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흣…!”
아주 짧은 접촉이었으나 온몸이 떨려 왔다.
라히크와 살을 맞댔을 땐 달아오르긴 했지만 머리 한구석은 차가웠다. 흥분하긴 하여도 그건 단지 오랫동안 정신 접촉을 한 탓일 뿐.
그래서 끝까지 가는 걸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라히크는 능숙한 사냥꾼이다. 성격도 더러웠다.
바깥에서 노닐던 새를 거머쥐면 곧바로 다른 새에게로 눈길 돌릴 그악스럽고 포악한 성품.
그녀를 완전히 취하고 나면 대우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게 분명했기에 레그리아는 어떻게든 거절을 했다. 라히크는 그걸 꽤 재미있는 앙탈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고.
어찌 되었든 그녀는 진심으로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야.’
비칸이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누르고 느른히 문질렀다.
그는 씻고 왔으니 나름대로 깨끗하다지만 그녀는 꼬질꼬질한데도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온기를 내어주는 데만 집중할 뿐.
거기서 더 뭔가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와 라히크가 아주 다른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이런 미세한 데서 드러난다.
라히크는 제 욕심을 채울 뿐이었고 비칸은 그녀를 위로하는 데 모든 중점을 두었다.
라히크의 중심은 라히크 그 자신이고 비칸의 중심은 그녀였다.
“나의 할리카.”
비칸의 음성이 사뭇 진지했다. 레그리아는 이제 더는 울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때 정신 접촉을 해서 그를 안정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칸, 지금 정신 접촉을 해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동물과 교감을 많이 했잖아.”
“20분간은 안전할 거다.”
“그럼 딱 거기까지만 할게.”
이제 레그리아는 정신 접촉이 사뭇 능숙했다.
자신이 원할 때까지만 접촉하다가 끊고 나오는 게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이내 눈을 감고 비칸의 상처 많은 손을 쥔 레그리아는 의식이 서서히 빨려드는 것을 느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수많은 양 떼에 둘러싸여 있었다.
“오랜만이네, 얘들아.”
비칸의 내면은 초원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 꼭 비칸처럼 광활하고 따스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에 발을 들일 때마다 레그리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매애애 하고 우는 복슬복슬한 양 떼를 하나하나 안고 달래주는 것도 즐거웠고.
‘어쩜, 내면도 꼭 그와 닮아서는.’
라히크는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했고, 표드르는 부서진 얼음 성을 복구해야 했다.
그리고 비칸은…….
“자, 다 됐다.”
레그리아는 다친 양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이 들판에 심긴 것은 죄 약초였다. 그걸 뜯어 빻아 양의 다리나 귀같이 상처 난 곳에 발라 주면 된다.
이 얼마나 다정한 속내란 말인가.
“아, 새끼 양….”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듯한 어린 양이 깡총거리며 레그리아에게 다가왔다.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피우기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좋다며 매애애 하고 운다.
레그리아는 그 양을 꼭 끌어안고는 온기를 나누었다.
20분의 시간이 지나 다시 어둔 동굴로 돌아가야 하기 전까지.
그리고 그게 레그리아가 기억하는 마지막 평화였다.
쐐애액!
날카로운 화살이 비칸의 발치에 꽂혀 흙덩이를 튀겼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황태자의 추격꾼에게 쫓긴 지 13일째.
레그리아는 차츰 인내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 * *
“몰아붙여라!”
“포위하라!”
황태자의 사냥개가 냄새를 맡고 컹컹 짖어 댔다.
아예 인해전술로 가기로 작정한 것인지 이 너른 숲에 사람이 없는 곳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비칸과 레그리아는 며칠째 잠을 자지 못했다.
한 곳에 두 시간 이상 있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사이 치러진 전투만 해도 벌써 몇 번인지.
비칸은 혼자서 수십 명을 상대해야 했고 그동안 레그리아는 방해되지 않도록 나뭇등걸에 딱 붙어 있었다.
두어 번인가 그런 그녀를 발견한 병사들이 소리를 치려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비칸이 부리는 부엉이가 날아와서 공격을 했지.’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탈출을 원하는 둘을 지켜보는 느긋한 시선이 있었다.
이 숲의 왕. 숲에 사는 것들의 지배자.
놈은 히죽거리는 낯짝으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우리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는 했다. 이따금 앞발이나 핥으면서.
“가자.”
“응.”
비칸은 검을 든 기사들을 완력으로 때려눕혔다.
싸우는 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는 정말 굉장했다.
순수한 육체만의 싸움으로 친다면 라히크도 이길 수 없지 않을까.
물론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니 무슨 수를 쓰든 상대방을 제압하고 죽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결코 둘이 몸으로 맞붙을 일은 없을 테지.
이건 그저 기대 어린 확신이었다.
“…….”
어느새 14일째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도 석양은 쏟아지고 그 불그스름한 빛을 받아 꿈틀거리는 근육은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전투를 치를 때마다 비칸은 안 그래도 큰 덩치를 더욱 빳빳하게 부풀렸다.
황궁 기사라 해서 키나 몸집이 작은 편이 아닐 텐데도 그런 비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이 밤만 지나면….”
“빠져나갈 수 있다.”
비칸은 이제 적당한 높이의 나무를 고르지 않았다.
이전에는 나무 타기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떨어져 죽기라도 할까봐 배려한 것인데, 이젠 레그리아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에 더 높은 나무를 오를 수가 있었다.
레그리아를 업은 채로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로 오른 비칸은 이파리가 적당히 있어 가려지는 곳에 그녀를 앉혔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온 세상이, 하염없이 붉었다.
마치 숲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저쪽.”
“숲의 경계구나.”
“저기로 가야 한다. 잊지 마라. 저기가 가장 경계가 약해.”
무수한 추격에 쫓기면서도 비칸은 착실하게 숲의 경계 근처로 이동했다.
이렇게 높이 올라서고 나서야 알게 된 거지만 우트가르드 숲은 두 개의 초승달이 꼭짓점을 맞붙이고 있는 형태였다.
볼록한 부분은 각기 동쪽으로는 수도, 서쪽으로는 모스그라토 대공령과 붙어 있다.
그녀가 가야 하는 건 서쪽이었다.
“이 옷을 입어라.”
비칸이 아까 챙겨 놓은 병사의 옷과 기사에게서 빼앗은 검을 내밀고는 그대로 다른 나무로 훌쩍 넘어갔다.
레그리아는 너덜너덜해진 드레스를 벗고 바지에 두 다리를 끼워 넣었는데, 우연찮게 옷의 품이 잘 맞아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맞지?’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녀는 엉망이 된 머리채를 한쪽 어깨로 모아 늘어트렸다. 그런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으로 머리칼을 잘라 버렸다.
단발이 아니라 아예 완전히 밀어 버리고 싶지만 그럴 만한 도구는 없으니 하는 수 없지.
대충 머리에 투구를 쓰면 알아보기 힘들 것 같기는 했다.
‘준비는 끝났어.’
남은 건 자정을 기다리는 일뿐.
“할리카.”
“응.”
“혹…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 비칸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레그리아 역시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붉은 노을이 어둠으로 서서히 바뀌는 시간.
레그리아는 먼저 입을 뗐다.
“그간 정말 고마웠어. 약속을 지켜 줘서. 잡히지 않게 해 줘서. 그리고 나를… 버리지 않아 줘서.”
“……그래.”
“내게 이름을 준 것도 고마워. 언젠가 내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한 번쯤 초원으로 갈게. 또, 살다가 당신이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도울게. 약속해.”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기가 싫은 건 비칸에게 너무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미련을 남기는 거다.
같이 초원으로 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으니까.
레그리아도 알았다. 그녀가 이대로 초원으로 향하면 라히크가 어떻게 할지.
예전엔 그녀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어차피 초원은 전쟁터가 될 거니까. 그래서 거기로 가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그녀가 초원으로 간다면 라히크는 본래 생각한 것의 몇백 배로 군사를 일으켜 불필요한 희생을 내고 짓밟으리라.
기어코 그 땅에 잡초 하나 자라지 못하게 만들 게 틀림없었다.
“라히크는 반드시 아리툼을 정복할 생각이야.”
“우리는 반드시 벨리그레엄을 막는다.”
“…죽지 마, 비칸.”
어쩌면 지금이 키스를 나누기에 좋은 타이밍이 아닐까.
찬란하게도 반짝이는 잔광이 비칸의 얼굴을 비추었다.
묵묵하고 조용한,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남자의 얼굴을.
“네게, 하려던 말이 있다.”
서로를 바라본 시간이 얼마나 되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눈 깜빡할 찰나에 불과했나.
어느 쪽이든 레그리아는 비칸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의 모양새 좋은 입술이 그려내는 내용에.
바짝 긴장이 되기 시작해서 그렇게라도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혹 괜찮다면 나와…….”
비칸이 힘겹게, 몹시 진중히 한마디를 꺼내놓으려던 찰나였다.
화르륵.
처음 닿아온 것은 매캐한 냄새. 그 다음은 연기.
타오르는 불꽃이 내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있는가.
나무와 동물의 비명을 두 귀로 들었다면 쉬이 잊을 수 없으리라.
크게 충격받은 레그리아는 비칸에게서 시선을 떼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윽…!”
“비칸!”
숲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숲은 불타고 있었다.
‘라히크, 이 미친 새끼가!’
길고 긴 세월 동안 쌓여온 부식토와 나뭇잎, 천 년도 넘게 자란 나무들이 화염에 휩싸인다.
도망치는 동물들의 발소리며 공포에 질린 울음에 비칸이 휘청거린 순간, 레그리아가 온몸을 던져 그를 끌어안았다.
“정신 차려, 비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