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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134)
  • 83화

    뜻밖의 제안에 놀란 레그리아가 눈을 살짝 치떴다.

    물론 비칸이 어떤 나쁜 생각을 갖고 한 이야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피로를 풀어 두는 게 움직이는 데 더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비칸은 라히크가 아니니까. 그처럼 무도한 사내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그녀의 상태가 그다지 깨끗하진 않다는 점이었다. 특히 발은 신체 중에서도 지저분한 부위인데 거길 손으로 주무르겠다니.

    “싫은가?”

    비칸이 있던 자리에서 몸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분명 그 눈빛 저변에 깔린 감정이 있는데, 그게 뭔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 역시 주변이 너무 어두운 탓일까.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어쩐지 가슴 어귀가 떨리며 동시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게, 굳이 그렇게까지.”

    “필요하다고 본다. 그냥 두면 위급 상황에 문제가 될 거다. 약초를 바르는 게 낫다.”

    그녀의 애매한 거절을 듣던 비칸이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할 바 몰라 눈을 굴리던 레그리아는 ‘약초’라는 단어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아함은 남아 있었다. 지금 그들의 손엔 약초가 없을 텐데.

    “이 숲의 동굴에는 ‘니약’이 자라더군.”

    “니약?”

    “상처에 바르면 빠르게 낫는다. 구해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얼마 걸리지 않는다.”

    이런 게 비칸의 장점이었다.

    그는 웬만해서는 설명을 한다. 무엇을 하는지, 어떤 걸 할 것인지. 왜 해야 하는지 등을 빠트리지 않고 말해 주었다.

    비록 간결하더라도 그런 설명은 대화를 만들고, 대화는 레그리아가 늘 원하던 것이었다.

    비칸과 함께 있으면 답답하지 않다. 무섭지도 않다.

    그는 함께 있는 사람을 불안하게, 혹은 미쳐 버리도록 만들지 않았다.

    “빨리 돌아와 줘.”

    “그래.”

    미약하게 속삭이자 비칸은 묵묵히 대답하고 일어섰다.

    레그리아는 자신이 앉은 곳에서 엉덩이를 옮겨 조금 더 구석으로 향했다. 바위 같은 것이 돌출된 부위가 있어 그 뒤에 몸을 숨기면 누군가 동굴 입구까지 들어온다 한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

    그렇게 떠난 비칸은 정말 머지않아 돌아왔다.

    “동굴 안에 샘이 있더군. 치료하고 물을 마시러 가도록 하자. 우선 니약을 씹어서 수분을 보충해라.”

    “안쪽에 물이 있어?”

    “그래. 니약은 물을 저장한다. 양치에도 도움이 되는 풀이야.”

    “잘됐네!”

    반색한 레그리아가 니약을 씹는 동안 두 발을 당겨 놓은 비칸이 풀을 손힘으로 짓이겼다. 두 손을 깨끗하게 씻었는지 약초를 발라 주는 그의 체온이 평소보다 차가웠다.

    “흣…!”

    그는 조심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상처 부위가 넓다 보니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고통 어린 신음이 샌다.

    멈칫한 비칸은 이내 그녀의 발가락 사이로 굵은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꾹꾹 눌러 발바닥 전체를 지압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보다 기꺼이 아래에 위치하는 남자.

    간지럽고, 아프고, 따갑고, 야릇하고.

    감정도 뒤죽박죽이고 그녀 자신도 뒤죽박죽이다.

    레그리아는 쓰게 웃다가, 허탈하게 한숨을 삼키다가, 조금 울었다.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던 비칸이 발을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느리게 뻗어왔다.

    그녀가 피하려거든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 만한 속도로. 부디 멀어져 달라는 듯이.

    하지만 레그리아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울지 마라.”

    “……나도, 울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흘러나와.”

    “네가 울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꼭 발가벗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야.”

    “재미있는, 표현이네.”

    사람이 너무 지치면 가만히 있어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는 걸 그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달래주지 말고 차라리 가만히 둬야 한다.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고 나면 해야 할 일을 찾아 일어설 테니까.

    그러나 비칸은 그녀를 내버려 두고 외면할 만한 성정이 되지 못한다.

    달래주고 싶어 쩔쩔매는 기색을 보자니 괜히 더 울고 싶어, 레그리아는 볼 안쪽의 여린 살을 콱 깨물었다.

    “그러지 마라. 그럴 바에 차라리 울어.”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비칸이 그녀의 뺨을 다정히 쓸어왔다.

    라히크는 매번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는데, 비칸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다.

    눈물이 차올라 희뿌연 시야 속에서도 그 차이가 새삼 닿아왔다.

    “소리 내어 울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자학이나 자해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태양 아래 태어난 귀한 몸을 아껴야 할 의무가 있다.”

    레그리아는 자신이 몇 시에 태어났는지 몰랐다. 비트리체가 몇 시에 태어났는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해가 뜬 시간이 아니라 아주 깊은 밤에 첫울음을 뱉었을지도.

    하나 진지하게 말하는 비칸에게 그리 대꾸하고 싶진 않았다.

    비칸의 다정은 투박한 형태였지만 진심만이 빼곡하다. 흘려듣지 않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이리라.

    “너는 레그리아라고 불리기 싫다 하였지.”

    “응.”

    “그렇다면 그 한 가지는 내가 들어줄 수 있다. 무어라 불리고 싶은가.”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 짓무른 눈가를 닦아내 주었다.

    몇 번이고 물기를 거둬 가는 손길에 스스로를 내맡기며 눈을 감아 버린 레그리아는 두세 가지 이름을 떠올려 보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 생각이 날 리가 있나.

    “그렇다면 네게 새로운 이름을 주어도 되겠나.”

    “내게?”

    “처음 너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는, 나 역시 너를 탈출의 수단으로 여겼다.”

    비칸의 낯에 착잡한 죄책감이 어렸다.

    순진하기도 하지. 고작 그런 게 뭐 그리 미안하다고.

    “하지만 너와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달라졌다. 너는… 이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럴까? 사실 나는 이제 모르겠어. 내가 운이 나쁜 건지, 아니면 내가 정말 모든 걸 잘못한 건지.”

    “신께서는 늘 시련을 주신다. 최고 전사는 시련을 뚫고 성장하지. 허나 시련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최고 전사가 될 영혼만이 시련을 받을 수 있다.”

    그게 뭐야.

    그렇게 가볍게 말하려던 입술은 떨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싫어.

    그녀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바란 것은 평화롭고 안온한 자신만의 작은 삶뿐.

    그런데 왜 제멋대로 시련을 주는 건지 모를 일이다. 누가 바라기라도 했다고.

    “억울하겠지. 분하기도 할 것이다.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며 신을 원망하고 싶을 테고.”

    비칸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견뎌야 한다거나 하는 원론적인 대답을 듣는다면 조금 실망할 것 같아, 레그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최고 전사들이 그토록 낙원에 가고자 하는 건 신을 죽이고 싶어서다.”

    “뭐…?”

    “최고 전사라면 누구나 신살자를 꿈꾸지.”

    신살자(神殺自).

    너무나 뜻밖의 단어에 절로 눈이 커졌다. 어느새 눈물도 뚝 멈추었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히 싸우고,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나면… 그 끝에 이르러 최고 전사의 영혼은 낙원으로 향한다. 신이 만들어둔 위로의 공간으로.”

    “…….”

    “거기에서 우리는 날카롭게 벼려진 영혼으로 신을 죽일 것이다. 원치 않은 고통을 억지로 떠넘긴 자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아.”

    “그게 최고 전사의 본심이다. 부족원들에게도, 같은 씨족 사람에게도. 하물며 제 반려에게도 말하지 않는 속내다.”

    순간, 레그리아는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제 처지만 신경을 썼다. 그러기도 벅차다고 여겼고.

    사실 비칸은 최고 전사이니 초원에 돌아가기만 하면 행복할 거라고 무심히 여긴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실, 비칸도 최고 전사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면?

    “나는 너를 할리카라 부르고 싶다. 고대에 쓰였던 말로… 신을 속이는 자라는 뜻이다.”

    “신을 속이는 자?”

    “그래. 넌 착해서 신을 죽이고 싶을 것 같진 않아서. 하지만… 신을 속여 이 이상의 시련을 받지 않고 지나가기를 바란다.”

    비칸과 가까이 지낸 건 요 며칠이 다였다.

    그간 지하 감옥에 찾아가기는 했어도, 그래 봤자 잠깐일 뿐.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서로에 대해 알아갈 길은 없었다.

    ‘그런데 라히크보다 비칸이 나를 더 잘 알아.’

    마치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리듯 감동이 잔잔히 번져나간다.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얼룩져 있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퍼지자 비칸은 그제야 안도한 듯 보였다.

    “할리카.”

    “…응.”

    “할리카.”

    “응.”

    그녀를 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비칸이 몸을 일으켰다.

    이 긴 대화 중에 최초였다. 그의 시선이 그녀보다 위에 있는 것은.

    그러더니 그가… 레그리아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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