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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94/134)
  • 94화

    애초에 라히크가 지젤을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그 무엇보다 레그리아의 자살을 경계했다.

    그거야말로 탈출로가 완전히 막혔을 때 그 여자가 취할 만한 행동이지 않은가.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적극적인 탈출 방법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치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을 터.

    이상한 쪽으로 과감한 성격이니 레그리아는 제 육신을 버리는 것으로 그의 손에서도, 이 세계 전체에서도 달아나려 할 만한 성격이었다.

    그녀를 놓쳤음을 깨달았다. 인정했다.

    그러자마자 차갑게 식은 이성이 다음으로 할 일을 지시했다.

    레그리아를 되찾는다. 그 다음, 그녀가 죽으려 하거든. 혹은 그러한 일을 성공한다면 몸을 바꿔치기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라히크는 레그리아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파쥬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야 그때까지 연구를 해 두면 될 일 아닌가.

    지젤 로에르멜이 황태자 궁에 입성하게 된 까닭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레그리아의 ‘여벌 몸’이므로 실금조차 가서는 안 된다. 깨끗하고 안전히, 지극하게 보호해야 마땅하다.

    물론 거기에 정치적인 이유 또한 섞여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황태자로서 나고 자란 그의 머릿속은 그런 순간에 마저 징그럽게도 이득을 계산해 댔으니까.

    “그러니까 저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히면 되잖아요? 아니지. 저는 왜 제가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저 말고는 대체할 사람도 없으면서?”

    허나 결단코 이런 식의 시건방진 말을 듣기 위함은 아니었거늘.

    막 전장에서 돌아와 아직 핏물이 빠지기도 전인 손등에 힘줄이 선다.

    라히크는 제 앞에 선 것의 목을 조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잠시 떠올렸다.

    어찌 되었건 임산부다. 7개월.

    부른 배를 무기 삼아 저를 능멸하려 들지언정, 그 몸에 어떠한 위해도 가해서는 안 되었다.

    “……조슈아.”

    “면목 없습니다.”

    감히 자신이 레그리아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노라고, 그녀가 내버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설마 로에르멜 공작이 뒷배를 봐주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인데 어느 멍청한 세력에서 끼어들었나.

    나직하게 조슈아의 이름을 부른 것에는 숱한 질문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무튼, 제가 이렇게 복덩이 같은 아이도 가졌잖아요? 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저 아니면 누가 황태자비 자리를 대신 해요? 공작의 딸인 제가 제일 나은데.”

    “…….”

    “솔직히 언제까지고 비워 놓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제가 이렇게 판을 깔아 드렸으면 취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가소로웠다. 대체될 수 있노라 자만하는 꼴이.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저 작은 머리통을 굴려 내온 결론이 감히 오를 수도 없는 나무 위 과실을 탐하는 것이라니.

    “고작 백합 숙녀회를 움직인 것으로 내게 불리한 여론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여긴 모양이군. 그렇게 나를 압박하여 황태자비 자리에 오를 셈이었나.”

    “그, 그건 안전망 같은 거였어요. 저를 황태자비로 인정해 줄 때도 됐잖아요. 벌써 3년이나 됐는데!”

    “그것참 유감이군. 그 긴 시간 동안 한 게 고작 제 혈족의 것을 탐하려 기를 쓰는 거라니.”

    “당신…!”

    “그럴 주제도, 자격도 되지 않는 주제에. 우습지 않은가.”

    무심한 한마디에는 지금껏 라히크가 살아온 세월이 축적되어 있었다.

    황태자 자리는 온전한 그의 것,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권리다.

    이제 와서 마땅한 노력도, 자리에 걸맞은 책임감도 없는 녀석에게 빼앗길 것 같은가.

    같은 선상으로 그는 이 여자가 진심으로 혐오스러웠다.

    라히크가 지젤이 그의 이름을 업고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걸 내버려 둔 이유는 그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벨리그레엄은 동부 7왕국을 옆에 끼고 있는 형국이다.

    그들은 지금은 허울 좋은 친선을 들이밀지만 만에 하나 제국이 흔들린다 싶으면 언제든 협공하여 침략을 해 올 자들이었다.

    특히 3년 전처럼 황제는 정신을 놓았고 황태자는 외부로 나가 전쟁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황태자비마저 없다면 습격에 대처할 만한 컨트롤 타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지젤 로에르멜은 동부 7왕국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로에르멜 공작이 지켜보고 있으니 감히 나서지 말라는 뜻.

    실제로 만에 하나 국가 안보에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다면 지젤 로에르멜이라는 핑계를 대고 로에르멜 공작이 나섰을 것이다.

    국내에서 정치 싸움을 할 때야 적인 듯 같은 편인 듯 오묘하다지만 나라의 존망 사태에 있어서는 로에르멜 공작보다 더 믿을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마저도 레그리아가 순순히 황태자비가 되었더라면 필요 없었을 테지만.

    정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레그리아를 로에르멜 공작과 같은 선상에 둘 만큼 라히크는 그녀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가장 위급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동료로까지.

    “더 할 말이 없군. 방으로 모셔라. 누구도 들이지 말고 결코 나갈 수 없게 하라. 만에 하나 명령을 어기는 일이 벌어지면 모두 참수하겠다.”

    “예, 전하!”

    노심초사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조슈아는 재빨리 위병을 불렀다.

    물론 지젤은 순순히 끌려가진 않았지만, 주인이 축객령을 내리는데 버티고 있을 수야 없었다.

    “누가 사랑하는 부부가 되자고 했어요? 그게 아니잖아요! 당신 애라고 인정해! 그거만 하면 되는데!!!”

    목이 찢어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복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어떻게든 그의 평판을 추락시키려는 시도가 가상할 지경이다.

    더 말을 얹는 것도 우스워 찬장에서 독한 술을 꺼내든 라히크의 앞에 조슈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전하. 저렇게까지 황당한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친부는.”

    “확보하고 있습니다.”

    “황실 능멸 죄. 황손 사칭 죄. 죄목도 제법 많군.”

    라히크의 단단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조슈아는 더더욱 뵐 낯이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바쁘신데 이런 일까지 더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지젤이 임신한 것을 조슈아가 알게 된 건 약 5개월 차였다.

    첫 임신인 데다 체구가 워낙 자그마해서 배가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무슨 축복인지 그 흔한 입덧조차 없었다.

    지젤을 모시려고 하는 귀족 출신 시녀는 없었기에 평민 하녀 중에 뽑아야 했고, 그들의 충성심은 조금 높은 수준의 봉급보다는 아마 보석 핀 같은 것에 쉽게 허물어졌으리라.

    모두 라히크가 없었기에, 조슈아가 어느 정도는 지젤의 지적 수준이나 사교적 능력에 대해 방심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이후엔 이미 5개월이나 된 아이를 떼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기에 조슈아는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보고를 올리고 황태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사교계에서 위세가 높은 백합 숙녀회를 공식적으로 움직이게 하다니.

    그것도 황손을 품었다며 사칭까지 하여서.

    보통 담으로 나올 생각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유리하게 이용하는 수밖에.”

    “어찌 이용하면 될는지요?”

    “지젤 로에르멜을 이용해 레그리아를 끌어내야겠다.”

    “예에에?”

    “비밀리에 레그리아를 찾기 위해 붙여 두었던 모든 감시를 물려라. 지젤 로에르멜과 외부 외출을 할 만한 장소와 일자를 만들도록.”

    레그리아는 생각보다 의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어찌나 말갛고 순하던지, 숲에서 여우 한 마리를 잡아와도 저것보단 더 경계하겠다 싶을 정도였으니.

    게다가 3년간 그 위선적인 모스그라토의 땅에서 살며 얼마나 나긋이 풀어져 있을지 눈에 선했다.

    ‘그리 많이 나다닐 필요도 없다.’

    소문에 맞추어 두 번. 더 필요하다면 세 번까지만.

    그러면 레그리아는 자연스레 숨어 있던 굴에서 빠져나올 게 분명했다.

    모스그라토에 눌러앉고 싶었더라면 일찌감치 에화와 짝을 맺었을 테고, 그러면 에화 놈은 반드시 자랑을 하러 왔을 테니까.

    “너는 너를 구속하는 것에서 아직도 달아나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기회를 만들려 하겠지.

    ‘내가 너를 찾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면 고개를 내밀 테지.’

    혼자 남은 방.

    이 모든 상황을 함께 지켜보던 레그리아의 환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예쁜아.”

    “응….”

    “지금 일어나면 뱃놀이 갈 수 있는데.”

    “으응.”

    햇살이 나른하게 비쳐드는 오후였다.

    가벼운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몰려드는 노곤함에 레그리아는 야외 정원에서 잠을 청했다.

    얇고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이불을 덮고 푹신한 쿠션이 덧대어져 있는 흔들의자에 앉으면 이보다 더 잠이 잘 올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꿀 같은 단잠을 잤을까.

    레그리아는 제 볼을 콕콕 찌르는 손길에 하품을 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뱃… 놀이, 하암. 가고는 싶어.”

    “그저께까지 비가 오는 바람에 못 갔잖아. 오늘은 날도 맑고 물도 적당하니 호수에 가요.”

    “응….”

    저를 향해 뻗어지는 손을 쥐고 비척거리며 일어선 레그리아는 자꾸만 나오려는 하품을 참으려 혀를 깨물었다.

    여전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모습에 쿡쿡 웃던 에화는 곱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 레그리아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한 차례 비가 쏟아진 뒤, 맑게 갠 모스그라토 영지의 여름은 그 자체로 찬란했다.

    막 시작하는 연인이라면 누구라도 데이트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문제라면, 아직도 두 사람은 연인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사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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