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34)

85화

* * *

“야만족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숲이 울고 있다.

한평생 보게 될 거라고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얼어붙은 기사들은 느슨하게 던져진 물음에도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교감하고 있을 때 그 동물이 죽는 것이다. 야만족이 아닌 동물을 노려야 한다. 그게 야만족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지.”

나무가 산채로 불타는 냄새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숲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을 무감히 바라보며 라히크는 기다렸다.

어느 쪽으로든 레그리아가 튀어나오기를.

“맞불 놓았습니다!”

“불길 방향 확인 완료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여 라히크가 숲을 완전히 태워 먹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멍청한 등신이 아니다.

레그리아가 수도 방향으로 달아날 것은 아니니 숲을 다 태울 필요도 없었다.

우트가르드의 숲은 초승달 형태. 개중 절반, 그중에서도 일부만 타게 할 방법이 있다. 그리고 라히크는 그 정도는 이 숲의 자생력으로 충분히 복구가 가능한 수준이라 판단했다.

다만 신성의 숲에 불을 지르겠다는 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그리아가 사라진 것을 깨닫고 사람을 풀어 사방을 뒤진 것이 2일 차.

어디에도 흔적이 보이지 않아 아직 레그리아가 숲속에 있음을 알아차린 게 3일째 되던 날.

이유는 모르겠으나 숲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음을 파악하여 무수히 많은 인력을 투입하기 시작한 게 누적 5일 차.

그때쯤 라히크는 슬슬 분노 그 이상의 무엇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레그리아를 잡을 수도 있었으나 놓친 사건이 일어났지 않았나.

라히크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의 목을 죄 베어 버리는 대신 즉시 다음 계획으로 나섰다.

미리 불러 둔 저명한 식물학자에게 깃펜을 쥐어 주고 ‘불을 통해 숲에 상처를 내는 것이 오히려 빽빽한 숲속에 빛이 들어갈 틈을 만들어 새 생명이 자랄 길을 트는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만들었다.

그게 아주 거짓이었다면 몰라도 우트가르드의 숲은 지나치게 깊고 어두웠기에 이미 오래전 뿌리박은 것 외에는 새로 자라기가 어려운 환경인 게 맞았다.

숲은 불사조와 같다.

정확하게 계산하기만 하면 재에서 다시 움틀 수 있었다.

누구도 신성의 숲에 불을 지를 미친 생각을 하지도,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을 뿐.

하지만 라히크는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돌아 있었고 더불어 강력한 권력도, 힘도 있었다.

하여서 해당 보고서를 황제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는 것까지 걸린 시간이 누적 10일.

그 뒤, 라히크는 레그리아와 야만인을 숲의 경계 쪽으로 서서히 몰았다.

어차피 그쪽으로 갈 거라는 건 예견된 일이었으니 어렵지 않았다.

그 사이에 라히크는 숲의 지도를 놓아 타들어 갈 면적과 경로를 계산해 맞불을 놓아 진화할 것까지 예상하여 그림을 그렸고, 드디어 오늘.

레그리아가 그의 손아귀에서 달아난 지 누적 14일.

라히크는 숲의 양방향에서 동시에 불을 놓았다.

이 불길은 서로 맞물리면 거세게 타오르다 자연 소멸할 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었을 때는 조슈아조차 라히크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사실 장엄하던 숲이 불길에 휩싸이는 걸 직접 목도한 이들 중 그 누구도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동물들이 뛰쳐나올 때마다 침음성을 흘리며 잡아 우리에 넣을 뿐.

그건 결코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행방불명에서 납치로 규정된 예비 황태자비의 목숨이 천 마리 동물의 목숨보다 더 귀중하고 값지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없었다.

“……!”

그렇게 약 한 시간쯤 뒤.

온몸의 기감을 벼린 칼날처럼 예민하게 돋우고 있던 라히크가 선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람을 타고 움직인 것처럼 빨라 그 누구도 라히크가 어디로 향했는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라히크가 다시 나타난 자리.

거기엔 기대했던 레그리아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건방지게도 그의 앞을 버티고 선 것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야만족이었다.

놈은 레그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소중히 들고 서 있었다.

꼴같잖게도.

잠시간 서로를 노려보던 둘 중, 비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황태자. 너는 하늘에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군.”

“벨리그레엄의 황족은 신의 아들이다. 하늘 또한 내가 지배하는 자리일 뿐인데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너는 언젠가 한 번은 너의 오만함 앞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하늘은 네가 한 짓을 보고 들었다.”

“실로 야만인다운 저주로군. 동전의 앞면만을 보고 이면을 보지는 못하니 너희가 그리 짐승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발전에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맞불을 놓아 거대한 화마를 방지하였으니 이 고대의 숲은 상처 난 부분을 스스로 핥아 자생하리라.

그 과정에서 힘을 못 쓰던 새로운 식물들이 어깨를 펼 것이고 오랜 세월 숲을 억누르고 있던 지배 계층도 바뀔 터.

불길이 남긴 흉터에 모르말라 씨앗을 뿌려 자라게 하면 그 일대가 모르말라로 뒤덮여 훨씬 많은 양을 재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히크는 진실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떳떳했다.

그런 라히크를 보는 비칸의 청회색 눈동자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 여자를 어디에 숨겼나.”

별 같잖은 대화를 더 나눌 생각은 없다는 듯 라히크가 부드럽게 질문했다.

완전히 미쳐 있는 금빛 안광을 주시하던 비칸이 묵묵히 대꾸했다.

“할리카는 네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누구의 것도 아니지.”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다만.”

라히크의 기색은 일견 차분했다.

숲에서 2주 내내, 그것도 잠도 자지 못하고 쫓기고 싸우느라 야성적인 기세를 두른 비칸과는 달리 완벽한 차림.

문명 그 자체.

이런 자연의 한복판에서도 훌륭한 예복 차림을 고수하고 있다.

그 자신으로 인해 숲이 울고 있는 지금도.

비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제 눈앞의 악귀가 실로 역겨웠다.

생명은 그게 무엇이든 귀하다. 누군가가 권력으로, 혹은 즐거움으로 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초원으로 돌아가지 못해도 상관없다. 여기서 널 죽인다. 더 큰 악을 자아내기 전에.”

“내가 악이라 칭하는 건 너희 야만족의 시각일 뿐이다.”

대화는 거기까지.

비칸은 레그리아가 떠난 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라히크에게 그 어떤 단서도 주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불길은 시시각각 그들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무수한 잎과 줄기 사이에서 라히크가 검을 들어 올렸다.

주변 공기가 금안의 맹수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한 번 검을 세운 것으로 주변에 진공의 원을 그려낸 라히크는 오만한 낯으로 비칸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쾅!!!

격돌이 일었다.

병사로 변장한 레그리아가 허겁지겁 달려 숲을 헤쳐나가던 순간이었다.

* * *

헉, 허억.

레그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신 달렸다.

숲이 불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비칸은 그녀에게 어디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를 모두 알려 주었다.

라히크는 그가 막을 테니 달아나라고 하면서 그녀의 등을 떠밀 때, 레그리아는 차마 같이 가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끝없이 달리고 달려 발의 물집이 전부 터지고 빼앗아 신은 군화의 딱딱한 가죽에 여린 살갗이 까져 피로 젖기 시작할 때쯤.

레그리아는 출구를 보았다.

숲은 중심일수록 나무의 둘레가 굵다. 어떤 것은 성인 남자가 넷이 달라붙어 안아도 안 될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확실히 숲의 경계로 갈수록 나무의 굵기는 점차 줄어들었다.

‘다 왔어. 이제 정말로 다 왔다고.’

발이, 허리가, 머리가 욱신거린다. 먹은 것 없는 속이 욱신거리고 온 위장이 쥐어 짜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새카만 연기를 적잖이 마신 탓일까.

비칸이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그녀를 보내었기에 기절하거나 생명에 위험이 있을 만큼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럽기는 했다.

‘안 돼, 멈추지 마. 움직여. 움직이라고.’

몸과 머리가 따로 논다. 눈앞이 핑글 돌았다.

레그리아는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이러다가 다리의 힘줄이 끊기겠다 싶을 정도로 억지로 발을 뗐다.

한 발 내려놓을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불길의 여파로 온몸이 불쾌하게 끈적거린다.

이대로 숨을 멎어도 그다지 놀라울 것 같지가 않았다.

콰아앙!!! 쾅! 쾅!!!

그때, 등 뒤에서 연속적인 굉음이 터졌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여서 레그리아는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레그리아는 보고 말았다.

늘 완벽하던 흰 예복이 짙붉은 피에 젖은 라히크를.

기절할 듯 놀란 그녀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숲의 출구는 머지않았다.

세 발짝.

고작 세 발짝 남았을 뿐.

“그걸 변장이라고 한 건가.”

픽 웃는 얼굴이 거칠었다. 라히크를 마주한 레그리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자리에서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

이번에야 말로 라히크는 그녀의 목을 조를 것이다.

“비칸을 어떻게 한 거야?”

“내 앞에서 다른 사내의 이름을 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비칸을, 어떻게 했는지 말해.”

“네 발로, 이곳으로 와라. 마지막 아량이다.”

뚝.

레그리아는 땅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밟았다.

앞으로 향한 것이 아니다. 뒤로 물러선 거였지.

숲을 나가는 것까지는 이제 고작 한 발짝이 필요할 뿐.

팽팽한 긴장감이 호흡을 가팔라지게 만든다.

그러나 레그리아는 대답을 내어놓는 것을 망설이지도 않았다.

“난 잡히더라도 이 숲을 나가서 잡히겠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달렸다.

황태자다운 예법, 매너, 관습 따위로 이뤄진 ‘황태자’라는 생물이 라히크다.

그는 결코 길거리의 저열한 사내들처럼 그녀의 머리채를 잡거나 어깨를 우악스레 쥐어 돌리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숲을 빠져나가 그의 명령을 어겼을 때 그 벌로써 목을 졸라 죽일지언정, 그렇게 애절해 보이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 스스로 굴복하고 들어오기를 원했으니까.

그 하나만큼은 확신했기에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레-그-리-아.”

그가 잇새로 새파란 분노를 내뱉었다. 동시에 레그리아는 그토록 염원하던 숲의 경계를 넘었다.

드디어, 드디어…!

“잡았다.”

이제 꼼짝없이 라히크에게 잡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레그리아의 눈앞에 보인 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내 품에 어서와, 누나.”

머리보다 후각이 먼저 상대를 인지했다.

쌉싸름한 박하향이 물보라처럼 번져 온다.

이 모든 여정 끝에 그녀를 잡아챈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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