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4)
  • 86화

    6. 선택(Auswahl)

    모스그라토 대공령은 늦여름에도 꽃이 핀다.

    붉고 흰 꽃이 덩굴지며 저택의 벽면을 장식했다. 색이 연한 나무를 베어 만든 창틀에도 호기심 많은 꽃 한 송이가 기어코 제 모습을 뽐내며 피어나는 더운 계절.

    남쪽에서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 특유의 반짝임과 열기를 품고 있었으나 워낙 저택이 지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에 덥기보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늘 웃는 낯으로 다니고 여기저기서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함께 난다.

    저택의 주인 내외와 그 아드님은 아랫것에게 너그러웠기에 고용인들이 잠시 한담을 나눈다 하여 탓하지는 않았다.

    이런 따스하고 여유로운 저택에는 모두가 애정을 쏟아 키우는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모스그라토 저택에서 30년 근속한 요리사가 키우는 고양이가 봄에 새끼를 낳았는데, 개중 한 마리를 데려온 것이다.

    상냥한 모스그라토 대공비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털북숭이를 예뻐하셨기에 그건 아주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름을 주고 저택에서 키우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무려 대공비께 ‘복덩이’라는 이름까지 얻은 녀석은 금으로 된 얇고 가벼운 목걸이를 목에 건 채 한껏 의기양양하게 저택을 누볐다.

    들어가도 되는 곳과 들어가면 안 되는 곳까지 모두.

    이 평온한 저택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쥐구멍 하나까지도 다 알고 있는 게 이 녀석, 복덩이이리라.

    오늘도 수염이 빳빳한 녀석은 꼬리를 살랑대며 동관, 해가 잘 드는 복도로 살금살금 향했다.

    관엽 식물이 심긴 커다란 화분 근처에서 낮잠을 청하는 게 복덩이의 가장 큰 취미 중 하나였는데 요 근래 그걸 방해받고 있었다.

    그래도 복덩이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낮잠 자리로 향했다.

    오늘은 괜찮겠지, 하면서.

    하지만 복덩이가 세수를 하다가 이내 잠이 들려던 찰나.

    “아아악!”

    깨끗하고 포근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삽시간에 복도를 뒤흔들었다.

    “아악! 아아아아악!!!”

    숫제 성대를 긁어내리기라도 하는 듯 고통스러운 발악에 복덩이는 꼬리털을 펑 부풀리며 화들짝 놀랐다.

    펄떡거리는 소심한 심장을 진정시키려 불만스레 애오- 하고 울던 복덩이는 소리의 진원지인 방문을 있는 힘껏 노려보고는 몸을 팩 돌려 떠나 버렸다.

    벌써 일주일째.

    복덩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자리에서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이런, 또 왔구나. 복덩아.”

    만약 소리를 지른 당사자인 레그리아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무척 미안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그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네가 조금만 참으렴.”

    애오옹.

    불만스레 우는 얼룩 고양이를 껴안고 녀석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턱 밑을 긁어 준 에화는 이내 착잡한 얼굴로 문 앞에 섰다.

    “들어갈게, 누나.”

    늪 능력으로 어디든 마음대로 오갈 수 있지만 에화는 절대 레그리아의 방엔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레그리아가 여전히 사경을 헤매며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선을 지킨다.

    그냥 그래 주고 싶었다.

    소중하게 대해 주고 싶으니까.

    에화는 노크를 한 뒤,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역시나 오늘도 레그리아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길고 긴 악몽에 사로잡혀 울고 비명을 지를 뿐.

    “안 되겠다. 잠시 대모님이 불러서 다녀왔는데… 오늘부턴 한시도 떠나지 않을게.”

    말을 한들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에화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많이 식어 버린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그런 뒤, 그는 다시 레그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에는 장갑도 없는 맨손으로.

    마치 체온을 전해 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자 헐떡이던 숨도, 끝을 모르고 내지르던 비명도 천천히 가라앉는다.

    신기하게도 레그리아는 에화가 손을 꼭 잡아 주기만 하면 발작이 잦아들었다.

    “걱정돼. 얼른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에화는 붙잡혀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레그리아의 뺨을 찬찬히 문질렀다.

    마르고 앙상해진 어깨며 홀쭉해진 뺨. 퀭한 눈 밑까지, 모든 게 가슴이 아프다.

    형이라는 새끼는 레그리아가 이렇게 되는 동안 대체 뭘 한 건지.

    오늘도 속으로 라히크를 천 번쯤 욕한 에화는 땀으로 인해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 몇 가닥을 떼어냈다.

    “긴 머리도 예뻤는데, 단발도 잘 어울리네. 하지만 머리칼이 엉망진창으로 삐죽삐죽 잘려 있어. 깨어나면 내가 다시 다듬어 줄게, 누나.”

    달콤한 속삭임이 레그리아에게 가 닿기를.

    에화는 깍지를 낀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기도했다.

    어서 깨어나기를. 정신을 차리고 회복 단계에 접어들기를.

    레그리아는 몸도 마음도 환자였다.

    에화는 사람이 살찌고 행복해지는 데에 있어 모스그라토 대공령보다 더 좋은 곳을 알지 못했다.

    여기에서 오래 지내면 분명 괜찮아지리라.

    에화는 울적한 눈길로 레그리아를 바라보며 슬픔을 삼켰다.

    드디어 그의 품에 안은 것은 좋았지만 레그리아가 만신창이가 된 건 너무나 가여웠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은 알았으나…….

    “미안, 누나.”

    에화는 벌써 몇 번이고 반복한 사과를 다시금 입에 올렸다.

    “누나가 나든 형이든, 누구와도 더는 관계되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았어. 그런데 사실… 누나가 아무리 잘 도망쳐 봤자 이틀이 한계거든. 그것도 길게 봐준 거야.”

    레그리아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찾을 방법?

    죽는 것 외엔 없다.

    에화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과 국내외의 정세까지 모두 종합하여 선택과 결정을 하는 건 그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

    그래서 에화는 레그리아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어떻게’ 도망을 가는 게 좋을지, 그 방법을 그녀의 무의식 안에 심은 것이다.

    숲의 양쪽 방향 중, 모스그라토 대공령 쪽이 더 안전할 거라는 내면의 판단은 사실 에화로 인해 이뤄진 것이다.

    그가 친절하게 상냥하게 굴었기 때문에. 그리고 레그리아의 눈앞에서 라히크와 적대하였기 때문에.

    잘 모르는 데다 왠지 황태자의 손바닥 안에 있을 것 같은 수도 쪽보다 모스그라토 대공령 방향이 더 나을 거라 무심코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대공령이 황태자의 손아귀에서 안전할 수 있을 거라는, 얼핏 논리적인 듯한 기대가 그러한 판단을 고착화시킨다.

    아마 레그리아는 대공령 내의 어느 상업지에 숨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레그리아가 정말로 도망을 치려 했더라면.

    ‘수도로 숨어들었어야지.’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 외국인이 많은 수도의 상업 거리 같은 곳에라도 들어갔어야지.

    ‘표드르도, 디트리히도. 천사들까지도 다들 모스그라토 대공령이 낫다고 판단했다면 라히크도 그랬을 거잖아, 누나.’

    하지만 레그리아는 결국 모스그라토 대공령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에화가 미리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표드르는 신성 기사단의 단장에서 해임되기에 딱 좋은 죄를 저질렀다.

    숲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기사와 병사의 배치를 임의로 정하여 ‘경계가 약한 곳’을 만들어 둔 것이다.

    그리고 초원의 전사는 반드시 그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에화가 할 일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왠지 레그리아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곳에서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 뒤에는 마음대로 이동이 가능한 늪의 능력으로 낚아채 재빨리 달아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라히크가 보기 전에 한 발짝 먼저 움직인 에화는 레그리아를 끌어안자마자 사라졌다.

    그의 품 안에 보드라운 여체가 있는 건 몹시 기꺼운 일이었으나 동시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

    만에 하나 그의 예상을 깨고 도망쳤더라면 정말 달아날 수 있게 도와줬을 텐데.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어.’

    난 손에 들어온 건 놓지 않아서.

    “그러니까 푹 자. 깨어나면 아껴 줄게.”

    다정한 속삭임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레그리아가 ‘으응’하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찌푸렸다.

    에화는 그녀의 미간을 펴 주며 기다렸다.

    언제고 일어나기를.

    이제부터는 그의 시간이었다.

    * * *

    ‘여긴… 어디지?’

    그로부터도 5일 뒤.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린 레그리아는 멍하니 주변을 훑었다.

    한껏 앓았다가 다 낫고 일어난 것처럼 산뜻한 기분이다. 하도 좋아서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어서 어디 천국 같은 곳에라도 간 줄 알 뻔했다.

    창문엔 얇은 모슬린 커튼이 하늘거렸다. 그 너머로 비치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아름다웠다.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넘실넘실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뺨을 다정히 쓸어낸다.

    베이지 톤으로 이뤄진 벽지며 따뜻한 색의 가구가 이전에 지내던 신황청과는 전혀 다르다.

    장식품 하나까지도 하도 아기자기한 느낌이라 넋을 놓고 구경하게 되었다.

    “야옹.”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눈앞에 펄쩍 뛰어오르는 게 아닌가.

    움찔한 레그리아는 상체를 일으켜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야아옹.”

    “안…녕?”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이런 평화로운 풍경이니 레그리아로서는 아주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죽었나 봐.”

    단정적인 어조로 내뱉자마자 어디선가 푸흐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새카만 머리칼이 보인다. 그리고 꽃처럼 어여쁜 분홍색 눈동자도.

    “안녕, 잘 잤어요?”

    아, 어째서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방안을 차지하고 있는 이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한 향기는… 에화의 것인데.

    “궁금한 게 아주 많겠지만 일단은 식사부터 해야 해요. 주치의가 그러는데 누나가 일어나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반드시 며칠간은 아주 묽은 죽을 먹어야 한다더라고.”

    “여긴….”

    “우리 집. 모스그라토 대공령에 온 걸 환영해요.”

    에화가 애교를 부리며 예쁘게도 웃었다.

    한 손엔 막 갈아 주려던 물수건을 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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