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7. 환영(Geistererscheinung)
승전식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을 꼽으라면 지친 말과 축 처진 어깨, 기이할 정도로 음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이리라.
전장에서 아무리 고생스러웠더라도, 충격적인 비보 탓에 침통하더라도, 승전 행렬에서 기사들은 당당해야만 했다.
울거나 고개를 숙이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지쳐서 쓰러지고 싶어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허리를 곧게 펴야 하며 수도에 입성 전, 의장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테지만 그게 안 된다면 투구를 써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어차피 백성들이 보는 건 ‘대단한 기사들’이란 허상뿐이니까.
그들에게는 허상을 지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와아아아!”
“기사들이다! 기사들이 돌아왔다!!!”
황태자의 군대를 맞이하는 수도는 열광 상태였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 병사들은 애써 미소를 띠며 함성에 화답했고, 그들이 입은 우그러진 투구나 갑옷 위로 종이꽃이 흩날렸다.
행렬의 선두에 선 기사들은 새로 지급받은 붉은 망토를 떨치며 말을 몰았는데, 그 모습은 대단히 위용이 넘쳐 뭇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 마땅했다.
3년은 햇수로 따지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에 보내 놓고 기다리는 이들의 입장에선 꼭 30년 만에 만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열에 맞춰 움직이는 행렬 속에서 제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 이들은 기쁨에 차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모두가 다 행복한 재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기, 혹시 우리 아들 못 봤나요? 보병대라 했는데… 제, 제가 그냥 놓친 거겠죠?”
“아빠! 아빠, 어디 있어! 아빠아아!”
이 승리에는 희생이 컸다.
자원의 보고라 불리는 초원의 일부를 복속시켰으며 그로 인해 제국은 더더욱 강대해졌다. 심지어는 그 길을 따라 아리툼까지 진격해 본때를 보이고 이권을 취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떠난 군인 중 약 사 분의 일 정도가 목숨을 잃은 대가였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에 아주 귀한 것을 가져오셨다던데?”
“내가 저기 술집에서 들었는데, 용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구먼!”
“용?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다 있나!”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른 황태자가 초원이며 아리툼에서 대단히 귀한 것을 가져왔다는 소문은 일찌감치 돌았다.
평민들이야 그게 무엇인지 볼 일도 없고 가까이 가 볼 수도 없겠지만 인간은 본디 가질 수 없는 것에 더 호기심을 보이는 종족이지 않던가.
게다가 그 호기심은 얼마 전에 붙은 벽보로 인해 더더욱 증폭된 상황이었다.
「제1조. 앞으로 3년간, 모든 벨리그레엄인에게 세금을 면제한다.
제2조. 참전한 병사와 그 가족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위락 시설을 건설하겠다.
제3조. 사망한 병사의 가족에게는 그 공에 따라 넉넉한 위로금을 지급하며 매해 유족 연금을 지급한다.」
군대가 돌아오기 전, 이런 내용을 담은 벽보가 전국에 붙었다.
황족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평민의 입장에서 이러한 복지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애초에 들어본 적도 없다. 기대도 하지 않았었는데.
“뭔진 몰라도 아주 좋고 멋진 것을 가져오셨나 봐.”
“맞아, 그러니까 이렇게 해 주시는 거겠지!”
승리라는 것이 피부에 와 닿는 조항들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흥분할 수밖에는 없었다.
“와아아아아!”
금발, 금안의 황태자가 웅장한 성벽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백성들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어…?”
“왜 그려?”
“아니, 방금 황태자 전하의 용안을 뵈었는데… 너무….”
“너무 뭐?”
“아, 아닐세. 피곤하시니 그런 거겠지.”
성문에 이르러 라히크가 투구를 벗는 걸 본 몇몇 사람들은 제 시력을 탓하거나 피곤해서 그런 걸 거라고 치부했다.
빛나는 금빛 투구 아래에 감춰져 있던 얼굴은… 무엇이든 무찌를 듯 용맹한 기사도 아니요, 승리감에 도취되어 기뻐하는 낯도 아니었다.
일그러지고 뭉그러진 고통의 초상.
그 누구도 승전을 이끈 황태자에게서 볼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표정이 거기에 있었다.
* * *
“레그리아는.”
“죄송합니다. 아직 찾지 못하였….”
“초원에는 없었다.”
화려한 승전식 행렬이 끝난 다음에는 가족 상봉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해가 지면 그때부터 수도 전역에서 떠들썩한 축제가 열리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 외에는 따로 재회니 뭐니를 할 생각도, 그럴 상대도 없었던 라히크가 향한 곳은 황태자 궁이었다.
1년에 한 번씩 수도로 돌아와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급한 건만 해결을 보았을 뿐. 그가 해야 할 일은 숱하게 널려 있었다.
라히크는 조슈아가 미리 준비해 둔 자리에 앉아 곧바로 깃펜을 들었다.
방금 집무실에 들자마자 레그리아에 대해 질문한 건 그저 흘러가는 안부 인사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듯, 혹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적 없다는 듯 라히크의 태도는 평이하였다.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와 주인을 맞이했던 조슈아가 머쓱해질 만큼.
“초원을 샅샅이 뒤진 다음 진군하여 아리툼까지 넘어갔음에도 그녀는 없었지.”
서류를 넘기며 무심한 어조로 운을 뗀 라히크의 얼굴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많이 거칠어진 상태였다.
까슬해진 낯이며 이전보다도 더 날카로워진 턱선이 그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외모에 흠이 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야성적인 미가 더해졌으면 더해졌지.
3년 내내 기사들과 함께 먹고 자며 전쟁을 해 온 황태자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풍겼다.
‘뭐랄까. 좀 더 어른스러워지셨다고 해야 하나?’
황태자가 결재한 서류를 받아든 조슈아는 뺨을 긁적이다 문득 금빛 동공이 저를 향한 것을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벨리그레엄 내에서 그녀를 찾는 건 네게 일임하겠다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드러나는 군사는 물리고 수배령도 취소하였습니다마는… 아직 꼬리가 밟히지 않습니다. 계속 나타나는 그분과 비슷한 여자는 죄 가짜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보고를 한 조슈아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웃으셨어?’
라히크의 까칠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쳤다가 금세 사그라졌다.
황태자 궁에 든 이후 처음으로 보인 웃음이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예…?”
“네 성격에 벨리그레엄의 극에서 극까지, 찾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 아닌가.”
“그렇지만요…?”
“그래도 못 찾아냈다는 건 하나뿐이다. 레그리아는 모스그라토 대공령에 있다.”
확신은 담백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모스그라토 대공령에는 대공과 함께 가서 샅샅이 뒤져보기까지 했는데요…! 그 뒤로도 계속 첩자를 보냈는데…!”
“너는 뛰어나지만, 그 간교한 녀석에게는 당할 수 없다, 조슈아.”
라히크가 입매를 문지르며 픽 조소했다.
국내에서 레그리아의 흔적은 너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래, ‘지나치게 깨끗하게’.
전쟁을 치르면서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손에 거머쥔 것은 레그리아가 국외로 나간 적 없다는 증거뿐.
그녀를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라히크는 오히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에화에게 붙잡혀 있을 것이다.
신황청에서처럼 탈출하지도 못했다.
‘그토록 벗어나 제 인생이라는 걸 찾으려 했던 계집인데.’
모스그라토 대공령이라 하여 편안히 발 뻗고 지냈을 리 있나.
“모스그라토 공자는 요즘 무얼 하지?”
“음, 그냥 평소처럼 사교 활동을 하긴 합니다만 3년 전에 비하여 그 시간이 확연히 줄었습니다. 늪 능력으로 여기저기 나타나기는 하는데 체류 시간이 길지 않는 걸로 판명되었습니다. 길어 봐야 한 시간, 혹은 그 이내로 돌아간다더군요.”
“그렇겠지.”
그 여자는 내버려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불안하니 혼자 둘 수 없을 테고, 곁에 붙어 알랑거리며 관심 한 조각이라도 받아 보려 개처럼 낑낑댔을 것이다.
그게 벌써 3년.
그 사이에 그 여자의 마음을 얻었다면 필시 자랑하러 왔을 터인데 소식조차 없다는 건 꾸준히 실패하고 있다는 뜻.
라히크는 이 상황이 대단히 기꺼웠다.
매번 그가 실패하던 것을 간단히 성공시키는 에화였으나 3년씩이나 공을 들여도 레그리아를 함락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
‘이제 슬슬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을 텐데.’
에화든 레그리아든.
“그런데 전하. 오늘은 좀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기쁜 날이잖습니까.”
“철저하게 계획하여 취한 승리가 무엇이 그리 기뻐서.”
“그렇…긴 하지만, 아! 그럼 그 집을 보고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집’이란 전쟁에 나가기 직전, 라히크가 누구도 모르게 사들여 관리하라고 명한 작은 가옥이었다.
일명, 레러리 하우스.
수도 내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어느 인심 좋은 노부부가 오랫동안 살다가 팔려고 내놓은 것이다.
조슈아는 대체 황태자가 저런 걸 왜 원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지붕부터 정원의 수도꼭지 하나까지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고 관리를 해 왔다.
“관리는.”
“전문 정원사를 고용했습지요. 저도 퇴근할 수 있는 날에는 한 번씩 들러서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그렇군. 묘목은.”
“당연히 그것도 무사히 잘 심어 두었지요. 지금쯤 무럭무럭 자랐을 겁니다.”
라히크는 신비의 열매를 구했다.
하지만 그로써 신성인이 아이를 낳아도 죽지 않을 수 있게 되었느냐 하면, 아니다.
열매의 숫자는 지나치게 적었다.
전쟁 자금을 기꺼이 내어 놓은 그 비밀 회합의 쓰레기들에게 나눠줄 몫 따윈 아예 없을 만큼.
딱 한 알만 섭취한다 하여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매일 숨 쉬듯 먹어야 한다니 과연 왜 이제까지 초원에서 그걸 독점하고 내어놓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래서 라히크는 결단을 내렸다.
열매는 수확하여 놈들에게 돌리되 나무의 묘목은 오로지 그 혼자만이 갖는 것으로.
그리고 그건 누구도 모르게 다른 묘목 사이에 섞여 레러리 하우스의 조그마한 밭뙈기에 심겼다.
“그럼 쉬고 오시는 겁니다? 제가 얼마나 집을 잘 가꿔 두었는지 꼭 보시고 칭찬 좀 해 주십시오.”
“알겠으니 그만 잔소리해라, 레아.”
“……예?”
레아? 레아가 누구지?
갑작스레 튀어나온 호칭에 조슈아는 당황했지만, 프로 보좌관답게 안색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쯤이야 잘못 부를 수도 있는 거지.
명백히 여자 이름이긴 하지만. 왠지 레그리아 님의 애칭인 것 같긴 하지만….
아니, 레그리아 님을 갑자기 왜 부른단 말인가. 여기 계시지도 않는데, 꼭 환영이라도 본 사람처럼.
조슈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제 주인의 상태를 차근차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