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34)
  • 91화

    어찌나 급하던지 조지는 쓰고 있던 투구를 벗기도 전에 조슈아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빗속에서도 그것 하나만큼은 젖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였다.

    “어서, 어서 보고드려야…!”

    “아, 알겠으니까 거기서 멈춰.”

    폭주한 말처럼 미쳐 날뛰는 조지를 멈춰 세운 조슈아가 먼저 급보를 열어 펼쳤다.

    본래 황태자에게 올라가기 전,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확인하고 거르는 것이 그의 역할.

    서신은 모두 두 장으로 하나는 제국에서 사용하는 재질이 아니었고, 다른 것은 국경에서 급히 써내려 보낸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조슈아는 다음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떡 벌렸을 뿐.

    “뭐지?”

    요란한 와중에도 서류 작업을 해나가던 라히크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냉랭한 낯을 돌아보던 조슈아는 진심으로 조지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무엇이냐 물었다.”

    “저어. 음. 여기 있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조슈아가 두 개의 서신을 내밀자 라히크가 훑었다.

    처음은 대충, 그 뒤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렇게 다섯 번 다시 읽은 라히크는 아무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향하는 것을 본 조슈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정을 기다렸다.

    “……지젤 로에르멜을 데려와라.”

    “예?”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반문하게 된다더니, 정말 그랬다.

    초원 놈들의 목을 쳐라, 혹은 씨를 말려 버리겠다 등등의 난폭한 선언을 기다렸던 조슈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데록 굴렸다.

    지젤? 웬 지젤?

    “당장 연락을 넣도록.”

    “어… 그, 알겠습니다!”

    하지만 보좌관이 무슨 힘이 있나. 까라면 까야지.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이다.

    조슈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지의 팔을 부여잡고 당겼다. 얼른 썩 꺼지라는 뜻이었다.

    조지는 태연한 황태자를 몇 번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다가 이를 악물며 물러섰다.

    “그럼 전하, 명하신 것들 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요!”

    억지로 쥐어짜낸 조슈아의 발랄한 외침에도 라히크는 답이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비가 퍼붓는 바깥을 응시할 뿐.

    그리고 조슈아와 조지가 함께 사라지고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은 순간.

    콰광!

    먹구름으로 가득하던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열 번도 넘게.

    채찍 줄기처럼 세상을 내리찍던 낙뢰가 잠잠해진 것은 급보가 적힌 종잇장이 찢겨나갈 듯 구겨진 뒤.

    그 안에 적힌 문장은 짧았으나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할리카는 내 짝이 되었다.]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내용. 분명한 도발.

    만약 레그리아가 여전히 그의 손아귀 내에 있었더라면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헛된 선언이었다.

    그 다음 종이에는 해당 선언에 대한 진위 여부가 적혀 있었다.

    [……하여서 야만족의 말은 사실인 것으로 판명됩니다. 예비 황태자비 전하와 닮았다고 여겨지는 분이 몇 번이고 국경 지대에 출몰하였습니다. 어찌하여야 할지 명령을 기다립니다.]

    그가 아는 에화는 이런 식으로 정보 교란을 할 만한 놈이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다.

    레그리아를 모스그라토 대공령에 숨겨 두었을까. 아니면 초원으로 보냈을까.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제3의 구역에 감춰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히크는 레그리아를 찾기 위해 풀어 둔 병력을 거둬들일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대체 어디에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혹시 만에 하나라도 그의 뒤통수를 쳤듯 에화를 속이고 달아난다면 잡아야 하니까.

    ‘우선 모스그라토에 직접 다녀와야 한다. 거기에서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경우에는 다른 쪽을 생각해야 하고.’

    그러나 시간이 있던가?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자꾸 멈춰지는 건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너는 나를 보기 좋게 기만하였다.’

    빗물 맺힌 창가에 제 얼굴이 비쳤다.

    그 위로 저를 보며 기겁하며 떠나던 레그리아가 겹친다.

    그를 보며 웃는 일은 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귀신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을 짓진 않던 여자였다.

    그날, 그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도 레그리아를 알아보았다. 누더기 같은 것으로 몸을 가리고 머리칼을 짧게 자른들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숲의 경계에서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꼴을 보며 라히크는 처음으로 대화를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돌 만큼 분노하기는 하였으나 그간 너무 바빠 소홀하여 이런 앙탈을 부리는 거라면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웬만한 것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성적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고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짓거리로 이뤄져 있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해를 한 바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그대로 떠났지.

    ‘충분히 대화를 해 볼 수 있었음에도 너는 몰이해를 택했다.’

    뿌득. 손에 힘을 주어 창가를 쓸어내린 라히크는 지난 몇 달간의 레그리아를 떠올렸다.

    그를 향해 미소 짓던, 앙탈하던, 흥분해 달떠 안겨 오던 모습들.

    그의 눈을 속이며 연기하고 도망하는 것이, 다른 사내를 믿는 것이, 야만족의 품에 안기는 것이 대화를 청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는 건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충분히 받아들인 사안이라 여겼는데.

    그나마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 비슷한 것을 더듬어보던 라히크는 눈가를 찡그렸다.

    “나는 집이 너무 넓은 건 싫어. 공간이 넓으면… 혼자 있어야 하는 면적도 넓어지는 거잖아. 그래서 작은 집이 좋아. 혼자 남겨져도 덜 외롭게.”

    그 말에 대해 무어라 대꾸하였던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일축했었던 것 같다.

    그 외에 떠오르는 단편적인 문장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레그리아는 미소만 지었던 것 같다.

    라히크는 그러한 반응을 수용으로 받아들였다.

    이 세계에서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가장 살아남기에 괜찮은 방법이 무엇인지 깨달은 거라고.

    허나 그게 다 연기였다니.

    수작을 부릴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신성 기사를 몇이나 이용할 줄은 몰랐다.

    역사적으로 예비 황태자비가 도망하려 한 일은 몇 번이고 있었으나 이토록 거대한 규모였던 적은 없었다.

    ‘미련한 것.’

    그가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레그리아가 안전하려면 지고한 위치에 올라 있는 것이 가장 나았다.

    모스그라토 대공령이든 초원이든, 그도 아니면 어디론가 혼자 사라졌든 간에 위험한 건 같았다.

    모두가 그녀를 이용하려들 테니.

    황태자비가 그리도 되기 싫었다면 장기적으로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수십, 수백 명이 있으니 개중 하나를 골라 앉혀 놓으면 될 일.

    우선 황태자비가 된 뒤에 레그리아를 폐위하는 방법도 있다.

    전쟁이 끝나면 승전과 함께 제위에 오르고 황후를 다른 이로 바꿀 수도 있었다.

    허나 이런 이야기는 모두 극비이니 레그리아가 정식으로 황태자비가 되기 전에는 꺼낼 수 없었다.

    특히 신황청 내에서는 결코.

    “……윽.”

    갑자기 답답함이 차올라 스스로 목을 움켜쥔 라히크는 손아귀에서 간신히 힘을 풀었다.

    어린 시절부터 원하는 대로 무언가가 이뤄지지 않으면 발작과도 비슷한 이런 자학 증세가 나타났다.

    이제 나이가 차고 레그리아를 만나 정신 접촉을 받으며 나아졌다 여겼는데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이런 걸 보면 전혀 호전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그저, 빼앗겼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육신마저 다치게 하는 걸지도.

    목에서 쓴 물이 차오르는 걸 다시 삼켜 누르며 라히크는 표정을 굳혔다.

    황태자답게. 모두가 기대하는 모습대로.

    기계 장치처럼 움직여 황태자비의 방으로 향하는 그의 발치에 그림자가 어둡게 늘어졌다.

    툭.

    주인 없는 방의 문은 열었으나 차마 난입할 수는 없었던 라히크는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고풍스러운 내부를 보며 문간에 기대어 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안의 것들을 모조리 박살 낼까 하다가도 물건에 화풀이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멈추게 되었다.

    그보다는 이곳에 없는 것을 되찾아와 완벽해지게 만들어야겠지.

    ‘몸을 바꾸게 해서라도.’

    라히크는 숨죽인 채 벽에 서 있는 하녀에게 손을 까딱였다.

    레그리아의 안전 하나만을 생각하여 찾아 둔 말 못하는 하녀였다.

    “불을 켜라. 한 시도 꺼지게 두지 마라. 다시 명령할 때까지. 만일 이곳의 불이 꺼지면 죄를 물을 것이다.”

    납작 엎드린 하녀의 옆을 스쳐 지나며 라히크는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눅진하다.

    그 건방진 계집이 다른 남자의 품에 스스로 안겼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너는 반드시 여기에 있어야 한다.’

    아집이라도 상관없다.

    다른 사내와 짝을 맺어 더는 쓸모없어졌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벗어나게 두지 않는다.’

    그가 처음으로 가질 수 있었던 그만의 것이다.

    명실상부 황태자만의 여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든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겉껍데기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터이니.

    * * *

    그로부터 3년 뒤.

    황태자가 이끄는 벨리그레엄의 군대가 초원 연합국 중 한 곳의 길을 뚫고 아리툼으로 진격했다.

    역대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은 없었을 정도로 희생이 컸다.

    승리였으나 피에 물든 승리.

    독기가 올라 새파랗게 일어난 군대가 벨리그레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사라진 ‘예비 황태자비’였던 레그리아 로에르멜의 동생.

    지젤 로에르멜이 혼전 임신을 하였다는 소문이 수도 사교계를 파다하게 휩쓸었다.

    동시에 일각에서는 지젤 로에르멜이 품은 아이가 황태자의 씨라는 소문 역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여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