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설마 간호를… 해 준 거야?”
“그럼 당연하죠. 누나 간호를 내가 해야지, 누가 해.”
“내가 얼마나…….”
여기까지 묻고 나자 목이 너무 말라 왔다.
에화는 다 안다는 듯 유리병을 들어 깨끗한 손수건에 물을 적셨다.
“지금은 몸의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어요. 이걸 입술 사이에 물고 천천히 빨아들여요. 그래야 탈이 안 나.”
“으응.”
“옳지. 착하다.”
물에 젖은 손수건을 입술 사이에 물면서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굳은 입술과 혀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미온수가 점점 더 이게 현실이라는 걸 증명해 주었다.
아까부터 이불에 대고 꾹꾹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도.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너무 평화로워서. 그녀가 언제고 꿈꾸었던 상황이라서. 그래서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에화의 집이라고?’
이렇게 눈물이 날 것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곳이?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누나가 깨어났으니까 얼른 가서 대모님께 알릴게. 의사도 불러오고. 일어나지 못한 지 한참 됐으니까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마요. 그러다 쓰러져.”
“…응.”
“그럼 잠시만.”
눈을 휘어 웃던 에화가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쑥 꺼져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던 레그리아는 저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을 하는 고양이를 향해 다시 한번 손가락을 뻗었다.
톡.
흰 손가락 끝과 고양이의 코가 서로 가볍게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레그리아는 정말로 깨닫고 말았다.
이게 현실임을.
너무나 상냥한 현실 자각이었다.
“세상에, 정말 깨어났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적으로 문이 열리더니 중후한 인상의 여인이 나타났다.
잿빛 머리칼을 위로 틀어 올리고 깃털과 작은 크기의 꽃, 보석으로 멋을 낸 자태는 굉장히 기품 있고 우아했다.
레그리아는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맞혔다.
어딜 어떻게 봐도 모스그라토 대공비다. 저런 위엄이 그냥 나올 리가 없었다.
“반가워요, 레그리아 님. 황태자에게 벗어나기 위하여 모스그라토에 망명을 청하였다는 사연은 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대공비 전하.”
대공비 전하는 목소리마저 깊고 허스키했다.
굳이 상대를 찍어 누르려 하지 않아도 점잖게 가라앉은 분위기며 카리스마 있는 눈빛만으로도 괜히 주눅이 들게 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레그리아가 많이 어려워하는 유형이기도 했다.
“그냥 앉아 있어, 누나. 뭘 일어서려고 그래.”
레그리아가 침대에서 벗어나려 하자 대번에 달려온 에화가 그녀를 감싸고돌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른을 처음 뵙는 자리에서 병자라는 이유로 앉아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레그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보다 몸이 그리 무겁지 않기도 하고.
“제 차림이 이런 것을 사죄드립니다.”
“벨리그레엄어가 훌륭하군요. 차림은 신경 쓰지 말아요. 아픈 사람이 다 그러하지요.”
레그리아가 예법에 따라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건네자 대공비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그녀를 향해 다가와…… 다정히 안아 주었다.
“그곳에서 잘 버텨 주었어요. 많이 힘들었지요?”
“……!”
“고생했어요. 이리 예쁘고 가녀린 사람이 낯선 곳에 와서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울어도 됩니다. 모스그라토는 그대를 환영해요.”
“아…….”
왜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걸까.
레그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놓았다. 이러면 울음이 샌다는 걸 알지만 한순간 왈칵 차오른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일을 겪었고, 몇 개월 내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 숲에서의 2주는 최악이었다.
이제는 비칸까지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녀 하나의 탈출을 위해 몇 사람이나 희생된 건지.
그걸 생각하면 불안하고 무섭고 죄책감이 들었다.
가장 최악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히크에게서 벗어난 게 일단 기쁘다는 점이었다.
자기 자신이 사람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한데 생각지도 않게 이토록 다정한 위로를 받으니 그 모든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대공비 전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요, 많이 궁금하겠지요. 하지만 우선 씻어 볼까요?”
“아!”
부드러운 권유에 레그리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 제 상태가 얼마나 지저분할지 상상이 간 것이다. 그런데 더러운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안다니.
‘소탈한 분이구나.’
대공비 전하가 손을 높이 들어 올려 짝짝 손뼉을 치자 대기하고 있었는지 하녀들이 들어왔다.
쫓겨난 에화는 입모양으로 그녀를 향해 ‘나중에 봐요’라고 했고, 레그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끈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머리칼 색이 참 고우셔요.”
“맞아요, 레그리아 님. 물 온도는 어떠세요?”
“발등에 상처가 너무 많아서 딱지가 앉으셨어요. 제가 물에 살살 불려서 떨어질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세 명의 하녀는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고 두 눈은 반짝반짝했다.
레그리아는 이제 익숙해진 목욕 시중을 받으며 셀린을 생각하고, 디트리히를 생각했다.
다들 무사할까.
혹시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걸 알지 못하니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혹시 바깥의 소식에 대해 아는 게 있니?”
“음… 저희는 잘 몰라요.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해요, 레그리아 님.”
“그렇구나.”
순순히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묻자마자 곧바로 대답이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보를 통제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은데.
아까 살짝 감동을 받은 건 받은 것이고 이제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이성이 돌아오자 머릿속 회전이 느리게나마 되었다.
“어머, 세상에! 정말 잘 어울리세요. 어쩜 이렇게 기품 있으세요?”
“붉은 드레스가 역시 잘 어울리셔요.”
때를 벗기고 머리칼까지 다 말려 꽃향기가 나는 오일을 발라 빗어내니 사람 꼴이 되었다.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이리저리 돌아본 레그리아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는 치하를 했다.
“다 너희 덕분이구나. 고맙단다.”
“에이, 별말씀을요!”
“이 다음 어찌하라고 대공비 전하께서 말씀이 있으셨니?”
“잠시 쉬실 수 있게 해 드리라 하셨어요. 약 한 시간 뒤에 만찬이 있을 예정이세요. 물론 죽 정도만 드실 수 있겠지만….”
“그렇구나.”
레그리아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웃으며 창가로 향했다.
딱히 바깥에 감시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믿을 수는 없겠지.
레그리아는 이제 아무나 함부로 믿지 않았다.
‘결국 이 상황은… 내가 다시 갇힌 거나 다름없어.’
목욕을 하며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녀는 모스그라토 대공령 어디로 숨어들려 했지, 모스그라토 대공저에 올 계획은 아니었다.
앓는 그녀를 살려 줘서 고마웠지만 여기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여기가 아무리 따뜻한 공간이더라도 그녀의 ‘집’은 아니니까.
여기는 레그리아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손님일 뿐.
“잠시 혼자 있게 해 주겠니?”
“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옆방에 있을게요.”
“그래.”
하녀들을 내보낸 뒤, 레그리아는 정색하고는 침실 곳곳을 살폈다.
매트리스 아래에도 손을 넣어 쓸어 보고 침대 밑도 몸을 숙여 확인했다. 커튼 뒤도 일일이 살폈으며 작은 책장에 꽂힌 책의 제목도 쭉 확인하였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벽난로였다.
여름이어서 쓰이지 않아 옆에 놓인 쇠꼬챙이를 집어 들고 푹푹 찔러보기가 좋았다.
빌려 입은 옷에 재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펴본 결과, 이 방에 별다른 장치는 없었다.
아주 조심하며 벽을 살짝 만져 봤지만 두드려 보지 않는 이상에야 벽 안에 다른 방 같은 게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이건 차차 확인해 봐야 할 듯했다.
‘일단… 대공비는 내게 호의적이야. 만약 대공이 나를 싫어한다면 그런 태도는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지금의 모스그라토는 안전하다.
차분히 침대에 앉은 레그리아는 일전의 가면무도회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때 에화가 했던 말들을.
“내 짝이 되어줘, 레그리아.”
“그런다고 약속하면… 신황청에서 탈출하기에 가장 좋은 날을 알려줄게.”
“그날을 노려요. 그자는 초원 연합국이 자랑하는 최고 전사야. 연합국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자지.”
“그자를 이용해서 숲을 탈출해. 그래서 내게로 와요.”
레그리아는 에화의 그 말들을 다 믿은 건 아니었다.
몇 달간 표드르나 디트리히와 함께 검증을 거쳤다. ‘천사’ 역시 모스그라토 대공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솔직히 숲이 그토록 넓은데 그녀가 어디로 튀어나올 줄 에화가 어떻게 알겠는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에화는 알았어.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그러고는 라히크의 코앞에서 나를 낚아챘지.’
만만한 상대가 아냐.
아마 에화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을 것이다.
우트가르드 숲 안에서는 특별한 축복을 쓸 수 없으니까 그녀가 제 발로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터.
헛웃음을 짓던 레그리아는 만찬을 알리는 목소리에 소리도 없이 나붓이 일어섰다.
‘빌어먹을 벨리그레엄. 빌어먹을 황태자. 빌어먹을 정치니 권력이니 세력이니 하는 것들.’
레그리아는 자기 자신의 삶을, 인생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감금 장소가 달라졌을 뿐 탈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
레그리아는 꾹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연녹색 눈동자가 강인한 빛을 띠고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