤 노래를 불러드려도 마찬가지고… 걱정이 많아.”

    “용은 오래전부터 죽어 가고 있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그분은 어쨌든 지금 우리의 신이야.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위로 올라가도 존재하셨던 분이라고. 그런 분이 만약 숨을 거두기라도 하면… 초원 전체가 난리가 날걸.”

    눌한은 잔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니 미래까지 내다보며 먼저 염려를 하지만 비칸은 딱히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최고 전사라면 용을 지켜야 마땅하나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칸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지키려 하는 건 부족원과 초원의 평화이지 미쳐 버린 용이 아니니까.

    “어떤 알-마하카를 보여도 아니라고만 하니… 아예 초원을 나서서 다른 알-마하카들을 잡아 올 수도 없고.”

    “눌한.”

    “아, 정색하지 마. 그냥 해본 소리야. 상황이 하도 답답하니까 그렇지. 제국 쪽의 알-마하카는 그놈들 손에 의지해야 하잖아.”

    나직하게 경고하자 눌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변명했다.

    제 친우의 얼굴에 얼토당토않은 일을 저지를 만한 기미가 있는지 살핀 비칸은 한참 지나서야 눈길을 거두었다.

    외지인들은 모를 초원만의 비밀.

    하나. 모든 최고 전사는 용을 만난다.

    둘. 모든 알-마하카는 최초 빙의 당시 두 눈을 가리고 머리에는 베일을 쓴 채 용을 만나야 한다.

    그러면 용이 직접 이 세계에 온 것을 축하하며 특별한 열매를 내어준다. 용의 기운으로 자란 나무에서 열린 열매였다.

    셋. 사실 그런 경애를 받으며 신으로 모셔지는 용은… 온전한 용이 아니다.

    우스운 일이다.

    불멸하며 완전하다 일컬어지는 신이 광기에 물들어 있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는 일인가.

    허나 초원인들은 용이 아파 병들어 있으며 죽어 간다는 말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 용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적 없기 때문이리라.

    ‘최고 전사는 신살자를 꿈꾼다.’

    그런데 초원의 신인 용이 살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용을 죽이지 않았는가?

    그토록 손쉽게 뻗을 수 있는데. 심지어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도 못하는데.

    아귀가 맞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초원에 있는 용은 반쪽짜리.

    ‘내가 죽이고자 하는 신이 아니다.’

    초원인들은 불멸하여 낙원으로 떠난 최초의 용과 지금의 용을 같은 존재라 여긴다.

    비칸 역시 이 사실을 어렸을 때는 알지 못했다.

    비밀을 깨닫게 된 건 그가 초원인이 모두 신성하게 여기는 동굴인 툼룬에서 최고 전사가 되는 의식을 치른 그때였다.

    모두 아흔아홉 개의 횃불을 켜놓고 알-누히람들을 가르치는 어머니 중의 어머니가 나와 직접 의식을 거행했다.

    최고 전사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용을 실제로 만나는 것.

    하지만 용은, 그가 상상해 왔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반은 인간이지만 육신의 또 다른 반은 두꺼운 외피로 덮여 있으며 이마에는 뿔이 자랐고, 흰자위가 아닌 검은자위에 붉은 동공이 자리했다.

    반룡.

    살아 있는 신의 아들.

    최초로 인간을 빚어내고 알-누히람과 혼인하였으며 알-마하카를 데려온 ‘신’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지금 초원에 있는 건 그 신이 남긴 열 명의 자식 중 하나.

    지금 있는 반룡은 반은 사람이라 그런지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기에 물들어 있다.’

    전사가 광기에 물들면 알-마하카가 보살펴 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반룡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평범한 알-마하카는 안 된다.

    아주 특별하고 귀한 영혼이 필요하다나.

    “아아악! 영혼! 영혼이 필요해!”

    “지, 진정하십시오. 우리의 신이시여…!”

    “닥쳐! 영혼을 가져오라고. 영혼을!!!”

    반룡은 이따금 머리를 부여잡고 괴성을 내질렀다.

    허나 그 포효는 깊은 지하 동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호위를 서던 최고 전사만이 들을 뿐.

    “그 어떤 전사도 그 영혼을 막을 수 없다. 그 영혼은 그 어떤 전사라도 침투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이를 감싸 안을 수 있으나 반대로 누구에게도 감싸이지 못할 것이다.”

    그때, 눌한의 맥 빠지는 말투가 비칸을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알겠어?”

    “글쎄.”

    “어디 가서 그런 알-마하카를 찾아오라는 건지! 아오, 진짜! 알았으면 진작 찾으러 갔지.”

    “그렇긴 하다.”

    “제국인과 거래를 할 바에 그냥 필요한 알-마하카의 이름을 말해 주던가!”

    대체적으로 눌한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공감했다.

    저렇게 죽어 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자를 짚어낼 수도 없다니.

    ‘이미 신력은 완전히 잃은 게 아닐지.’

    의심스럽다.

    특히 의아한 것은 이번 전쟁 시에 반룡이 내린 결정이었다.

    초원은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배우고 자라왔다.

    제국의 악마가 군대를 이끌고 푸른 풀을 짓밟으러 왔을 때 죽을 각오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헌데 격한 싸움이 이어지며 서로 간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바로 그 시점, 갑자기 제국 쪽에서 로에르멜 공작이라는 자가 왔다.

    “용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아네. 우리 측은 열매를 원해서 왔으니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서로 간에 괜찮은 거래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놀랍게도 반룡은 접견을 허락했다.

    그리고 몇 시간 만에 로에르멜 공작은 몸 성히 제가 속한 곳으로 돌아갔다. 품에 뭔가를 안고.

    그 깊은 동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 그들은 모른다.

    그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락받지 못하였으니 추측만 할 뿐.

    허나 어차피 최소한의 호위조차 물리고 해야 할 말이라면 뻔했다.

    제국인이 원하는 건 아리툼으로 진격할 길을 내어주는 것과 용의 열매다.

    용이 원하는 건 특별한 알-마하카.

    제국 내에 있는, 그들은 신성인이라 부르는 존재를 초원에 보내줄 테니 대신 그 대가로 열매를 내어달라고 한 것이 정황상 분명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원. 알 수가 없어, 비칸.”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라.”

    “넌 어떻게 그렇게 매사 담담하냐?”

    눌한이 투덜거렸다. 비칸은 쓰게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내가 담담하다고.’

    그저 그런 척 할 뿐이다. 그러지 않으면 질투로 인해 스스로를 다치게 하고 나아가 주변까지 휩쓸리게 할 것 같으니까.

    다스려야 한다. 참아야 한다. 눌러야 한다.

    다른 수컷의 영역에 있는 할리카를 떠올릴 때마다 비칸은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다림도 끝이 보인다.

    한 달간 이어질 이 축제를 지키는 것까지가 그의 의무.

    그게 끝나면 비칸은 할리카를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 * *

    그렇게 각자의 마음속에 다른 생각이 자리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모스그라토 영토에서는 소중한 도련님인 에화의 생일 연회가 한창 준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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