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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34)

88화

만찬장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식탁 중앙을 장식한 보드라운 흰색, 분홍색 꽃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은식기 위엔 냅킨이 곱게 접혀 마찬가지로 분홍색 리본에 단정히 묶여 있었다.

특이한 점은 보통의 식탁처럼 길고 쭉 뻗은 형태가 아니라 원형 테이블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사람 간의 거리가 멀지만 후자는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깝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아, 누나! 어서 와요!”

아까와는 달리 아주 차려입은 티가 나는 에화가 레그리아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마치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는 여우처럼 그녀에게 다가온 에화는 당연하다는 듯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레이디.”

“여기서 식탁까진 고작 네 발자국 정도인데?”

“그래도 고귀한 숙녀께는 당연히 에스코트를 해드려야지. 사실은 방문 앞에서부터 기다렸다가 같이 계단을 내려가고 싶었지만….”

말을 이으며 에화가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 주었다.

새하얀 의자 등받이는 생화로 장식되어 있어 앉자마자 싱그러운 향기가 훅 끼쳐 왔다.

고백하자면, 참 아름다운 집이었다.

이곳의 주인 내외는 물론이고 고용인들까지도 모두 저택을 아끼고 사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너무 평온하여서 기를 쓰고 경계하려는 자신이 자꾸 우스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누나가 기겁할까 봐 얌전히 식탁에서 기다렸지.”

나 잘했지?

꼭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이 너무나 무해해 보여 레그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간호해 줘서 고마워.”

“에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누나가 고마워할 건 없어.”

담백하게 대꾸한 에화가 그녀와 팔꿈치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앉더니 손등에 턱을 괴고는 싱글거리며 웃었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니까, 연회 같은 데서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짓던 가면 같은 얼굴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라는 뜻이었다.

이게 에화의 본래 얼굴일까.

그늘 한 점 없이 편안해서 마주 앉은 그녀까지도 편안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일찍 오셨군요.”

“아, 대모님!”

“레그리아 님을 너무 귀찮게 하지 마세요, 시누엘.”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와는 다른 드레스를 차려입은 대공비가 나타났다.

백조처럼 우아하게 자리에 앉은 대공비는 레그리아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걸음이나 그려낸 듯한 표정이 너무나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았다.

‘하지만 분명 대공비도 신성인이었는데.’

레그리아는 가계도를 보고 외웠었다.

귀족과 결혼을 하였음에도 아이도 낳지 않고, 죽지도 않은 신성인은 몇 되지 않았으니 모스그라토 대공비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대공비 역시 그녀처럼 이 세계의 이방인일 텐데,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씨시 아주머니와는 달리 대공비는 완벽하게 이곳에 동화했다.

그래서인지 행복해 보였다.

…부럽게도.

“최대한 속이 불편하지 않도록 부드러운 것 위주로만 준비하게 했습니다. 드시고 싶은 만큼만 드시고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누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우선 게살죽을 만들라 하였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본디 어느 나라에서 살다 온 건지 몰라 수프가 나을까 죽이 나을까 고민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한 식사는…… 정말 놀랍게도 맛이 있었다.

그녀 몫의 죽은 환자식으로 곱게 갈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게살의 맛은 확실하게 났으며 간도 딱 알맞았다.

몇 스푼 뜨자 속이 따끈해진다.

자신이 먹은 게 그냥 음식이 아니라 이 저택의 분위기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맛있어?”

“그러네. 요리사의 실력이 아주 뛰어난 것 같아.”

“그으래?”

에화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레그리아를 챙겼는데 부담스러울 법한 걸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그의 장점이자 특이한 부분이었다.

어쩐지 콧대가 높아지고 어깨가 으쓱해진 것처럼 보여 레그리아는 죽을 바닥까지 비운 뒤, 조용히 물었다.

“혹시 네가 만들었어?”

“와, 누나는 천재네. 맞아, 고민은 대모님이랑 같이 했지만 만든 건 내가 만들었어요.”

아니, 그렇게 알아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모를까.

하지만 의외이기는 했다.

요리를 잘해?

귀족은 주방 근처도 갈 일이 없을 텐데.

‘아, 하긴 일전에 이렇게 말하긴 했었어.’

“아, 근데 나랑 결혼하면 맨날 내가 밥 차려 줄 텐데. 아내한테 밥 차려 주는 게 내 꿈이거든.”

에화를 처음 만났던 날이었나?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허풍이라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제 보니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누나가 깨어나서 처음 먹는 식사는 꼭 내가 해 주고 싶었거든. 이것도 먹어 봐요.”

에화가 눈웃음을 치며 아주 부드러워 보이는 바닐라 푸딩을 내밀었다.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으니 달았다.

이 집의 분위기를 디저트로 형상화 하면 딱 이렇지 않을까.

몽글몽글하고 다디단 바닐라 맛, 달걀을 부드러이 풀어서 만든 디저트.

‘모든 상황을 제가 원하는 대로 이끌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가 없어.’

라히크라면 주방에 들어가서 이런 걸 직접 만들어줄까?

아니, 그 전에 그녀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이나 할까?

‘그럴 리가 없지.’

지금도 그녀의 건강이나 목숨에 대한 걱정보다는 제 손아귀에서 끝내 빠져나갔음에 분노하고 있을 텐데.

픽 웃음이 샐 뻔하여 레그리아는 입매를 꾹 눌렀다.

처음에 터진 것은 분명 비웃음.

그러나 스푼이 바닥에 닿을 때쯤, 등골을 타고 선연히 흐르는 건 황당함이었다.

‘설마 나, 라히크가 걱정이라도 하기를 바라고 있는 건가?’

무슨 그런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소름이 돋아 바르르 떨던 그녀에게 시기 좋게 대공비가 말을 건네 왔다.

“아마 제일 궁금할 것 같아 우트가르드의 상황부터 이야기를 해 드릴까 해요. 우선, 황태자는 지금 국경선과 항구까지도 수배령을 내린 상태입니다.”

“…수배령….”

“그래요. 조금 크다 싶은 도시에는 모두 황궁 병사가 주둔하기 시작했어요. 그도 모자라 용병대에까지 의뢰를 넣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진위 여부야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라히크가 할 법한 짓이었다.

찬찬히 되짚어보던 레그리아는 에화를 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때, 라히크가 내 뒤에 있었어. 바짝 쫓아온 건 아니지만.”

“음, 형은 나를 못 봤어. 내가 거기에 있었던 것도 눈치채지 못할 테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냐면 그때 형은, 눈 위쪽이 찢겨서 피가 흥건한 상태였거든.”

에화가 검지를 들어 레그리아의 눈꺼풀 위를 슥 그었다.

움찔한 레그리아는 그 때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려 했으나 하도 긴박했던 와중이라 라히크의 얼굴을 보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아니, 봤나?

사실 잘 모르겠다. 기억이 선명한 건 아니었다.

라히크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맹수 앞의 초식 동물처럼 무작정 뛰기부터 했으니.

“누가 누나를 도와준 건 알겠지만… 난 그 날, 그 시간. 알리바이가 있고.”

“늪을 통해 알리바이를 만들어 둔 장소에서 바로 내게 온 거야?”

“그런 셈이지.”

“내가 그 쪽에 나타날 줄은 어떻게 알고?”

이게 핵심 질문이다.

에화는 어느 순간부터 아예 스푼을 내려놓아 버렸다.

수많은 꽃 속에 파묻힌 남자. 연분홍색 눈동자 덕에 누구보다 꽃이 잘 어울리는 에화는 대답에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아주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사랑의 직감?”

“…….”

“농담인데 농담 아니기도 해.”

레그리아가 정색하자 에화가 황급히 변명을 했다.

“신성 기사 단장이 구멍을, 그러니까 경계가 약한 곳을 만들어뒀거든. 일부러 그런 거겠지. 초원인은 반드시 그쪽으로 향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 다음에는 지대가 높은 곳에서 불길 방향을 계산했고… 그러니까 대충 어디로 나올지 알겠던걸. 아주 단순한 소거법이었지.”

단순하다는 건 에화 입장에서나 그러하다.

찰나의 판단, 계산 능력 그리고 직감까지.

에화는 명실상부… 천재였다.

‘라히크가 싫어할 만도 해.’

왜 자꾸 라히크 생각이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에화를 보면 그랬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달의 앞과 뒤처럼. 혹은 빛과 그림자처럼…….

에화에겐 있는 것이 라히크에게는 없다.

에화에게 쉬운 것이 라히크에게는 늘 어려웠겠지.

에화가 숨만 쉬어도 거머쥘 수 있는 것이 라히크는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종류였으리라.

레그리아는 라히크를 싫어했다.

지난 몇 개월 내내 가까이 지내며 더더욱 싫어졌다.

그렇지만 그건 사실 어쩌면 자기혐오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히크를 보면 그녀 자신이 생각나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나니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궁금한 게 많이 있는데 다 대답해 줄 수 있으신가요?”

머릿속에서 다쳤다는 라히크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며 레그리아는 대공비를 응시했다. 웃지 않고 있으면 부리부리한 인상의 대공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상하게 고갯짓을 했다.

“전부 다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분명 깨어나면 알고 싶어 할 만한 것들은 추려 두었습니다. 에화와 산책이라도 하며 대화를 나눠 보시는 건 어떨지요?”

“그러면… 실례지만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레그리아 님.”

어차피 식사는 이제 끝이었다.

일어서는 그녀를 향해 대공비가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저는 본래 세계가 끔찍하였습니다. 마피아 부모 아래에서 자랐거든요.”

“…….”

“이곳에 온 뒤부터는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원하는 정보만 걸러 들을 수도 있고, 아예 귀를 닫을 수도 있지요. 누구도 당신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며 당신의 남편과 아들은 무한한 존중과 사랑을 보일 겁니다. 그게 모스그라토이니까요.”

그게 모스그라토.

레그리아 자신이 늘 꿈꿔 왔던 미래.

이상향 그 자체. 에덴동산.

대공비의 말을 곱씹으며 등이 밝게 켜진 정원으로 나온 레그리아는 제 어깨에 내려앉는 숄을 보며 에화를 돌아보았다.

“추울까 봐.”

“여름인데?”

“그래도. 밤에는 쌀쌀할 수도 있어. 여긴 지대가 높거든. 자, 나를 잡아요.”

에화가 또 슬쩍 팔을 내밀었다. 별로 잡고 싶진 않았지만 만에 하나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지면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아 레그리아는 에스코트를 받아들였다.

가슴 어귀가 간질거린다.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될 텐데, 사람이라는 게 간사하여 다정하고 편안한 것을 맛보자 금세 또 그 자리에 웅크리고나 있고 싶어졌다.

레그리아는 자조하며 질문을 했다.

“그런데 대공 전하는 안 계신 거니?”

“아아, 대부님은 지금 임시 신성 기사단장으로 가 있거든요. 표드르 이안 세비레이크가 투옥당해서.”

“투옥…!”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자기 입으로 일부러 폭주 상태에 접어들었노라 시인했으니까. 왜 그랬나 몰라. 뭐, 죽고 싶었을 수도 있고.”

에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표드르가 살아있다는 점에서 반은 안도하고, 감옥에 갇혔다는 말에 반은 걱정스러워진 레그리아는 눈매를 늘어트렸다.

“그래도 죽진 않을 테니 걱정 마요. 고문 같은 것도 당할 리가 없고. 아무리 그래도 세비레이크 가문의 아들인데.”

“…응.”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다 알면서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누나가 그런 표정 지을 이유가 없어요.”

에화가 그녀의 눈가를 꾹 눌러 위로 올렸다. 그러더니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초원인 말인데요.”

가장 마음에 걸렸던 주제가 나오자마자 레그리아는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죽었으면 어떡하지. 목숨을 잃었다고 하면. 더는 만날 수도, 은혜를 갚을 길도 없다고 하면.

레그리아는 비칸을 탈출시켰다. 하지만 준 것보다 더한 은혜를 입었다.

지난 14일간, 레그리아는 그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녀를 지켜 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골칫덩이인 그녀를 버리고 갈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음에도.

“안 죽었어.”

“아.”

“형도 어지간히 급했는지 확인 사살도 하지 않고 누나를 쫓아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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