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34)
  • 96화

    에화에게는 그간 도움을 받은 게 많다.

    특히 슈만과 표드르를 은밀하게 도와준 점이 가장 고마웠다.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레그리아는 에화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들었다.

    슈만은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며 가족과 행복하게 지냈고, 이따금 사라진 벗에 대해 쓸쓸해 했다.

    표드르는 자택 감금을 당했다가 추가 전력이 필요해져서 급히 차출당했다고 한다. 황태자가 가 있는 곳과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위험한 전장이라 하던가.

    레그리아는 슈만에게는 그녀가 쓴 새로운 곡을, 표드르에게는 지원 물품을 전달했다.

    물론 직접 간 것은 아니고 에화가 대신 가지고 간 것이다.

    뺨이 아니라 입술에 뽀뽀를 해 준다든지, 집 안에서 데이트를 온종일 해 준다든지 등.

    이런저런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에화는 그녀의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

    “파트너를 받아들이는 걸로 생일 선물이 되겠어?”

    “그럼, 당연하지! 널 내 파트너로 소개하게 되는 건데.”

    에화가 정말 무해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그런 그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레그리아는 조용히 질문했다. 천연덕스럽게, 마치 수플레 케이크를 더 먹을 거냐고 묻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황제가 되고 싶은 거야?”

    라히크를 죽이고 싶니?

    진짜 묻고 싶은 건 감춘다.

    지난 시간 동안 레그리아는 대공비에게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간 알던 게 화술 초급 과정이면 이제는 심화 과정을 다 배우고 졸업하게 된 것 같달까.

    정말 궁금한 것이 있다면 드러내지 말 것. 의도는 문장 속에 쪼개어 숨길 것. 늘 상대방을 관찰할 것.

    말에서 정보를 찾지 말고 태도, 눈빛, 손짓, 습관 그 모두를 확인할 것.

    “글쎄. 난 그냥 손해 보는 걸 싫어해.”

    “응.”

    “내 것을 빼앗기는 건 더 싫어하고. 그 상대가 형이라면 더욱더.”

    의뭉스레 답한 에화가 손을 뻗더니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미풍에 여름 꽃잎 한 장이 묻었던 것이다.

    그가 손목 안쪽에 늘 뿌리곤 하는 알싸한 박하 향이 넘실넘실 번져간다.

    꽃같이 어여쁜 분홍색 눈동자를 마주하던 레그리아는 문득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어째서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상성이 맞지 않긴 하지만 그보다는 사이가 벌어진 결정적인 사건이 있을 것만 같다. 그냥, 감이 그러했다.

    “물어봐도 돼? 사이가 나쁜 이유.”

    “그러게 레그리아. 내가 왜 그렇게 형을 싫어하는 것 같아?”

    “글쎄….”

    “내가 어떻게 신황청의 돌탑에 대해 알고 있게. 그 수로에 대해서는? 혹시 생각해 본 적 있어? 형이랑 연관 지어서.”

    “…….”

    생각할 여지가 많아지는 문장이다.

    사실 그 부분을 알고 싶긴 했었다.

    에화는 햇볕을 즐기는 나른한 고양이와 같았다. 좀 호화로운 목걸이를 걸고 있는 고양이랄까.

    그런 그가 그 어둑한 곳에 세워진 돌탑에 가게 될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양지바른 언덕도 아닌데.

    어떻게 생각해도 즐겁게 손을 잡고 산보나 나간 건 아니리라.

    에화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갇혔어. 형이 가뒀거든.”

    “…몇 살 때?”

    “음, 내가 일곱 살이었나?”

    그건 너무 어린데.

    눈살을 찌푸리자 에화가 불쌍한 척 어깨를 늘어트렸다.

    “난 그냥 형이랑 놀고 싶은 어린애였는데, 그런 나를 속여서 거기 가뒀어. 나오지 못하게 감금한 거지. 거기 아직도 있을 텐데. 내가 쓰던 이불이랑 내가 보던 책들.”

    “……아, 그때 그게.”

    삭아 버린 이불이 기억난다. 어려운 내용이 담긴 책들도.

    그러나 그 돌탑은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어린아이라면 더욱더.

    “곧 오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는데 오지 않더라.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일곱 밤을 세던 난 결국 혼자 힘으로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어.”

    “그 수로를 통해서?”

    “응. 뭐, 문이 잠겨 있긴 했지만 그 정도 잠금장치를 못 딸 만큼 멍청하진 않았거든, 내가. 죄가 있다면 그냥 형을 믿은 것뿐?”

    쾌활한 어조지만 깊이 감춰진 상처가 아직 붉었다.

    지금과는 달리 순수한 어린 에화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아마 밝고, 잘 웃었겠지. 양친은 물론이고 대부와 대모에게도 사랑을 잔뜩 받았으리라.

    그런 에화는 구김살 없고 사랑스러우며 어딜 보아도 어두운 구석 하나 없을 게 분명했다.

    ‘반면에 라히크는…. 어땠을까.’

    여기, 나이가 엇비슷한 형제가 있다.

    하나는 사랑스러운 천재이며 다른 하나는 독기 어린 영재였다.

    그럴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레그리아는 잘 알았다.

    ‘에화는 빛, 라히크는 어둠.’

    에화가 태양처럼 찬란할 때 라히크는 누구도 모르게 속에 독을 쌓아간다.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레그리아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렇다고 어린 동생을 가둬 버린 게 잘했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난 의리가 있었어. 형이 언젠가는 사과를 하러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때의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라히크는 사과를 했고?”

    “그럴 리가. 그랬으면 형이 아니지.”

    에화가 피식거렸다.

    참방.

    때마침 수면에 떠 있던 소금쟁이가 얇은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노를 놓아 버리자 배가 물결을 따라 느리게 빙글빙글 움직인다.

    모든 문제가 결국 하나의 원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만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되돌이표.

    이 둘은 꼭 그녀와 동생을 보는 것만 같다.

    생채기가 난 채로 그냥 살아가고 있는 점이 특히.

    물론 그렇다 해서 중간에 껴서 둘의 사이를 풀어주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니까.

    그러니 레그리아가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들어주는 일뿐.

    “내가 형이 날 가뒀다고 일러바치지 않은 건 오로지 형을 위해서야. 아버지가 형을 벼랑에서 밀어 버릴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황태자가 되겠지만 어머니는 황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거든. 나 역시 그다지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랬구나.”

    “그러니까 나는 너만큼은 빼앗기기 싫어. 형은 뭐든 내가 원하는 걸 다 가져야 직성이 풀려. 웬만한 건 다 내어주겠지만… 넌 안 돼.”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얼굴이 꼭 심통 난 소년 같았다.

    가진다와 갖지 못한다는 이분법.

    그 속에 그녀의 의지는 말살당한다.

    솔직히, 불편했다.

    에화가 이따금 저렇듯 떼를 쓰는 것이.

    에화는 좋은 사람이고, 다정한 사내이지만…….

    “그리고 널 내 것으로 가지는 조건에 황제가 되는 게 포함된다면, 귀찮지만 까짓거 해 보지 뭐. 황제. 그게 뭐 별거라고.”

    까짓거라니.

    순간, 레그리아는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

    그 ‘까짓거’를 위해 라히크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데.

    라히크에 대한 감정이 긍정이 아니라 부정이라 하더라도 그것과 그가 해온 노력은 별개의 문제다.

    레그리아는 누군가의 노력이 쉽게 폄하되는 것을 싫어했다.

    꼭 그녀 자신이 해 왔던 노력이 쓰레기 취급받는 것 같은 기분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에화는 황제의 일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야.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니까.’

    사소히 내뱉는 한 마디에서 재능의 차이가 도드라지는 법이다.

    애초에 세 개 정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백 개를 가진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긴 세월 노력하여 쌓아 올려도 결국 아흔 개 정도에서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선이었다.

    천재와 영재를 가르는 선.

    그걸 선명히 느낄 때마다 레그리아는 생각했다.

    아, 내가 에화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겠구나 하고.

    너와 나는 좋은 친구, 거기까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기에는 서로가 선 자리가 너무 다르다.

    “내가 원하는 건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거야. 네 꿈과 같지. 소박하지만 거창한 꿈이야. 그리고 내 미래엔 네가 있길 바라, 예쁜아.”

    달콤하게 속삭인 에화가 대답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노를 잡았다.

    삐걱, 삐걱.

    조각배가 부산스럽게도 움직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지나 멈춰 있던 레그리아의 세상이 다시 움직이는 소리기도 했다.

    ‘이제 모든 전쟁이 끝났으니까…….’

    걸음을 옮길 때가 되었지.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리를 할 시기다.

    이전에 벌였던 일을 해결하고 마무리를 지을 때이기도 했다.

    “에화. 내게 약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약? 무슨 약? 어디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닌데… 아프게 될 것 같아서.”

    애매한 대답에 에화가 눈살을 찡그렸다.

    뱃전을 쓸어보던 레그리아는 무심히 툭 내뱉었다.

    “겨울 망루 사람들의 내면에 들어갈 수 있는 약이 필요해.”

    “레그리아, 그건….”

    “그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지? 표드르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응. 싫지만 그렇다면야.”

    에화가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레그리아는 금빛 태양이 이지러지는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는 체하며 제 드레스 안쪽의 비밀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 안에 숨겨진 것은 상아를 깎아 만든 듯한 작은 피리였다.

    * * *

    별이 빛나는 여름 밤, 초원에서는 흥겨운 축제가 벌어졌다.

    세 개의 연합국, 모두 100개의 부족, 3,092개의 씨족이 다 함께 참여하는 거대한 규모의 혼인제.

    이 기간만큼은 고기와 술이 넉넉히 마련되고 멀리서 오는 손님들을 환영하며 다들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새롭게 전사가 된 이들이 제 기량을 뽐내며 친선 경기를 펼치고 젊은 알-마하카들은 저들끼리 모여 킥킥거렸다.

    그러다가 하나둘씩 거대하게 피워둔 불 앞으로 모여 함께 노래한다.

    평화와 자연에 대해, 감사함에 대하여.

    그렇게 동족들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이가 들어 이미 혼인한 지 오래된 전사들은 축제 장소의 근처에서 경계를 섰다.

    이번 혼인제 경호의 책임자는 최고 전사 비칸과 같은 최고 전사인 눌한.

    수많은 동물들과 동시에 교감하며 빈틈없이 주변 경계를 하고 있는 비칸에게 눌한이 다가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정말로 그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을 텐가. 비칸.”

    “말했지 않나. 내겐 나의 알-마하카가 있다고.”

    “아아, 네가 이따금 새를 보내는 상대. 맞아. 그랬지.”

    눌한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풀숲에 털썩 누워 버렸다.

    그런 친우를 돌아보던 비칸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눌한이 쉽게 자리를 떠날 것 같지 않았던 탓이다.

    아마 할 말이 있어서 온 거겠지 싶어 비칸은 부러 한마디를 더 얹었다.

    “전쟁은 끝났다. 그녀가 반려가 되는 것을 허해 준다면 이곳에서 살게 하고자 한다.”

    “여기도 알-마하카는 많이 있잖아. 이번에 <투담> 쪽에 알-마하카가 둘이나 생겼던데.”

    눌한의 말에 비칸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해 봤자 듣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네 반려가 될 사람. 얼마나 대단한 알-마하카인지 궁금하네. 네가 무려 피리를 주다니.”

    “달라 하지 않았는데 안긴 것에 불과하다. 소중히 여겨 주면 고맙겠지만 그녀는 피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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