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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134)
  • 89화

    확인 사살.

    소름 끼치는 단어에 파르르 떨자 에화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이. 걱정 마요, 누나. 내가 죽게 내버려 뒀을 것 같아?”

    “그러면….”

    “숲에 우리 애들을 좀 풀어 놨거든.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즉사는 아니었어. 물론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죽었겠지만… 우리 애들이 주시하고 있다가 전투가 끝나자마자 주워 왔지. 회복력이 괴물 같더라.”

    다행이다. 줄줄 이어지는 설명에 레그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지 않았구나.

    그 하나만으로도 갑자기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레그리아.”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에화가 마치 명화 속의 인물처럼 그려낸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남자가 죽으면 어떡해. 그럼 아픈 기억이 되어서 평생 네 마음속에 자리하게 될 텐데. 그렇게는 못 놔두지.”

    장난스레 누나, 누나하고 부르던 호칭이 바뀌었다. 동시에 침묵 속에 긴장이 어렸다.

    레그리아의 마른 손가락을 얽어 쥐곤 가만히 당겨 온 에화는 뼈가 도드라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낙인이라도 찍듯 길고 오래, 뜨거운 입술이 그녀를 삼킬 듯 자리한다.

    이제 레그리아는 에화가 불쑥 드러내는 저것이 독점욕임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모스그라토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이건 직감이다. 라히크는 그 오만함이 되레 방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에화는 달랐다.

    결코 틈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에화를 상대할 수 없었다. 특별한 사람이더라도 웬만해서는 에화를… 이길 수는 없다.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라히크 때처럼 똑같이 하나뿐.

    에화와 결혼하는 것.

    “여하튼 그 초원인은 치료한 다음에 초원까지 무사히 데려다 놔줬으니 괜찮아요. 이제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어.”

    에화가 기분 나쁜 티를 여실히 내며 살살 웃기에 레그리아는 일단 치하를 하기로 했다.

    “그렇구나. 네가 수고를 했네.”

    “별것 아냐. 누나를 위해서라면야.”

    “그래, 고생이 많았어.”

    “맞아, 나 고생 많았어. 그러니까 예뻐해 줘요.”

    에화가 다시 쾌활한 척을 하자 레그리아도 그에 맞추어 주었다.

    하지만 입안이 메마른다. 누군가 모래알을 집어넣은 것처럼 목구멍이 까끌거렸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달아날 수 있을까.

    라히크같은 끔찍하게 오만한 작자보다야 에화가 낫다지만 그러면 정말로 황위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데…….

    “누나, 이거 봐.”

    “응?”

    생각에 잠겨 걷느라 주변을 거의 둘러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에화가 그녀를 불렀다.

    “쨘!”

    “…?”

    개구지게 웃으며 두 팔을 펼치기에 뭔가 했더니 그네 의자였다.

    여름꽃이 피어나는 나무 사이에 만들어놓았는데 어딜 어떻게 보아도 새것 냄새가 풀풀 났다.

    “설마 네가 만들었어?”

    “응. 마음에 들어? 한 번 앉아 봐.”

    에화의 성화에 못 이겨 엉덩이를 대자 꼭 꽃에 파묻힌 것처럼 느껴진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높고 푸른 달. 모든 것이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모른 척, 자유 따위의 고통스러운 개념을 잊어버리고 모스그라토 대공령에 있기로 결정한다면 이런 평온함이 제 것이 될까.

    그런 생을 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에화가 뒤에서 그녀를 조심히 끌어안아 왔다.

    “이건 누나만 앉을 수 있는 그네야. 앞으로도 내가 뭐든지 다 해 줄게. 원하는 것이든 원하는 줄 미처 몰랐던 것이든 다.”

    “낭만적이네.”

    “대부님도 대모님께 그렇게 하시거든. 나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만 보고 자랐어. 누나가 지금 당장 내게 무엇도 줄 수 없다 해도 괜찮아. 내가 많이 가졌으니까, 내가 먼저 줄게. 내 거 다 줄게.”

    귓가를 맴도는 속삭임에 힘이 있었다. 꼭 그렇게 해 주겠노라는 약속은 허언이 아니다.

    나중에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진심이라는 게 절절히 와 닿았다.

    ‘에화는 분명 결혼하자고 했었지. 반려가, 짝이 되어 달라고.’

    어린 치기일지는 몰라도 레그리아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만 판단했을 때는.

    잘 정돈된 정원의 오솔길을 걷는 것처럼 돌부리 하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몰랐다.

    줄곧 그녀가 원했던 바로 그런 모습으로.

    “걱정 마. 혹시 누나가 망설이는 이유가 황위 싸움 때문인 거면 그것과 관계없을 수 있도록 해 줄게. 누나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해. 나, 그 정도 능력은 된다?”

    조금만 타협하면.

    조금만 물러서면.

    조금만…….

    하지만 찰나, 떠오른 건 비칸이었다.

    끝까지 투쟁하고자 하던 그. 전쟁을 치르더라도 타협하지 않으려던 그.

    조금만 물러서서 아리툼으로 지나갈 길을 내어주면 될 텐데, 그럴 수 없다며 단호하게 대꾸했지.

    피를 흘려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겠다.

    그 새파란 결의를 어찌 미련하다 탓할까.

    레그리아는 비칸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자주 독립 투사들을 떠올렸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기개 높던 그들과 비칸은 닮아 있다.

    물론 독립투사나 비칸과는 달리 레그리아가 원하는 건 보잘것없는 제 인생 하나를 오롯이 지키는 것에 불과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게 아니라 고작 제 인생 하나를 지키는 일이 그렇게까지 고귀할 순 없겠지만 사람에겐 누구나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타인이 보기엔 이해되지 않고 어이없고, 심지어는 멍청하고 한심해 보일지라도… 그 마지노선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그걸 잃어버리면 자신이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므로.

    ‘보고 싶다.’

    불쑥 치미는 그리움에 레그리아는 황급히 혀를 깨물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다.

    감정이라는 게 통제가 되는 것이었더라면 라히크에게서 달아나지 않았을 테니까.

    참고 숙이고 그를 사랑해보려 애를 썼겠지.

    ‘나는 비칸을 다시 보고 싶어.’

    그를 만나 괜찮으냐고, 많이 다치진 않았느냐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런 말들을 전하며 그녀를 지키느라 입었을 상처를 보살피고 싶었다.

    ‘그러려면 차라리 모스그라토 대공령에 가만히 있는 게 나을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비칸이 찾아오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그녀 역시 아무 권력 하나 없이 초원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라히크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상황인데.

    ‘에화의 말이 진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렇다면 비칸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아는 거야.’

    모스그라토는 라히크와 반대 파벌이니까, 혹시 어쩌면... 여기서 그녀가 초원을 도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약혼 정도는 하더라도 얼마든지 깰 수 있으니까.’

    그네에 앉아 생각을 이어가던 레그리아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라히크의 눈가를 찢은 건 비칸이 한 거야?”

    그러자 에화 역시 능청스레 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며 답을 주었다.

    “음, 아니. 그건 웬 짐승이라던데.”

    “숲의 왕…!”

    “아, 그게 숲의 왕이야? 그게 그렇게 된 거구나.”

    “숲의 왕에 대해 알아?”

    “알지. 좀 깊은 숲에는 웬만하면 지배하는 놈이 있기 마련이니까. 우트가르드의 먹이사슬 최상층에 있는 놈이 누군지는 몰랐고.”

    에화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근처의 나무에서 흰 꽃송이를 땄다.

    “형과 초원 전사가 싸운 뒤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라. 갑자기 나무 위에서 거대한 육식 짐승이 뛰어 내려와서는 인정사정없이 라히크를 쥐어팼대.”

    예술적으로 생긴 손가락이 그녀의 귓가를 넘기며 꽃을 꽂아 주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머리칼을 매만졌는데 그건 예전처럼 허리께까지 흘러내리지 않아 금세 끝나고 말았다.

    “눈가가 찢어진 건 놈이 발톱으로 공격을 해서 그래. 누나를 쫓아가던 형은 그걸 제대로 막지 못했다나 봐.”

    “아.”

    “그대로 실명이라도 해 버리면 일이 편해지련만. 아쉽게 됐지.”

    에화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진심으로 아쉬워 보여 소름이 돋는 건 둘째치고, 저 말에서 레그리아는 정보를 얻었다.

    라히크도 멀쩡하구나.

    멀쩡히 살아 있든 말든 알 바는 아니지만.

    ‘그러면 어떻게 되었는지 상황을 모르는 건…….’

    둘뿐이다.

    “부탁이 있어.”

    “와, 기쁘다. 누나가 나한테 부탁도 하고.”

    그네에서 일어선 레그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커다란 새가 조각된 분수대가 보였다.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분수대를 보고 선 레그리아는 에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에르멜 가문에 하녀나 손님 한 명이 들지 않았는지 좀 알아봐 줘. 내가… 견습 신관 한 명을 빼돌렸거든. 디트리히를 통해서.”

    “견습 신관을요? 어쩐지. 신황청이 뒤집힌 게 누나가 없어져서만은 아니구나?”

    “응.”

    “와, 대담해라. 그걸 알아보는 정도야 어렵지 않죠. 하지만…….”

    “알아. 대가가 필요한 거지?”

    에화가 말없이 긍정했다.

    에화는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건 아무렇지 않아 했다.

    전 재산도 자기가 ‘주고 싶으면’ 그녀에게 다 줘 버릴 성격이지.

    그러나 반대로, ‘주고 싶지 않은 것’이나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을 요구하면 대가를 받아 갈 타입이었다.

    조금 덜 오만하고 더 상냥하다뿐, 에화 역시 큰 줄기 내에서는 라히크와 다르지 않았다.

    최소한 그녀가 느끼기에는.

    “부탁할게.”

    레그리아는 두 손을 뻗어 에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런 뒤, 에화가 바라고 있을 만한 행위를 기꺼이 내어주었다.

    쪽.

    콧잔등에 한 번.

    쪽.

    이번에는 이마에 한 번.

    그리고 다음은…….

    “잠깐. 알겠어요, 알겠어. 대가는 충분해요.”

    입술에 입 맞추려 했으나 에화가 그녀를 막았다.

    조금은 서글프고 어딘가 자존심이 상하는 듯, 하지만 기분이 좋은 오묘한 얼굴로. 귓불이 완전 붉어진 걸 보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아봐 줄게요. 누나가 원하는 게 뭐든.”

    “고마워.”

    다행이다. 이렇게 쉽게 넘어와서.

    하지만 에화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근데 누나. 난 누나를 자유롭게 놓아줄 순 없어. 그래 봤자 내가 아니라 딴 놈이 채갈 거거든.”

    “…….”

    “그러니까 생각 잘해요. 이 나라에서 지위를 얻는 게 오히려 자유로워질 방법이니까. 대모님처럼.”

    에화의 분홍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결혼 상대는 자신밖에 없다는 듯이 요염하게.

    * * *

    “음, 이건 좀 자존심 상하는데.”

    레그리아가 침실로 돌아간 뒤, 정원에 혼자 남은 에화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를 너무 동생처럼 생각하는 느낌인데.’

    남자로, 이성으로 여겼더라면 그토록 쉽게 입 맞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입맞춤을 받는 것만 해도 이렇게 부끄럽고 가슴 뛰잖아. 그럼 직접 하면 어떻겠어.

    ‘좋지만 싫어. 싫은데 좋고.’

    에화는 투덜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어떻게 해야 남자로 보일 수 있을까.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 주면 되나? 호칭부터 바꿀까?

    가까워지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다. 저 경계심 많은 레그리아를 어떻게 녹여낼지 매일 열심히 치열하게 고민을 해야겠지.

    대부님도 대모님의 마음을 얻는 게 쉽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마지막에 선택받는 게 형이 아니라 내가 되면 좋겠다.”

    우뚝 서서 중얼거리던 에화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얹었다.

    레그리아가 제 곁에 있다는 걸 감추려면 해야 할 일이 좀 많았다.

    안전 가옥 몇 채를 돌아가며 지내기도 해야 할 테고. 레그리아가 탈출할 수 없도록 주변 감시도 강화해야 하고.

    ‘자, 그보다는 일단. 초원에 가서 거래를 마무리 지어 볼까.’

    히죽거린 에화의 발밑이 눅진해졌다.

    늪으로 빨려 들어간 에화가 다시 나타난 곳은, 국경 너머.

    원시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초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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