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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95/134)
  • 95화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따스하고 다정한 봄 늪의 기후는 매사에 예민하고 까칠하던 사람을 부드럽게 바꿔놓기에 알맞았다.

    사실 그 누구라도 여기서 3년을 지내면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조각배에 늘어지듯 기대어 앉아 레그리아는 투명한 호수에 손가락 끝을 댔다.

    퐁.

    피부가 닿을 때마다 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장난삼아 튀긴 방울방울을 꿰뚫는 햇볕이 오색으로 반짝였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기만 한 곳.

    또다시 여름을 맞으며 레그리아는 올해야말로 한 번 피부를 태워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희기만 한 피부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차다.

    외출할 때마다 양산을 쓰는 것도, 목이 긴 레이스 장갑을 끼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 귀찮았다.

    언제였던가. 제 안에 아직 남아 있는 흐릿한 장면이 있다.

    동생이 또래 남자애들을 데리고 수영복만 입은 채 햇볕을 즐기던 모습. 일부러 선탠 크림을 발라 피부를 태웠었지.

    그녀는 그 활동적임이 부러웠었다.

    “예쁜아, 오늘 저녁에는 언덕에 별 보러 갈까?”

    “그거 좋겠다.”

    “들려주고 싶어서 시를 몇 편 외워 뒀거든. 거기서 둘만의 낭송회를 열자. 분명 기분 좋을 거야.”

    에화는 이제 ‘누나’라는 호칭보다는 이름을 불렀다. 이름보다 더 자주 부르는 건 ‘예쁜아’라는 간지럽기 그지없는… 애칭 같은 거였고.

    그만하라고 해도 에화는 ‘그렇지만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쁜걸 어떡해’라며 능청을 떨었다.

    무의미한 투닥거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레그리아는 그냥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반쯤 흘려듣는 중이었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텐데 입 아프게 뭐하러 말해.

    “레그리아.”

    “!”

    “또 딴생각 하네. 서운하게.”

    멍하게 있었던 걸 들켰는지 고운 얼굴을 불쑥 들이민 에화가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가증을 떨었다.

    이제 레그리아는 에화가 저러는 것이 모조리 다 연기이며 결코 상처 따위를 받을 남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렇게 귀엽게 구니 웃음이 피식 날 수밖에는 없었다.

    그냥 행동 자체가 예쁘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버림받지 않을지. 어떻게 굴면 쉽사리 용서받을 수 있는지.

    에화는 그런 것들을 숨 쉬듯이 잘 알고 있었다.

    “난 이따금 네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해.”

    “그건 프라이버시야, 에화.”

    “알아. 실제론 못하니까. 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는데 난 너한테 못 들어간다니. 불공평해.”

    노를 내려놓은 에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물속에 담가 놓고 있던 손을 꺼낸 나는 차가워진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한 번도 들어갈 수 없게 했으면서, 무슨.”

    “그거야 나랑 정신 접촉을 하면… 내 순수한 연심을 그거 때문이라고 오해할 거잖아. 그건 싫단 말이야.”

    “그래, 그래.”

    꽤 오래, 그리고 자주 붙어 있었음에도 레그리아는 아직 단 한 번도 에화와 정신 접촉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에화는 경계심이 높았고 타인에 대한 거부감도 심했다.

    늘 빙글빙글 웃고 있지만 그렇다 해서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모두와 살갑게 지내지만 일정한 선까지만. 친구가 많아서 여기저기 모임에 다녀야 하지만 그것도 딱 정해진 시간만큼만.

    그런 에화가 기꺼이 시간과 곁을 동시에 내어주는 건 오직 그녀 하나뿐이다.

    레그리아는 자신이 에화에게 있어 꽤 특별한 위치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 없게끔 차이 나게 행동하니까.

    에화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처럼, 그는 좋은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아주 좋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겠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그랬으면 좋겠어.’

    산들거리는 바람에 쓰고 있던 챙 넓은 모자가 휙 날아갔다. 그걸 재빠르게 잡아챈 에화가 미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 다시 씌워 주었다.

    “조심해야지. 아무리 여기가 비밀 호수라지만.”

    “응.”

    “답답하지? 표정에 다 드러나.”

    일순 정색했던 에화는 다시금 표정을 풀어내며 레그리아의 뺨을 콕 찔렀다.

    길게 자라 또 등을 덮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레그리아는 짤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어. 라히크도 이제 더는 나를 찾지 않는 것 같다면서.”

    “음, 나랑 결혼해 줄 때까지?”

    “그건 이미 거절했잖아, 에화.”

    “에이, 그래서 내가 오늘도 구혼하잖아.”

    호수 위를 떠도는 이 조각배처럼 빙글빙글 돌아 다시 제자리.

    에화는 그녀를 과보호했고, 애정을 아낌없이 주었고, 보살폈다.

    어디에도 그녀 혼자 갈 수 없게 하는 방식으로.

    라히크가 그녀를 마치 집을 지키는 작은 강아지쯤으로 대했다면 에화는 그보다… 어떤 의미로는 조금 더 지독했다.

    의지가 있는 생명임을 알면서도 단호하게 ‘안 돼’라고 하는 거니까.

    “네 말이 맞기는 해. 형은 분명 추적대를 물렸지. 그리고… 이젠 지젤이랑 다니더라. 어젠가 거리에서 데이트도 했다던데.”

    마치 허리가 없는 사람처럼 뱃전에 툭 기대며 에화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에화가 들려주는 것만을 들을 수 있었기에 그건 레그리아에게 새로운 소식이었다.

    라히크가 누구와?

    “지젤과?”

    “응. 지젤이 벌써 임신 7개월 째래. 일전에 형이 한 번 수도에 돌아왔을 때 일을 치른 모양이던걸.”

    “그렇구나.”

    놀람은 잠깐일 뿐, 수긍은 빨랐다.

    애초에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누군가가 채웠다니 오히려 안심이 될 뿐.

    ‘그럼 그렇지. 고작 그 정도 의미였던 거야, 나는.’

    어딘가 시원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꾹 눌려져 있던 것이 비워져 휑해진 기분이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녀에 대해 까맣게 잊는 게 당연한 건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레그리아 자신도 몰랐다.

    ‘그땐 우리 둘 다, 좀 미쳐 있었지.’

    모든 감정이 격했다. 그 순간들이 둘 다 처음이라서.

    그에게서 떨어져 있다 보니 레그리아는 자신이 빙의를 당했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곰곰이 되짚어볼 수가 있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돌아보니 그녀는 그저 원망을 쏟아낼 상대가 필요했다.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고 누가 됐든 잡고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시간이 약이라 하던가. 거리가 약일 지도.

    결코 녹지 않을 것 같던 해묵은 감정도 황홀한 햇볕에 서서히 부피를 줄여나갔고 부는 바람에 조금씩 스러져갔다.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절대 안 될 것 같던 포용도 이젠 가능했다.

    ‘이런 게 나이를 먹는 거구나.’

    잠시 침묵하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던 에화가 씩 웃으며 다시 노를 잡았다.

    “그러니까 우리 관계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된 거야, 예쁜아.”

    “…….”

    “진짜 좋아해. 나와 당장 결혼하기 싫다면 약혼이라도 해 줘. 그게…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찾을 방법인 건 이제 충분히 알잖아.”

    “응. 알지.”

    죽거나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길을 찾지 않는 이상, 이 땅 어디에 있어도 에화나 라히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에화는 집요하고 애착이 강하다. 라히크는 집요하고 집착이 강했다.

    둘이 누가 더 미쳐 있나 경쟁하기라도 하듯이.

    닮은 듯 다른 듯 비슷한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된 건 레그리아로서는 전혀 바란 바가 아니지만 상황이 이리되었다.

    이젠 레그리아도 뻔한 사실을 부정하며 세상 끝까지 달아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모스그라토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이 그녀를 많이 변화시켰다. 대부분 좋은 쪽으로.

    라히크에게서 벗어난 그녀는 여유를 찾았다. 이전에는 구멍 나고 너덜너덜한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아 매일 간신히 숨을 쉬었다면, 이제는 사는 게 무엇인지 배웠다.

    한층 성숙해졌고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바뀌었다. 마냥 도망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알지.

    ‘만에 하나, 라히크가 나를 잠시만. 단 몇 달이라도 혼자 두고 마음을 추스르게 해 주었더라면….’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을까.

    이따금 그런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었다.

    대공비와 웃으며 식사를 할 때, 에화와 둘이서 푸른 밤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를 보러 갈 때. 흔들거리는 조각배에 오를 때와 같이 일상적인 순간순간에 갑자기.

    지젤이 임신까지 한 지금에 와선 아무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라히크가 행복했으면 좋겠네. 그게 아주 잠깐이더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동생이 조금은 가엾다.

    그러나 레그리아는 직접 찾아가서 진실을 알려줄 만큼 동생에게 빚진 게 없었다.

    어차피 에화가 못 나가게 하기도 하고.

    “형 생각은 또 왜 해.”

    “네가 먼저 라히크 이야기를 꺼냈잖니.”

    “지젤이 아이를 가진 것에 집중하라고 한 얘기지.”

    에화는 부루퉁하게 대꾸하고는 삐걱거리며 노 젓는 것에나 집중했다.

    한가로이 흔들리는 골풀과 버드나무 이파리. 그 아래의 잔잔한 수면과 이따금 씩 튀어 오르는 물고기.

    이 비현실적으로 평화롭고 아늑한 곳에서 레그리아는 있는 힘껏 애매하게 지냈다.

    무엇도 고르지 않고,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곧 내 생일이잖아.”

    “응.”

    “그때… 파티를 열 생각인데. 내 파트너로 나와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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