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34)
  • 93화

    ‘동공, 확장되지 않은 상태. 손, 떨리지 않는 상태. 다 멀쩡하신데?’

    신성 기사가 광기에 물들어 마귀화가 진행 중일 때는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난다. 대표적인 게 동공 확장이었다.

    ‘물론 안광이 좀 번들거리긴 하시지만….’

    저건 전쟁터에서 사람을 썰다 오셨으니 어쩔 수 없는 거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베던 기세가 여전히 눅진하게 들러붙어 있지 않은가.

    황태자는 무의식중에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위압감을 흘려내고 있었는데, 그게 또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그러니까 뭐, 레그리아 님이 아니라 레아라는 다른 여성분을 만나셨을 수도! 있는 거지, 암!’

    조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승전을 가져온 황태자다.

    반드시 완벽해야만 했다. 그 어디에도 상처 하나 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지 않던가.

    인간이되 인간으로 살 수 없다. 필멸자이지만 불멸자인 양 행세해야 하는 것이 대제국 벨리그레엄의 황태자.

    혹시 만에 하나 황태자가 환각 같은 걸 본다면…….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그냥 많이 피로해서 그러신 거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집이지만 쉬려고 구해 놓으라 하신 거라면 거기서 며칠이나마 휴식을 취하시면 멀쩡해지시겠지.

    조슈아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감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슈아가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들었을 때, 라히크는 레그리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순간이 없으니 그건 그다지 대수롭지는 않은 일이었다.

    레그리아가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부터 라히크는 뛰어난 기억력을 이용해 그녀와의 모든 순간들을 차례대로 복기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찢은 뒤 머릿속에서 차분히 재생하는 과정은 느리고도 고요하였기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피 묻은 칼을 닦아내는 와중에도, 적의 습격에 맞서는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라히크가 현재가 아닌 과거를 곱씹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몰랐다.

    지금도 라히크는 그녀를 생각한다.

    흰 손끝으로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모습. 그 색감의 대비. 어둠 속에서도 기어이 촛불 하나를 켜고 작곡을 하던 장면이 어른거린다.

    레그리아가 그에게 남기고 간 것은 어여쁜 얼굴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고집을 남겼다. 꺾이지 않는 의지를 새겼다.

    잊히지 않는 건 그 탓이었다.

    외모는 시간이 흐르면 상하지만 영혼은 불멸하지 않던가.

    “네가 원하던 집이다. 어떠하냐.”

    몇 시간 뒤, 축제가 열린 시각.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갈 때쯤, 라히크는 황성에서 나와 레러리 하우스로 향했다.

    수도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석조 주택은 고작 해 봐야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크기일 뿐이다.

    자세히 돌아보면 이전 집주인이 아낀 흔적이 곳곳에 있기야 했으나 라히크의 눈에는 딱히 대단할 것 없었다.

    이 집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면 입구부터 현관까지 쭉 이어진 길과 양옆에 심어진 갖은 관목들이었다.

    낮은 나무와 이름도 모를 야생화가 함께 어우러져 나름대로 그럴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음 같아서는 낮은 담장을 죄 허물고 성벽처럼 빽빽하고 높게 다시 지으라 하고 싶으나 그럴 수야 없겠지.

    이 집에 살 사람이 원하지 않을 테니.

    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공간은 그의 높은 심미안이나 기준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으나 아마 레그리아는 제법 마음에 든다고 할 터다.

    “너는 넓은 공간은 싫다 하지 않았느냐. 이리 원하는 대로 해 주었는데 왜 말이 없어.”

    까다롭기도 하지.

    입속으로 혀를 찬 라히크는 따로 가져나온 열쇠를 꺼내 현관을 열었다.

    지금은 황태자의 차림도, 기사의 행색도 아니었으므로 오래 비어 있던 집에 들어가는 그를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소리를 낸다. 낡아빠진 마룻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 세월 동안 점점 가벼워져 가는 노부부만 상대했던 나무 바닥은 억세고 거친 사내의 무게를 도무지 버텨내지를 못했다.

    “전부 바꾸라고 해야겠구나. 바닥 정도야 새것이어도 괜찮지 않겠나.”

    미간을 찌푸리던 라히크는 그를 담기엔 버거운 내부를 둘러보다 곧바로 주방 근처의 쪽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노을이 머무는 작은 텃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이 레러리 하우스를 사들이도록 지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는 황궁으로 치자면 중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 있다. 벽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데 볕은 또 잘 고였다.

    식물을 키우기에 괜찮은 환경.

    허브 따위가 심어져 있던 밭에는 이제 묘목이 자리하고 있다.

    한 해 정도 더 흐르면 뿌리를 단단히 뻗고 기지개를 켜듯 가지를 뻗어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리라.

    초원인이 감추고 있던 용의 열매를.

    “이걸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너는 알 것 없다.”

    숱한 위기를 겪었다.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고 식도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런 다음에 가져온 것이나 알아 달라 징징거리기 위해 여기 심은 것이 아니었다.

    생색을 내는 것만큼 추하고 보기 나쁜 것은 없으니.

    그렇게 선을 그은 라히크는 묘목 근처에서 실망한 표정을 짓는 환영을 향해 다시금 말을 건넸다.

    “작다고 얕보지도 말라. 이리 보여도 용의 기운을 품은 것이다. 3년이면 제대로 된 나무가 된다더군.”

    ‘그래서 어쩌라고. 칭찬이라도 해달라고?’

    환영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빈정거렸다. 거짓이면서도 한 번 웃어주지 않는 것이 참으로 레그리아다웠다.

    너는 그토록 고집이 셌지.

    라히크는 셔츠의 팔을 걷어 올린 채 몸소 텃밭을 돌보았다.

    고용된 정원사는 이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꾸었겠지.

    전문가의 숙련된 솜씨로 가꿔나가는 게 더 좋기야 하겠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왔으니 이제 더는 이 집에 타인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그녀를 위해 만든 안식처이니까.

    ‘내가 거기서 살아 줄 거라 생각해?’

    ‘진짜도 아니면서 참으로 끈질기게도 사라지질 않는구나.’

    일어선 라히크의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레그리아의 모습을 한 환영은 그제야 사라졌으나 라히크는 알고 있었다.

    저것은 어차피 곧 다시 나타날 거라는 걸.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 건 그녀가 사라진 지 1년쯤 지난 뒤였다.

    처음에는 흐릿한 잔상처럼 나타났다가 그가 인식하기 시작하자 점점 더 또렷해졌다.

    사실 라히크는 그것이 허깨비임을 모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려 했다.

    두 번 놓치는 일이 없도록.

    이 환영은 그가 탐한 그녀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히크는 정신을 차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가 사라져 버릴 테니까.

    ‘어두워졌군.’

    라히크는 작은 집에서 레그리아를 생각했다.

    노을이 가시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수천 번은 뜯어보아 더 볼 것도 없이 너덜너덜한 기억을 다시금 꺼내어 꿰맸다.

    네가 내게 보여 준 표정, 내게 보여 준 눈빛, 내게 속삭인 말.

    그중 진심이었던 게, 진짜였던 게 단 하나라도 있을까.

    돌이켜 보면 볼수록 확실해진 것은 레그리아는 늘 그의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를 맞을 준비가 된 레그리아만을 보았다. 그게 아닐 때는 쓰러지거나 아플 때뿐.

    그녀가 제정신일 때 편하게 구는 모습은 본 적 없다.

    ‘이제 나는 내가 성급했음을 안다.’

    레그리아의 상태를 살폈노라고 자만했다. 그게 오만임을 알면서도 괘념치 않았다.

    다소 망가진 사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제 옆에 황태자비라는 이름으로 서고 난 뒤부터 관계를 재정립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입맛이 쓴 오판이었다.

    불조차 켜지 않은 집안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그러나 굳이 일어서서 스스로 불을 켤 마음은 들지 않았다.

    조슈아에 의해 등 떠밀리듯 황성을 나온 지 어느덧 세 시간 째.

    이렇게 장시간 쉬어 본 적이 없어 모든 것이 어색할 따름이다.

    새벽녘까지 화려한 불빛에 휘감겨 살아가야 하는 삶이니 진정 쉴 때만큼은 오히려 어떤 빛도 없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조슈아가 데리러 올 것이기도 하고…….

    “라히크 님! 라히크 님, 큰일 났습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나타난 조슈아가 바깥에서 그를 불러댔다.

    고요하게 몸을 일으킨 그는 밤의 짐승처럼 느릿이 움직여 현관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냐.”

    “일전에 보고드린 지젤 로에르멜 말입니다.”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 이름에 라히크의 눈썹이 추켜세워졌다.

    숨을 몰아쉬던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안으로 들어와 우선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전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요사이 지젤 로에르멜과 어울리던 백합 숙녀회에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무슨 성명을.”

    “황태자 저하께서 지젤 로에르멜이 임신한 아이의 치, 친부시라면…….”

    “…….”

    “가여운 지젤 양을 박대, 외면하지 마시고 아이를 황손으로 인정해 주시거나 그게 안 된다면 미혼인 채로 아이를 가진 지젤 양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 주셔야 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인뎁쇼.”

    말을 잇던 조슈아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굴렸다.

    잠시 침묵하던 라히크는 짧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이없음, 황당함, 기가 막힘. 그 모든 종류의 감정들이 수면에 떠올랐다 일시에 쓸려 내려간다.

    다시금 완벽한 황태자의 가면 속에 모든 감정을 쑤셔 박은 그는 짤막하게 명령을 내렸다.

    “지젤 로에르멜을 불러와라.”

    “그럴 것도 없이… 저어, 성명 발표 이후에 백합 숙녀회에서 단체로 찾아왔습니다.”

    “하.”

    “일단 지젤 양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냈고요.”

    세 시간이다.

    그가 휴식을 취하고,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게 단 세 시간.

    그 사이에 이런 일이 터져 즉각 대응할 수 없게 되다니.

    “여벌 몸 주제에 꽤나 기고만장하구나.”

    잇새로 새는 음성이 뼈가 시리도록 냉랭했다.

    지젤 로에르멜의 아이는, 그가 싸지른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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