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폭우가 쏟아지는 수도에는 며칠째 거센 피바람이 불어 닥치는 중이었다.
“치워라.”
나지막하게 떨어진 명령에 벽에 붙어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바닥을 닦았다.
한 번 걸레질을 할 때마다 새빨갛고 뜨끈한 것이 끈적하게 묻어난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의 몸속을 유영하던 생명이 지금은 가치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이런 게 벌써 며칠이나 지속되어 이제 다들 맑은 공기보다는 비릿한 혈향에 익숙해질 정도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불평하거나 함부로 입이라도 떼는 자는 누구도 없다.
빗소리를 의지 삼아 다들 그저 침묵할 뿐.
“다음.”
“아닙니다! 전하, 저는 정말로 아닙니… 아아악!”
쿵.
미약한 변명 따위는 죽음을 앞당기는 일에 불과하다.
황태자의 친위대는 이미 모든 증거를 갖고 있으니까.
지금 대전에 끌려 나와 줄지어 처형당하는 자들은 모두 어느 단체, 귀족, 국가의 첩자들.
독버섯처럼 숨어든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잘 감췄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다.
라히크와 유능한 보좌진들은 그저 내버려 두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제거해 봤자 다음 첩자가 들어올 뿐.
누구인지 특정한 상태라면 모른 척 두고 역으로 감시하는 게 편하다.
그리하여 이따금 정보 교란이 필요할 때가 있으면 각 첩자들에게 은밀하게 흘려 조종하는 등, 세밀하게 이용을 해왔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적으로 제거한다는 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뜻.
말 그대로, 얼어붙은 채로 서로 간을 보던 현 상황을 끝내고 아리툼과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각오였다.
동시에 라히크는 갑작스럽게 명령을 내려 수도를 감싸는 네 개의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오늘 자정 이후로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외부에서 알 길은 없을 터.
“앞으로 우리는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울인다.”
“예! 전하!”
“귀족 평의회를 소집하라. 지방에 있는 자에게는 명령서를 보낼 필요 없다. 수도 내에 있는 자들로만 모든 행정 절차를 처리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아무것도 몰랐던 하인들이야 겁을 먹지, 황태자의 측근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다렸던 상황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을 뿐이었다.
벨리그레엄과 아리툼.
두 개의 대 제국이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던 시대를 끝낼 때가 왔다.
지키기 위한 검보다는 정복을 위한 검일 때 더욱 피가 끓는 법.
아리툼보다도 초원 연합국에 더 증오가 깊은 기사들은 이번에야말로 복수를 하겠노라 칼을 갈았다.
“전하!”
“전하!”
그들에게 있어 황태자는 따라야만 하는 존재. 신. 주군. 복수를 이룩하게 해 줄 구원자다.
야만족의 손에 아들을 먼저 보내야만 했던 노장도 라히크의 앞에 기꺼이 그 무릎을 꿇었다. 이제 갓 기사 서임을 받은 앳된 이들은 자신이 세울 무용담과 공을 생각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금빛 망토를 두르고 승리의 월계관을 쓴 황태자의 뒤로 수십, 수백의 기사들이 따른다.
열에 맞추어 찍어 내리는 군홧발 소리가 거세었다.
눈가를 다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한 라히크는 여전히 강했으며 흔들림 하나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겉보기로는.
“전하, 좀 쉬셔야 합니다. 일주일째 불면 중이지 않으십니까.”
“됐다.”
“아니, 오늘은 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 목이 달아나더라도요!”
첩자를 잔인하게 처형한 뒤 기사들을 모아놓고 사기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한 라히크가 해야 할 다음 일은 서류 작업이었다.
레그리아를 잡지 못한 숲에서의 그 날 이후, 라히크는 스스로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조금도 쉬지 않도록 일, 행사, 일, 그리고 또 행사. 그 다음에는 파티.
남성 중심 살롱에 얼굴을 내미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는 사이사이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을 불러 윽박지르고 달래는 접견식도 포함이었다.
황제는 따로 있는데 황제의 일을 모두 다 맡아서 하려니 몸이 남아날 리가 있나.
레그리아를 비로 맞이하기 위해 지난 반년간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그에게는 늪 능력처럼 편리한 것 따위는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수도에서 신황청까지 오가야만 했다.
그 탓에 중요한 일을 몇 가지 미뤄 둔 것도 이제는 해결을 봐야겠지.
‘그리고 이제는 필요 없는 황태자비의 침실도 모두 치우라고 명해야 하는데. 스스로 달아난 계집에게 그런 것은 사치이니.’
일순 눈앞이 흐릿하여 라히크는 미간을 좁혔다.
그 빌어먹을 짐승이 눈가를 찢어 놓은 다음부터 시력이 떨어졌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시야가 흐렸다가 맑았다가를 반복했다.
지금이야 상관없으나 전투 중에 이러면 목숨이 꽤 위험하겠지.
제 목숨임에도 무심히 생각하고 넘긴 라히크는 잔소리를 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조슈아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차.”
“뜨끈한 걸로 올릴깝쇼? 주무시기 편하게 루이보스나 캐모마일은 어떠신지?”
“시원한 것으로. 홍차.”
“…쳇.”
조슈아는 대놓고 혀를 차긴 했지만 시킨 대로 착실히 따랐다.
앞으로는 먹고 마시는 것에 이제까지보다 더 조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가 실로 믿을 수 있는 자가 만든 것이 아니면 라히크는 입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레그리아는.”
“아직… 붉은 머리에 중키,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성이나 남성을 본 자가 없다고 합니다. 마치 귀신처럼 사라지셨어요.”
“그게 아니라 조력자가 도운 거겠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시종에게 얼음을 가져오라 지시하여 얼른 냉차를 만들어낸 조슈아가 슬쩍 질문했다.
잔을 받아든 라히크는 픽 웃을 따름이었다.
“이 나라에서 이토록 오래 내 눈을 피해 그녀를 도망하게 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다.”
“음… 그렇긴 하지요.”
“다만 증거가 없어. 그 시간에 놈은 살롱에 있었다고 한다. 지난 연회들에서도 녀석과 레그리아가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이 없지.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다. 아마 레그리아조차 모르게 계획을 짰을 터.”
라히크가 말하는 ‘녀석’이나 ‘놈’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조슈아는 곧바로 알아먹었다.
에화 시누엘 모스그라토.
황제 폐하와 모친에게는 ‘에화’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는 ‘시누엘’이란 이름을 쓰는 자.
그가 섬기는 주인을 매번 패배감에 잠기게끔 하는 그자를, 조슈아는 진심으로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했다.
하필 세상도 무심하여 그토록 경박스럽고 천박한 씨에게 천재적인 두뇌와 황제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주다니.
놈은 얼핏 상냥한 척, 친절한 듯 보이지만 그건 모두 거짓이다.
사람의 목숨에도 금액을 붙여 개미보다 못하게 여기는 폭군의 상이 바로 그놈이었다.
“되었다. 모스그라토 대공령. 혹은 에화 놈의 손에 있기만 한다면 언제든 되돌려 받을 수 있으니. 황태자비 자리도 그리 싫다고 발악한 계집 아닌가. 대공비가 되려 할 리 없다. 어디 한번 놈이 쩔쩔매는 꼴을 보고 싶군.”
“……예, 전하.”
그런 것 치고는 영 얼굴이 말이 아니신데요.
조슈아는 그 생각만큼은 입속으로 삼켰다.
펜대를 쥔 황태자의 손이 희게 질려 있음을 본 탓이었다.
레그리아 로에르멜은 반드시 대공령에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오히려 곤란해졌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뜻이니까.
“모르말라 가루 공급은 끊었나?”
“예.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숲이 불타서 더는 공급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불만은 가져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숲이 타는 걸 본 기사들이 한둘도 아니고요.”
“시장 가치가 치솟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유분을 조금씩 풀도록. 아직 전쟁 자금이 모자라다.”
“알겠습니다. 일전에 미리 거짓 소문을 위해 섭외해 두었던 갓난아기들은 협조하는 신성인에게 넘기겠습니다.”
그 고대의 숲이 불타는 장면은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으므로 당연히 수없이 회자되기에 좋았다.
모르말라 가루가 재임신에 효과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귀족은 몇 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자가 훨씬 많으니 더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조슈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꼽아보다가 정말로 피곤해 보이는 황태자를 흘긋 보았다.
레그리아 님이 휴식이자 안식처가 되어주기를 바랐는데 참 세상이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않지.
한숨과 함께 이만 나가보려고 인사를 올리고 문을 열던 바로 그때였다.
“전하! 전하!!! 급보입니다!!!”
저 앞에서부터 검은 망토를 두른 기사가 미친 듯이 달려 들어왔다.
빗물을 머금은 망토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긴 웅덩이를 만든다.
본래라면 저런 차림일 때, 반드시 입구 쪽에서 접견 복으로 갈아입고 들어오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한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건 아주 급하고 정말로 중요한 소식일 때뿐.
말없이 문가에서 비킨 조슈아는 기사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조지 멕시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